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 알았다." "뭘 알았어?" "인생에 대한 네 성의가 그 정도인 거 알겠다고." - P201
따뜻한 차 한잔처럼 노상 몸과 마음을 뭉근하게 만드는일이었다. 여름이 끝날 때까지 소봄은 동생과 싸우지 않았고 혼자만의 술자리도 주종을 바꿔 맥주 정도로 가볍게끝냈다. 뭔가 삶 자체가 가벼워지는 느낌이었다. 적당히예열된 차를 부드럽게 액셀을 밟아 몰듯 자기 삶을 운전해 나갈 수 있으리라는 자신이 생겼다. - P207
"촛불, 나, 그거 별로야. 불이 탁 꺼질 때 기분이 이상해, 안 좋아." - P212
아니에요 피디님이 어떻게 알아요? 뭘 알아요? 또 시작이네, 알아. 아니, 몰라요. 어허, 어디야? - P221
세미는 처음으로 ‘종족‘이라는 것에 대해생각했다. 정작 본인은 날마다 인류애를 잃어 이제 어떤기적이 일어나도 되살릴 수 없을 듯한 소속감이라는 감정의 실체를. 둥근 머리와 복슬복슬한 털과 납작한 코를가진 그 부류들 속에 때로 설기는 아직 살아 있는 듯 느껴졌다. - P227
"누난 정말 아무래도 정신 개발 좀 해야겠어." 양요가 테이블에 놓인 냅킨을 팍팍 뽑아서 세미 손에쥐여주었다. 세미는 두 손바닥이 다 젖도록 눈물을 흘리고 있다가 "정신 개조겠지"라고 겨우 대답했다. "와중에 꼬투리 잡니? 응? 아주 여유가 있네. 이거 우는것도 페이크 아냐?" - P230
"로맨스 장르를 몰아 봤으면 드라마 피디가 되든지 하지 왜 예능 피디가 됐어? 자꾸 보다보니 세상이 다 우스워졌나보지?" - P233
삼촌과 함께 살던 할머니는 식구들이 반려견만 예뻐한다며 집 앞에 온 개장수에게 개를 팔아버리려 한 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죽음을 통과한다는 건 전혀 다른 존재가 되는 것이니까 할머니도 달라졌을지 모른다. 그래도 할머니를 너무 믿지는 말라고 세미는 설기에게 진지하게 경고했다. 그냥 인간 같은 건 다 피해 다녀, 내가 하늘로 갈 때까지. - P234
"나는 수술이 잘못돼 갑자기 호두를 잃었어. 간단한 수술이라고 해서 정말 그런 줄 알았지. 얼마나 자책을 많이했는지 그냥 나라는 인간 자체가 싫은 느낌 있잖아. 배가고프거나 똥이 싸고 싶거나 하면 어느 순간보다도 나라는인간이 생생하게 느껴지는데, 나에게 그런 것조차 해주고싶지 않은 느낌. 내가 나로 살 수 있는 기회를 다 빼앗아버리고 싶은 생각에 시달렸어. 직장도 두번이나 옮겼지. 근데, 세미씨는 너무 오래 자기 자신을 벌주지는 마. 애들이 알면 슬퍼해." - P237
"세상에 안 변하고 가만있는 것도 있어." "그런 게 있어?" 세미 쪽으로 돌아누웠는지 엄마 목소리가 더 가까워졌다. "있어. 뭔지는 말 안 해." - P242
‘아직 내가 이름을 못 지었어. 길러도 될까 싶기도 해서." "왜요? 완전 귀여운데." 털이 복슬복슬한 강아지는 입 주위만 까맸다. - P247
설기는 겨울에 온 개였다. 눈이 너무 많이 내려 아파트복도까지 생크림 더미 같은 눈이 쌓였을 때였다. 세미는개를 반기지 않았다. 크게 낙담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 P257
한번 준 마음을 포기하지 않는 개들이 그렇게 해서 인간을 믿을 줄 아는 개들이 설기처럼 기품 있게 걷고 있었다. 처음에는 아파트 상가에 들를 생각이었지만 세미는 더 멀리 걸었다. 그러다보니 여름에 양요와 함께 앉아 있었던 맥주 가게가 떠올랐고 겨울에는뭘 파는지 확인해서 말해줘야지 싶은 생각이 들었다. - P261
"처음부터 날 속인 거잖아." "아니야!" - P273
"우야, 니는 들어봤제? 한번 설명을 좍 해야 방송 나가고 우리 카페도 입소문을 타고 안 하겠나. 다음 주에 오이소, 한해 마지막에 가슴 뻐근해지고, 없던 인류애도 생겨나고 희망도 생기고." - P287
나는 아버지가 아픈가, 하고 생각했다. 아니면 그당시 수원에서 간호사로 일한다는 누나가 환자가 집안에 있는 건 슬픈 일이고 자기 자신의 삶에 근저당이 잡히는 셈이었다. 죽음이라는 채무자가 언제 들이닥쳐 일상을뒤흔들지 몰랐다. 그게 자신의 죽음이라면 의식이 꺼졌을때 자연스레 종료되지만, 타인이라면 영원히 끝나지 않는채무 상태에 놓이게 된다. 기억이 있으니까. 타인에 대한기억이 영원히 갚을 수 없는 채무로, 우리를 조여온다. 수년 전 엄마를 떠나보내며 느낀 것이었다. - P2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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