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옥을 다시 만난 것은 신촌역 4번 출구 앞에서였다. 단번에 금옥임을 알아차리지는 못했다. 그저 저 여자 어디서 본 것 같은데……… 하고 말았을 뿐. - P109
금옥 하면 떠오르는 것은 트럭. 어렸을 적 내 기억속에서 트럭은 점점 더 거대해졌고, 나중에는 집채만해지기까지 했는데, 성인이 되고 나서야 나는 그것이내가 죄책감을 덜기 위해 만들어 낸 상상이라는 것을인정했다. - P112
인터넷에서 막대 아이스크림이 만들어지는 과정을담은 영상을 본 적이 있다. 기계 속에서 액체는 막대가꽂히고, 얼고, 돌아가고, 포장되었다. 금옥이 혼자가 되는 과정은 그처럼 매끄럽게 진행되었다. 열여섯살 금옥은 수군거림과 욕설, 배척의 순서를 착실하게 밟아나갔다. 예쁜 포장지가 싸이는 것으로 끝나는 영상에서처럼. 졸업 이후 금옥과의 기억은 내게 오랫동안 밀봉되어 있었다. - P113
내 정신 좀 봐. 나는 네가 혼자일 거라고 생각했어. 나는 결혼한 지 4년 되었다고 했다. 드레스 입은 모습이 근사했겠다. 연락처를 알 수 없어 결혼식에 부르지 못했다고, 나는 둘러댔다. 금옥은 고개를 끄덕였다. 서울 오면서 핸드폰을 처음 만들었어. 그 전까지는 쓸 일이 없었거든. - P121
그래도 금옥이가 그럴 사람은 아니지. 할머니가 말했다. 나는 맞다고, 금옥이라면 절대 안 그럴 거라고 대답했다. 그런데 왜 말없이 집까지 찾아왔어. 금옥이한테뭐 잘못한 거라도 있어? 할머니가 물었다. 그 질문을 듣자 내가 잘못했다는 생각이 들어 그렇다고 대답했다 - P132
냄비를 열어 보자 계란찜이 있었다. 숟가락으로 뜨자하얀 김이 올라왔다. 나는 한 입 먹어보았다. 계란찜은부드럽고 따뜻했다. 말없이 계란찜을 떠먹다가 나는 수저로 박수를 쳤다. 그러자 금옥이 웃었다. - P138
조, 못 본 사이에 새로운 버릇이 생겼네. 어떤 버릇? 조가 물었다. 자꾸 두리번거리는 거. 내가 말했다. 조는아, 그거, 하고는 말을 아꼈다. 나는 더 묻지 않았다. 물어봤자 조는 아무렇게나 말을 지어낼 것이다. 조는 내가아는 사람 중에서 가장 거짓말을 잘했다. - P141
도마뱀에 주인이 있어요? 남자는 놀라운 듯 목소리를 높였다. 나는 재빨리 조를 잡은 손에 힘을 줬다. 그럼요. 이 친구한테는 가족이나 다름없어요. 과장이 아니었다. 조는 누군가에게 가족을 소개할 때 아버지, 자신그리고 김재현이라고 했다. 김재현이요? 누가 물어보면조는 있어요, 하고 대답했고조의 성격을 아는 이들은대부분 그러려니 하고 넘어갔다. - P147
밥 먹을 거지? 나는 그러겠다고 대답했다. 김치찌개는정우가 방금 끓인 거라고 했다. 엠티가서 끓이면 레시피 알려 달라고 다들 난리예요. - P160
우리는 전화로 떡볶이를 주문한 다음 상을 폈다. 김재현이 여길 떠난 것 같아. 맞은편에 앉아 있던 조가 말했다. 먹이가 줄어든 적이 없어. 그러자 정우가 말했다. 이건 긴가민가해서 말 안 했던 건데요, 가끔 불 끄면 기척이 느껴질 때가 있어요. - P167
. 굳게 다짐하면서 버스를 다섯 대도 넘게 지나쳐보냈다. 그렇게 잠들려는 순간 누군가 귓가에 대고 집에가서 자야지, 다정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나는 깜짝 놀라 눈을 크게 떴다. 두리번거렸지만 주위에는 아무도 없었다. - P175
MP3 M너는 지금 죽은 거야. 끽 하고 죽은 거지. 집에서, 거실 한가운데서, 냉장고 모터 돌아가는 소리, 옆집 문이열렸다 닫히는 소리가 들려. 그래도 넌 꼼짝 않는 거야, 죽었으니까. 그때 여자가 들어와. - P179
나가기 전, 카운터에 놓인 박하사탕을 집게로 꺼내려는데 통에 있던 사탕들이 전부 딸려 나왔다. 어떻게든떼어 내려고 애쓰는 나를 감독 어머니는 가만히 지켜보았다. 곧 겨울인데 사탕들은 언제부터 녹아 있었던 걸까. 나는 결국 빈손으로 가게를 나왔다. - P182
나는 정수를 끌고 텐트 안으로 들어갔다. 텐트가 비좁아서 우리는 남자의 머리를 가운데에 두고 마주 앉았다. 정수와 나는 고개 숙여 남자의 얼굴을 들여다보았고 동시에 말이 없어졌다. 남자는 완벽하게 편안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어떠한 슬픔도 들어차지 않은, 갓 태어난 아이 같은 얼굴을 나는 조심스레 남자 코밑에 손가락을 갖다 대 보았다. 30초 정도 지났을까, 따뜻한 숨이천천히 손에 닿았다. 이 남자 진짜로 동면 중인가 봐. 숨을 엄청 느리게 쉬어. 내 말에 정수도 손을 갖다 대 보더니 놀란 표정을 지었다. - P19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