빨간 티코가 멀어졌다. 휘청이며 빠르게 나아갔다. 두 남자는 멀어지는 차를 보았다. 희한하게도 여성분의 머리가 보이지 않았다. 몸을 옆으로 완전히 꺾은 채 차를 모는 듯했다. 아주 멀어졌을 때, 일개 엽사가 아니라 사격 선수만이 실력 발휘를 할 수 있을 만큼멀어졌을 때에야 뒤통수가 가물가물 올라왔다. - P298
"그래서 주께서 당신을 주셨나봐." 빨간 남방이 수줍게 말했다. "오늘 주께서 나한테 너무하셨잖아. 그래서 좋은 몫을 주신 거지 - P300
"기본으로 하렴." 장례에서 기본은 최저가를 의미했다. - P304
"왜 그랬니?"고모가 물었다. "나도 해봤어요." 무경이 말했다. - P307
"할 순 있지만 정말 하기싫은일. 고모의 그 일을, 내가 했어요.‘ - P307
"실뜨기에서 실을 꼬집어 올리는 것처럼요, 이렇게." - P310
목경은 사람들이 모인 열탕을 지나 그대로 샤워부스로 갔다. 워기 옆 거울에 기증 단체명이 적혀 있었다. (중)둥지협동조합. 기울이 수증기에 젖어 흐렸다. 목경이 팔로 거울을 문질렀다. 짧은순간, 뒤가 비쳤다. 고모와 언니가 보였다. 아이와 아이 엄마도 그들은 그대로 탕 안에 있었다. 수증기가 밀려왔다. 고모와 언니는(증)둥지협동조합과 함께 다시 흐려졌다. - P312
그의 소설은 서사의 복잡계 complex systems다. 진실한 인물들은핵심을 곧장 말하지 않고, 여러 부가 텍스트paratext를 껴안은 서사는 거듭 반전되는 이중 삼중의 중층구조로 겹쳐져 있으며 서로 다른 작품 속 동명의 인물들과 상호 텍스트성을 발생시킴으로써 복수plural의 가능세계를 연결한다. - P317
여성이 샷건을 들고 산을 누비고, 소설을 쓰고, 지하철에서 화장을하거나 자리를 옮길 그 모든 권리를 제약하고 막아서려는 억압의심리가 각종 언어적·물리적 여성 혐오와 범죄로 발현된다. 소설이 이를 두고 평등의 ‘대가‘라고 한 것은 의도된 아이러니다. - P337
표제작 이중 작가 초롱은 이미상 특유의 언어 비틀기와 서사의 중층구조, 상호 텍스트성이 한꺼번에 폭발하며 빚어낸 빛나는수작이다. 평소에 문학을 사랑해온 독자라면 흥미진진하게 페이지를 넘기겠지만 동시에 꼭 그만큼 속도가 느려지는 모순에도 처할 텐데, 그 이유는 독자가 소설이 제기하는 크고 작은 문제들에대하여 나름의 해석을 내리는 순간 정치적·윤리적 견지가 명료해지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독자는 이 작품을 읽기 위해 자신의 정치적·윤리적 입장을 일시적일지라도) 천명해야만 한다. 이 소설을끝내 제대로 완독하고자 한다면 작품이 담고 있는 도발적인 물음표들을 피할 길은 그 어디에도 없다. 그러니 나는 독자들에게 요청한다. 적어도 이 작품만큼은 자신의 목소리를 회피하지 말고 읽어나가기를 - P339
그에 반발하고, 저항하고, 입을 열어 이질적인 목소리들이터져나올 수 있게 해야 한다. 문학은 현실을 뒤따라가며 올바르게‘ 반영하고 재현하는 기록물이 아니다. 과거와 현재를 재맥락화하고 지나간 시간 속에서 보지 못했던 빛과 어둠을 찾아내며, 다가올 미래의 가능태를 그려낸다. 이미 합의된 가치관을 지지하는 ‘안전‘한 재현만이 문학일 수는 없다. 시대를 이끌어온 모든 예술은 당대에 이미 불온했다. 소설이 지닌 힘이란 바로 이런 문학적상상력, 발칙하고 도발적이며 독자들을 불편하고 난처한 처지로몰아넣음으로써 그 누구보다 동시대 속에서 살아내게끔 추동하는힘이다. 혁명하는 힘이다. 소설집을 덮고 깨닫는다. 이미상의 소설이야말로 그간 내가 기다려온 소설이다. 나는 이런 소설을 정말로 기다려왔다. "문학은 자유다.‘ - P348
12) "문학의 임무 가운데 하나는 사람들을 지배하는 경건함에 질문을 던지고 반대진술을 만들어내는 것입니다. 예술은 무언가에 반대하는 경우가 아니더라도 대립적인 것으로 쏠리는 경향이 있습니다. 문학은 대화이고 반응입니다. 문학은 문화가 진화하고 상호작용하는 과정에서 무엇이 살아 있고 무엇이 죽어가는가에 대한인간의 반응의 역사라고 설명할 수 있습니다." 수전 손택, 『문학은 자유다. 홍한별 옮김, 이후, 2007,269쪽. - P348
나는 나뿐 아니라 다른 사람에게도 글이, 소설이 이렇게 만만해지면 어떨까 상상한다. 우리가 공유하는 문자라는 툴tool을 이용해 오늘 떠오른 생각을 사실적으로 기록하고, 상상을 덧붙여 비약하고, 무의식적으로 거짓말하고, 심심한 문장을 화려하게 살리고, - P350
한껏 꾸민 문장을 싱겁게 씻어내며 생각이 글을 짓고 글이 생각을바꾸는 무한 루프 안에서 골똘해지는 경험, 뺨을 달아오르게 하는기쁨이 이 책에 담겨 전달되면 좋겠다. - P351
예전부터 내 소설을 시간 내어 읽어준 독자분들께 전하고 싶어아껴둔 말이 있다. 단편소설의 핵심을 설명하는 조지 손더스의 ‘압축은 예의이자 친밀감의 한 형태이다"라는 말이다. 이 책에 담긴여덟 편의 소설을 쓰며 단편소설이란 미술시간의 접이식 물통 같다고 생각했다. 쓰는 사람은 마음에 품은 긴 이야기를 짜부라뜨려압축한 소설로 건네고, 읽는 사람은 그 소설을 펼쳐 가려져 있던주름의 이야기를 읽는다. 아니, 주름에 자신의 이야기를 써넣는다. 함께 아코디언을 접고 펼치며 노래하는 친근한 공간을 상상해주신 독자분들께 감사하다. 2022년 크리스마스를 기다리며이미상 - P352
수진은 안다. 여자가 어떻게 지하철 해야 하는지 잘 알고 있다. 그런데도 막상 지하철만 타면 딴전만 부리다 결국 후회하고 만다. 무엇이 수진을 아는 대로 행하지 못하게 막는가. 인식과 실천을 잇는 다리는 대체 어디에서 끊겼는가. 싹싹 비는 수진을 보며, 얼굴은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다. - P123
안파 쪽 사람이 고개를 가볍게 끄덕이더니 말했다. "좋아! 내가 정확한 정의를 내려주지. 위험한 사람이란!" 안파 쪽 사람이 평파 쪽 사람에게 얼굴을 바짝 갖다댔다. "네가 옆에 안 앉으려고 하는 사람. 어때, 심플하지?" "심플? 대단히 복잡한데?" - P130
"나는 테러 다음날 공원에 나온 사람들을 생각해. 그들의 저항을 생각해. 그들이 한 건 그저 몸을 펴는 것이었어. 테러는 우리를콩벌레로 만들어 몸을 똘똘 말고 웅크리게 해. 살던 대로 못 살고작게 살게 해. 둘 중 하나 고르라며 종주먹을 들이대 열린 세상에서 닫혀 살거나, 닫힌 세상에서 열려 살거나. 나는 감히 말해보는거야. 열린 세상에서 열려 살자고 아무리 무서워도 용감하게 용감한 수진처럼" - P1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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