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월이 흘러 다시 읽었을 때에야 만복사저포기」의 마지막 대목 앞에서 골똘해졌다. "양생은 이후 다시 장가들지 않았다. 지리산에 들어가 약초를 캐며 살았는데 그가 어떻게 생을 마감했는지아무도 알지 못한다." 그럴 필요까지 있었을까. - P119
첫번째 대답. 이것이 소설이기 때문이다. 잘 알려진 대로 금오신화는 우리 최초의 소설이다. 많은 문학이론가에 따르면 소설은 본질적으로 패배의 기록이다. 세계의 완강한 질서에 감히 도전하는 개인이 있는데, 그는 자신이 추구하는 가치를 끝내 포기하지않아서, 그 비타협의 결과로 그는 패배하고 말지만, 그 순도 높은패배가 오히려 주인공의 궁극적 승리가 되는 아이러니의 기록, 그것이 바로 소설이라는 것. 그러므로 ‘위대한 개츠비‘라는 말이 성립될 수 있다면, ‘위대한 양생/생‘이라는 말도 가능하다. 비록운명에는 패배했으나 사랑에 관한 한 타협하지 않았으니까. - P128
한 그 약속을, 양생이나 이생처럼, 지켜냈다. 평생을 두고 지켜야할 약속이 있었으니 그의 생은 내내 고달팠겠으나 단 한순간도 무의미하지는 않았으리라. - P123
그는 나의 동쪽이고 서쪽이며 남쪽이고 북쪽이었다. 나의 평일의 생활이자 일요일의 휴식이었고, 나의 정오, 나의 자정, 나의 대화, 나의 노래였다. 우리 사랑이 영원할 줄 알았으나, 내가 틀렸다. - P126
농민 백남기씨는 2015년 11월 14일 경찰의 물대포를 맞아 쓰러졌다. 영상이 있기 때문에 보면 누구나 알 수 있다. 쓰러진 한 사람을 향해 물대포가 집중 살수되고 있었다. 나도 모르게 확인사살‘이라는 말을 떠올리고는 그 말이 끔찍해 떨쳐냈는데, 그렇다면 저것을 ‘확인살수‘라고 해야 하나 했다가, 살수 라는 말이 ‘살수‘로 읽히기도 하는 것이었다. 그런데도 이 죽음이 외인사가 아니라 병사라거나 또 이유를 알 수 없으니 부검을 하자거나 하는 말들이 들려온다. 하기는 바다로 가라앉는 학생들이 방치되는장면을 함께 지켜봐놓고도 그것을 ‘교통사고‘라고 말하는 사람도있었다. 산사람들의 이해관계 때문에 이미 죽은 사람도 다른 원인으로 한번 더 죽어야 하는 고초를 겪는 곳이 우리가 사는 여기다. - P128
이런 관점으로 ‘사랑‘과 ‘죽음‘이라는 사건을 바라볼 수 있다.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것은 그 사람만이 아니라 그와의 관계를 사랑한다는 것이다. 그로 인해 탄생하는 나의 분인을 사랑한다는 것이다. ‘나는 당신과 함께 있을 때의 내가 가장 마음에 든다. 그런나로 살 수 있게 해 주는 당신을 나는 사랑한다.‘ 그렇다면 우리가사랑하는 사람을 잃는 일이 왜 그토록 고통스러운지도 이해할 수있다. 그를 잃는다는 것은 그를 통해 생성된 나의 분인까지 잃는일이기 때문이다. ‘그의 죽음으로 인해 그 사람과만 가능했던 관계도 끝난다. 다시는 그를 볼 수 없다는 것은 다시는 그때의 나로살아갈 수 없다는 뜻이다.‘ - P131
이런 말을 덧붙이자. 언젠가 기타노 다케시는 말했다. "5천 명이 죽었다는 것을 ‘5천 명이 죽은 하나의 사건‘이라고 한데 묶어말하는 것은 모독이다. 그게 아니라 ‘한 사람이 죽은 사건이 5천건 일어났다‘가 맞다." 이 말과 비슷한 충격을 안긴 것이 히라노게이치로의 다음 말이었다. "한 사람을 죽이는 행위는 그 사람의주변, 나아가 그 주변으로 무한히 뻗어가는 분인끼리의 연결을 파괴하는 짓이다. "왜 사람을 죽이면 안 되는가. 누구도 단 한 사람만 죽일 수는 없기 때문이다. 살인은 언제나 연쇄살인이기 때문이다. 저 말들 덕분에 나는 비로소 ‘죽음을 세는 법‘을 알게 됐다. 죽음을 셀 줄이는 것, 그것이야말로 애도의 출발이라는 것도. - P132
추억이란 애써 올라가미처 내려오지 못하고 꼿꼿해진 생각이 아닐까. - P135
어느 날 운명이 찾아와나에게 말을 붙이고내가 네 운명이란다, 그동안내가 마음에 들었니, 라고 묻는다면나는 조용히 그를 끌어안고오래 있을 거야. 눈물을 흘리게 될지, 마음이한없이 고요해져 이제는아무것도 더 필요하지 않다고 느끼게 될지는잘 모르겠어. - P150
사포는 오늘날 레즈비어니즘의 상징 중 하나다. 그가 당시 여성들의 ‘동아리Thiasoi‘에서 멘토이자 연인으로서 소녀들을 사랑했다는 것과 그래서 그곳 ‘레스보스섬이 오늘날 ‘레즈비언‘의 어원이 됐다는 사실도 잘 알려져 있다. 앞에서 인용한 것은 아낙토리아라는 소녀를 그리워하며 쓰인 5 연 분량 시의 첫 연이다. 전쟁 영웅을 숭상하고 무기의 아름다움을 찬미하는 사람들 가운데에서 사포는 그 모든 것보다 한 소녀를 택한다. 아름다운 것을 내가 욕망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욕망하는 것이 아름답다는 이 시의 전언은 집단이 아니라 개인이 가치의 입법자여야 한다는 시인의 선언이기도하다. - P167
- 아아 젊음은 오래 거기 남아 있거라. - P171
오늘도 나는 누구를 기다려 정거장 가까운언덕에서 서성거릴 게다. - 아아 젊음은 오래 거기 남아있거라. - P1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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