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날은 확실히 어떤 분기점이었다. 집주인이 처음으로 사과해서만은 아니었다(그동안 좋게 좋게 말할 때와는 사뭇 다른 재빠른 사과에 허탈하면서 괘씸했다). 이날 이후나는 조금은, 적어도 예전보다는, 잘 싸우게 됐다. 고함치는 게 뭐라고 그동안 이거 하나를 제대로 못 했는지. 누군가의 커다란 목소리를 뚫고 나도 더 크게 소리 지를수 있고, 그래도 된다는 것은 그라운드에서 비로소 새겨진 감각이었다. - P47
여전히 나는 그라운드 안팎에서 웬만해서는 싸움을 피하고 몸을 사리는 소심한 사람이다. 상대방이 얼마나 ‘막 나가는‘ 사람인지 모르는 상태에서 괜히 잘못 건드려 위험하거나 귀찮은 상황에 휘말리고 싶지 않아서다. 하지만 이제는 안다. 맞대응할지 피할지 판단하는것도 싸움의 경험이 쌓여야 가능하다는 것을. 무조건 피하는 수밖에 없다고 무력하게 포기하는 게 아니라 ‘맞대응’이라는 선택지를 쥐고 있을 때 비로소 보이는 것들을. 그러니까 나는 그날 북토크에서 이런 이야기들을 하고 싶었던 것이다. 어떤 과정을 거쳐 예전보다 잘 싸우게 됐는지. 잘 싸울 수 있다는 감각이 무엇을 바꿨는지(그리고 그 집주인이 얼마나 나쁜 놈이었는지!). - P51
가식의 단계에 얼마나 오래 머무르게 될지 모르겠지만, 그 단계를 넘어 진짜 대범한 사람이 될 수 있을지모르겠지만, 뜻하지 않은 ‘위선 권장 영화들에서도 문제는 늘 위선을 벗었을 때 생기지 않는가. 영원한 위선은 결국 선으로 남을 테니까, 이 위선과 가식이 헐거워져서 쉽게 벗겨지지 않도록, 위선과 가식으로 아주 똘똘뭉쳐 살고 싶다. - P65
충고를 그대로 따르지 않더라도 고민의 선택지를늘려주는 타인의 앞선 경험들은 적어도 내게는 크고 작은 도움이 된다. 하다못해 청소기 하나를 사는 데에도다양한 후기들을 찾아 읽는다. 인생의 크고 작은 결정앞에서라면 더더욱 다양한 후기를 듣고 싶은 마음이다. - P73
그래도 요즘은 남자들이 많이 ‘돕는다‘고들 하는데, 대개는 전 부쳐내는 정도이고, 설령 아주 드물게 전체준비의 50퍼센트 이상 기여한다고 해봐야, 아니, 본인집안일이고 본인 조상 제사니까 애초에 남자끼리 100퍼센트 다 해야 마땅한 걸 갖고 ‘돕는다‘ ‘같이 한다‘ 자랑스레 말하는 건 너무 염치없는 게 아닌가 싶다. - P79
그밖에도 더는 쓰지 않는 말이 많다. ‘한국을 빛낸100명의 위인들‘ 부르듯 읊을 수 있을 것 같다. ‘결정 장애’처럼, 무언가를 잘 못 정하는 상황, 어떤 능력이 결여된 상태에 ‘장애‘라는 단어를 빗댐으로써 장애를 비하하는 말을 쓰지 않는다. 질병을 희화화하는 표현인 ‘발암추구’ ‘암 걸리겠다‘ 같은 말도 쓰지 않는다. - P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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