나는 너의 정체를알고 있다 - P11

그 시절, 나는 엄마보다도 아빠보다도 지리산이 그리웠다. 백운산을 뒷산으로, 지리산을 앞산으로 보고 자란 탓인지 모른다. - P13

"홍은혜입니다."
막 주워대고 보니 절친의 이름이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 P18

A의 집은 깊은 어둠에 잠겨 있었다. 시골 어르신 누구나그렇듯 A의 부모님도 일찍 잠자리에 든 듯했다. A는 막둥이였고, 형과 누나들은 죄 객지살이를 하는 중이었다. 그무렵의 누구나 그랬다. 나이 들면 당연히 떠나는 곳, 고향은 그런 곳이었다. - P45

나는 아직도 A가 겪고 있는 불행의 긴 터널을 A처럼 담담하게 직시할 수가 없다. 그래서 A와 술 마시는 게 즐겁지 않다. 가슴이 먹먹하고, 알 수 없는 무엇엔가 화가 치민다. 그 여름밤, A가 직접 만든 밤나무 위 오두막에서의 그하룻밤이 사무치게 그립다. 그때의 싱그럽던, 똑똑하던, 깔끔하던, 능청스럽던 스물두엇의 A도 눈물겹게 그립다. - P53

"마셔. 우리에게는 알코올이 있잖아. 알코올처럼 인생에잘 어울리는 게 없어."
맑고 투명한 호수 같은 데이브의 푸른 눈동자에 희미하게 웃음이 번졌다. 데이브가 한국에 있는 동안 우리는 그렇게 자주 잔을 부딪쳤다. 지리산에서도. - P59

먹이사슬로부터 해방된 초원의 단 하루, 이것이 술의 힘이다. 최초로 술을 받아들인 우리의 조상도 아프리카 초원의 저 동물들과 다를 바 없었을 것이다. 해마다 돌아오는해방의 하루 숙취의 고통을 알면서도, 술 깬 직후의 겸연쩍음을 알면서도, 동물들은 그날의 해방감을 잊을 수 없어또다시 몰려드는 것일 테다. 다시 - P67

살면서 다시는 그런 날을 만나지 못했다. 그런 날이 어찌 흔하랴. 오천 원으로 여섯 명이 만취한 밤이라니! 할매의 따스한 호의가 만든 기적과도 같은 밤이었다. - P86

나는 한 방울의 눈물을 찔끔 떨궜다. 위스키는 소주는천천히 오래오래 가만히 마시면 누구나 느끼게 된다. 살아있는 모든 것에 대한 연민 - P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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