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택에 능한 사람과 상대적으로 그렇지 못한 사람은 있을지라도. - P188

그때 구직 활동을 계속했더라면 지금과는 다른인생을 살게 되었을까. 그러나 그런 경험은 한 번으로 족하다, 그 길은 내 길이 아니다 결론 내리고 곧바로 대학원에 진학해 시를 썼고, 숱한 탈락과 경제적곤궁 속에서도 그 선택을 후회해본 적은 없다. - P190

우는 손이 슬픔을 알아보고 쓰다듬는다. 악몽에 시달리는 손이 빛을 뒤적인다. 열매를 위해서 적화했던 순간들을, 손은 전부 기억한다. - P191

없음의 있음을 기약하며 이름을 붙이는 행위. 그것이야말로 시의 임무가 아닐까. - P196

내가 쓸 수 있는 건 죽음 이후가 아니라 죽음 같은 삶으로부터 기인한 문장이다. - P200

수업을 하다 보면 별별 순간을 맞닥뜨리게 된다. 시를 나누는 일은 종이에 인쇄된 검은 글자를 읽는 일이상의 무엇이어서, 의도치 않게 그 사람의 마음을열어젖히고 그의 시간 속으로 불쑥 얼굴을 들이밀게 될 때가 있다. - P207

"여러분, 연상을 해봅시다. 연상이란 무엇일까요?" 물으면 "누나요~!" 소리치며 낄낄거리던 중2남학생들도 잊을 수 없고(쉬는 시간이 10분인데 그 짧은 시간 동안 운동장에 나가 축구를 하고 오다니!) - P210

기저선을 긋는 순간 땅이 생겨난다. 자연히 선 위는 하늘이 된다. 백지 위에선 하나를 그었을뿐인데 공간이 생기고 시간이 열리는 것이다. - P211

(추신) "감당할 수 없는 속도로 밤이 왔다"라는 문장은 이렇게 번역되었다. "The night approachedat menacing speed." 밤은 빠르게 오는 동안에도언제나 위협하듯, 험악하게, 절박하게 오는 것이리라. - P223

시드볼트가 열렸다는 것은 곧 그 종의 멸종을 의미한다. 즉, 시드볼트는 과거나 현재가 아닌 미래를 위해 예비된 장소다. 종말의순간에야 비로소 열리는 문. 완전히 파괴된, 복원 불가능할 정도로 훼손된 삶을 다시 일으키기 위한 유일무이의 수단. - P232

너의 장소는 분명히 있어. 그건 분필로 그린 원이 아니라 너의 페어리 서클이야. 하우스나 홈이나 다 매한가지 아니냐고 생각하는 자에게 문은 영원히 열리지 않을 거야. - P247

끝을 갈망하는 이에게 끗이라는 단어를 안겨주는건 외발자전거를 탄 곡예사에게 저글링을 시키고 불붙은 훌라후프를 통과해보라는 명령일지도 모르겠다. 분명히 두려울 것이다. 고독하고 힘겨울 것이다.
그렇다고 할지라도. - P260

끝은 죽은 자의 것. 그러니 나는 끝이 아닌 끗의자리에서, 끗과 함께, 한 끗 차이로도 완전히 뒤집히는 세계의 비밀을 예민하게 목격하는 자로 살아가고싶다. 여기 이곳, 단어들이 사방에 놓여 있는 나의 작은 놀이터에서. - P2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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