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기야 어제와 오늘은 확연히 달랐다. 아버지가 존재했던 날, 그리고 더이상 존재하지 않는 날, 나로서는 최초의, 새로운 하루가 시작되고 있었다. - P182

박선생이 새벽부터 데려온 조문객의 등을 내 쪽으로밀며 말했다. - P185

"좌익 시상이 되면 니가쟈를 봐주고, 우익 시상이 되면니가쟈를 봐줘라." - P182

내 부모가 은혜를 갚기란 진작에 튼 터,
갚기가 내 몫으로 오롯이 남을 판이었다. 빨치산의 딸이라는 천형에 가난까지 물려받은 것만으로도 지긋지긋한데 빨치산이 입은 세상의 온갖 은혜까지 물려받고 싶지않았다. 그래서 나는 부모의 대화에 자주 등장하여 분명몇번이고 들었을 소선생의 장남 이름을 기어코 기억에 남기지 않은 것이었다. - P187

아버지의 우파 친구가 사라진 길로 좌파 친구들이 몰려오고 있었다. 잠 없는 노인네들이란 걸 깜빡 잊고 있었다. 새 음식이 몇시에 오는지 분명 들었는데 기억나지 않았다. - P188

"상갓집에서 전복죽 묵어보기는 난생 첨이네."
소년 빨치산이 맛나게 전복죽 한대접을 뚝딱 해치우고는 말했다. - P190

술꾼은 시간을 뛰어넘은 자, 아니 어쩌면 어느 시간에못 박혀 끊임없이 그 시간으로 회귀하는 자일지 모른다.
작은아버지가 그랬다. - P193

여기 사람들은 자꾸만 또 온다고 한다. 한번만 와도 되는데, 한번으로는 끝내지지 않는 마음이겠지. 미움이든우정이든 은혜든, 질기고 질긴 마음들이, 얽히고설켜 끊어지지 않는 그 마음들이, 나는 무겁고 무섭고, 그리고 부러웠다. - P197

술이 불과한 상태로도 지팡이를 다리처럼 자유롭게 쓰는 그의 뒷모습을 오래도록 바라보았다. 미련 없이 잘가라는 듯 오늘도 날은 화창했고, 도로변에는 핏빛 연산홍이불타오르고 있었고, 허벅지 아래로 끊어진 그의 다리에서새살이 돋아 쑥쑥 자라더니 어느 순간 그는 사진 속 그의형보다 어린 소년이 되어 달음박질을 치기 시작했다. - P1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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