빈틈의 온기 - 출근길이 유일한 산책로인 당신에게 작가의 숨
윤고은 지음 / 흐름출판 / 202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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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지각이구나, 자포자기한 그 순간 저만치서 열차가 들어오는 소리가 났다. 뭐? 플랫폼에 아무도 없는데 지금 열차가 들어온다고? 지금은 24분인데? 어쩌면 22분 열차가 지각한 걸지도 모른다고 생각하자 기분이 오묘해졌다. 지각은 지각이 위로하는구나 싶기도 했고, 어떤 연대감 같은 걸 느꼈다고나 할까. 열차는 고요한 플랫폼 안으로 미끄러지듯 들어왔다. - P70

퇴근길에는 졸다가 한 정거장을 더 가고, 출근길에는 생각에 잠겨 있다가 한 정거장 미리 내린다. 어느 경우든 정신이 번쩍들었음에도 불구하고 막상 여기가 어디인지를 알아내기 어려울 때가 있다. 열차 안의 모든 위치에서 안내 모니터가 보이는 건아니니까. 꼭 내가 서 있는 곳이 정보의 사각지대고 말이다. 이렇게 다급할 때는 누군가 일부러 현재 위치를 꽁꽁 감추는 것처럼 느껴질 지경이다. 초조해지면 얼핏 플랫폼 벽면의 ‘양‘ 이라는 한 글자를 보고 덜컥 내리는데, 그곳이 ‘양재‘ 역일 수도 있지만 ‘양재시민의숲역일 수도 있다. 잘못 내렸다면 열차에 얼른 다시 올라타야 한다. 누가 나만 보고 있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최대한 다른 칸으로, - P81

옆 테이블의 대화가 적나라하게 다 들릴 만큼 테이블 간격이 좁은 가게들을 지금은 찾아가기가 어렵다. 코로나 이후 테이블간격에 대한 지침이 있기도 하지만, 나도 ‘프라이빗‘ 이라거나 거리 두기‘라거나 ‘독립‘ 혹은 ‘개별‘ 같은 단어들을 꼭 넣어서식당을 검색하게 되니 말이다. 한 사람이 지나가려면 모르는 사람들이 우르르 일어나야 할 만큼 비좁은, 그래도 늘 사람이 몰리던 가게들을 은근히 흠모했던 시절이 꿈처럼 느껴진다.
서울이 어떤 도시냐고 물으면 나는 지하철을 타고 산 입구까지 갈 수 있는 곳이라고 대답할 것이다. 지하철은 내게 가장 익숙한 도구다. 지하철로 거리와 시간을 가늠하고 어떤 도시의 실루엣을 파악한다. 교통수단 중에 지하철을 제일 좋아한다고 말할 수도 있는데, 출퇴근길의 지옥철은 예외다. 코로나 이전에도 그랬지만 코로나 이후에는 더 부담스럽다. 그러나 내겐 선택의 여지가 없고, 출퇴근길은 진정한 모험 서사가 되고 말았다. - P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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