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화경 속의 세계는 극장 스크린이나 TV처럼 함께 볼 수도 있는 게 아니라 오롯이 혼자 누리는세계다. 내가 보던 만화경을 다른 이에게 권할 때 할 수 있는 말은 "봐 봐" 정도인데, 그래서 다른 이가 본 것이 내가 본 것과일치하는지는 장담할 수 없다. 동시에 본 것이 아니므로 시차가 발생한다. 혹시라도 그 사이에 만화경 속 세계가 변한다면? - P176

짐을 찾고 공항을 벗어나 집으로 돌아가는 길, 그 길의 가로등은 유독 커서 달과 헷갈리는데, 어쩌면 가로등이 큰 게 아니라그 길목의 달이 유독 작은 것인지도 모르겠다. 둥글고 밝은 것들에 둘러싸여 달리는 길, 그중에 어떤 것이 진짜 달인지 헤매는과정은 여정의 끝에 붙은 보너스 게임이다.
밤의 공항에 내려앉는 것도 좋지만 밤의 공항을 발판으로 삼아 낯선 곳으로 점프를 시도하는 것도 좋다. 사람들마다 선호하는 비행 스케줄이 있을 텐데 내게는 자정쯤 출발하는 비행기가 최고다. 물론 적어도 몇 시간 날아간다는 전제 하에 고른 것이다. 공항에 밤 아홉 시 정도에만 도착해도 충분하니 낮의 일정을 마무리하고 떠나기에도 부담이 없고, 자는 시간에 이동하니결과적으로는 여행을 하루 앞당겨 시작하는 셈이다. 시간과 관련된 것이야말로 득템 중 득템 아닌가. 게다가 밤의 공항은 썰물 때의 바닷가처럼 한적하고 헐렁하다. - P178

여행은 오작동한 기억을 오래 남긴다. - P183

이게 전부가 아닐 것 같은 기분에 더 응용을 해 봤다. ‘늦어서’로 검색하면 다양한 활용 예시가 나온다. ‘늦어서 죄송합니다’도있지만 ‘늦어서 죄송한 마음 가득입니다‘도 있고 ‘늦어서 죄송해요‘ 도 있다. 다시 ‘늦었습니다‘를 메일함의 검색창에 입력해봤더니, 이런! 96건의 ‘늦었습니다‘가 소환됐다. - P190

나는 작가를 부추기는 ‘감‘이 두 개고, 그중의 하나가 마감이라고 말하곤 했다. 다른 하나는 영감인데, 어떨 때는 마감이 엄청난 스피드로 영감을 동반하기도 한다고 말이다. 그러나 메일함을 계속 뒤지는 동안 이 또한 무색해졌다. 늦어서 미안하다던내 메일들이 모두 영감 동반자는 아니었으니까. 어떤 지각들은 통장 사본이나 신분증 사본 등 단순 서류 배달에 대한 것이고,
딱히 창조적이지 않은 그 지각들은 이렇게 말했다. 영감은 모르겠고 우릴 늦게 보낸 건 단지 습관이라고 - P1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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