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장은 한 자 차이가 사람의 운명에 얼마나 큰 영향을 미치는지매일 실감하고 있었다. - P155

그날 밤, 수진은 집에 돌아가 단어 공책에 초대졸과 동대학을적었다. 그녀는 새로 알게 된 단어는 반드시 공책에 적었다. 그런용도의 공책이 따로 있었고 그녀는 그것을 단순히 단어 공책이라고 불렀다. 종이를 안쪽으로 말고 손날로 눌러 접힌 선을 내고 왼쪽칸에는 단어를, 오른쪽 칸에는 의미를 적었다. - P157

"최근에 심하게 스트레스 받은 일이라도 있어요?"
의사가 물었다.
그러나 또랑....
수진은 말했지만, 말하는 동시에 한가지 일이 떠올랐다.
"찍을래요?"
**의사가 파낸 귀지를 휴지에 올려 내밀었다. - P158

그런 날이었다. 갑자기를 아낄 생각이 없던 오후. 그녀는우연에 마음을 활짝 열어둔 채였다. - P159

선물로 들어왔을 때만 해도 흙이 영양제를 무섭게 빨아들여 진녹색의 화초는 빽빽하고 풍성했다. 그러나 이제는 잎이 누렇게 떴다. 수진은 분무기로 물을 칙칙 뿌리며, 원장의 묘한 버릇에 대해 생각했다. 그는 종종 수진과 수미의 얼굴에 분무기를 뿌렸다. 칙칙. 딱 두 번 뿌리고 갈길 갔다. 둘은 영문도 모른 채 물을맞았다. - P162

싱크대에서 라면을 찾다가 우연히 발견했다고 했다. 종이 뭉치는 수진이 육 년간 써온 소설이었다. 열두 편의 단편소설. 수진은일 년에 두 편의 단편소설을 썼고, 두 번 문예지에 투고했고, 두 번답장을 받았다. 문예지에 실린 적은 한 번도 없었다. - P167

"작가들은 디스크가 직업병이에요. 쓰는 게 직업이라, 의자에 앉아 있는 시간이 너무 길어. 여러분도 작가 하려면 의자 좋은 거 사.
사실 내가 해줄 말은 그거밖에 없어. 작가 그거 나쁜 직업이야, 드런 직업이야." - P169

"저도 뭐 해요."
수진이 회전하는 젓가락 끝을 보며 심상히 말했다.
"뭐 하는데?"
수미가 청경채를 우적우적 씹으며 물었다.
"소설 써요."
"소설?"
"네, 밤에요." - P172

spha pri fole커피숍을 나오는데 수진의 귀에 문장 하나가 흘러들었다. 새 말이 체화돼 암묵지가 될 때까지 쓰고 또 쓸 것. 사 년 전 여름, 소설에 대한 답장에 적혀 있던 문장이었다. 그때 그는 수진에게 어휘력이 부족하니 국어사전을 세 번 베껴 쓰라고 했다. 수진은 대신단어 공책을 썼고 새로 알게 된 단어는 자꾸 써 몸에 박으려 노력했다. 그녀는 건물을 나와 길을 걸으며 최근에 알게 된 말을 입안에서 천천히 굴려봤다. 가일, 일, 가왓일………… - P177

그러므로 그녀의 소설을 잃었다고 한들 그것은 세계의 손실도, 누구 하나의 손실도 아니었다.
그저 그녀의 사정일 뿐이었다. 그녀만의 사정. 수진은 한때 그걸가졌었다. 자신만의 사정을 조용한 기쁨이 있었다. - P1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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