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장 불을 켜둔 채 무대 구석에 목도리를 베개 삼아누웠다. 주머니에 뭔가가 거치적거려서 꺼내 보니 머리핀이었다. 나는 머리핀을 다시 꽂은 다음 생각했다. 머리핀의 주인은 누구였을까. 내 또래였을까. 그 여자는머리 길이가 어디쯤 올까. 생각하다보니 무서워졌고, 나는 악귀 같은 여자라도 들어와 내 배위에 앉아 주길바랐다. 진이나 한 잔 마시면서. - P204
‘복수를 꿈꾼 뒤로는 모든 것이 달라졌다. 백수는 킬러가, 스터디플래너는 계획 일지가, 서울 끝자락에 위치한 오피스텔은 비밀 기지가 되었다. - P209
여자가 쳐다볼 때마다 천장은 분명조금씩 뚫리고 있었고, 이렇게 빨대 두 개가 우리집 바닥을 뚫고 올라오기까지는 꼬박 석 달이 걸렸다고 했다. - P210
구박과 외로움은 내게당연했다. 끔찍한 인간들 사이에서 나는 유일한 고양이니까. 그 사실을 받아들이자 어느 때보다도 마음이 편안했다. - P213
거리에도 나무에도 공간이 더 생겨나는 계절. 찬바람을 맞으니 마음이 단순해져서 나는 크게 숨을 내쉬었다. 내 입김과 유의 담배 연기가 그럭저럭 비슷한 모양으로 흩어졌다. 음 - P217
온통 새하얗게 뒤덮인 집안, 2인용 소파에 유와 꽉 들어맞게 앉아 있자, 나는 어쩐지 우리가 알래스카 설산의 조난자들처럼 느껴졌다. 나는 유의 어깨에 머리를 기댔다. - P232
마지막으로 사람들에게 남기고 싶은 말이 있다면 급할수록 돌아가라는 것이다. 급하게 음식을 먹으면 체하고, 급하게 챙긴 짐에는 무언가 빠져 있기 마련이고, 급하게 죽어 버리면 제대로 죽지도 못하니까. 농담처럼 들리겠지만 사실이다. 어제 새벽 나는 급하게 죽어 버리는바람에 이승을 떠돌게 되었다. - P2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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