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쉽게 믿는 자들의 민주주의
제랄드 브로네르 지음, 김수진 옮김 / 책세상 / 2020년 12월
평점 :
절판
뇌과학의 관점으로 가짜 뉴스를 다루는 책을 꽤 흥미롭게 봤다. 이번에는 민주주의의 관점이다. "가짜 뉴스로 도배된 현대 사회의 인식 메커니즘"을 밝혔다는 이 책의 소개글을 보면서, 프랑스 사회학과 교수인 저자가 쓴 내용이 궁금했다.
저자는 책머리에서 "거짓과 의혹으로 공적 공간을 점령하는 과정들이 정보기술의 발달과 우리 사고방식의 작용, 민주주의의 본질 그 자체 등에 의해 조장"된다고 말한다. 서문에서는 민주주의 역사와 함께한 의심의 영역이 최근 사회 전반에 걸쳐 나타나는 이유를 정보 시장의 자유화와 '상품' 공급의 획기적 변화로 본다. 본문은 이를 구체적으로 풀어가는 내용인데, 다음 문장은 저자가 말하고자 하는 바를 압축적으로 설명한 듯하다. (저자는 본문에서 소위 음모론에 대해 '말도 안 되는 얘기'로 일축하지 않고, 거기에도 신빙성 있어 보이는 근거가 있다고 전제한 뒤, 그렇다고 해도 옳지 않다는 결론을 도출하는 식으로 논리를 전개한다.)
"믿을 만한 이유가 있다는 말은 믿는 것이 옳다는 의미는 아니다."(33쪽)
가설, 신념, 뉴스 등 정보 상품이 확산되는 가상 공간인 '인지 시장'은 오늘날 정치적, 기술적으로 자유화됐고, 정보 보급은 대중화됐으며, 보급자들 간의 경쟁은 치열해졌다. 과잉 공급이 되면 진실보다 '정신적 편안함' 쪽으로 마음이 끌리고, 반증 과정은 시간이 걸리므로 의심스럽지만 쉽게 설득되는 신념을 수용하고 만다. 선별되지 않은 정보가 많아질수록 '확증 편향'이 심해지고 맹신이 만연한다. 저자가 지적한 '필터 버블'은 인터넷 검색의 허상과 위험성을 말해준다. 또한 구글의 검색 사이트 관련 실험 결과는, 편파적이지 않을 것 같은 정보 자체가 얼마나 조직적으로 편집되어 보여질 수 있는지를 반증한다.
밀푀유 같은 방대한 논거를 내세운 소위 '포티언 상품'은 음모론 신화의 신뢰성을 구축하고 엄청난 정보의 양으로 위압감을 준다. 저자는 인터넷 상의 음모론이 사람들에게 파고드는 방식, 그로 인해 동조하든 안 하든 '전부 다 거짓은 아니지 않나' 하는 생각을 하기에 이르는 과정을 설명한다. 이 과정에서 저자는 인지 오류의 용어들과 다양한 사례를 제시하면서, 정보의 빠른 전파 속도와 광범위한 파급, 과도한 경쟁이 결국 '쉽게 믿는 자들의 민주주의'를 초래했다고 본다.
팩트 체크가 되지 않은 채 방출되는 기사들의 문제는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기에, 저자가 예로 든 다른 나라 언론의 가짜 뉴스나 과열 보도가 생소하거나 놀랍지 않다. 개인 SNS도 마찬가지다. 어떤 내용을 올려야 관심과 홍보가 될까에 초점을 맞추게 되는 것도, 저자의 관점에 따르면 우려스러운 경쟁의 단면이다. 다만 저자가 든 여러 사례 중에서 의문점이 드는 부분이 있다.
2012년 유전자변형 옥수수의 특정 품종에 대한 위험성 증명이 제대로 되지 않았는데도, 언론이 서둘러 <GMO는 독약>이라는 기사를 터뜨리고 여러 정치인이 GMO 금지를 촉구한 사태가 있었다. 저자는 이를 '극단적 사전주의 원칙'의 예로 보면서, 대다수 사람들이 기후위기에 대해서는 과학자의 말을 신뢰하면서 왜 GMO에 대해서는 위험하지 않다는 과학자의 말에 불신하냐고 반문한다. 개인적으로 GMO의 문제점에 대한 자료를 많이 접한 탓인지 모르겠으나, 이 부분에서 저자의 의견에는 선뜻 동조하기가 힘들다. 적어도 이 부분은 과학자에 대한 신뢰 문제와는 좀 다른 맥락이 있지 않을까 싶다.
저자는, '쉽게 믿는 자들의 민주주의'가 포퓰리즘이 될 모든 조건을 갖췄다고 보고, 정치인들이 사람들의 일반적인 판단 오류 성향을 자극하는 대신 이를 진정시켜주기를 기대한다.
"어떤 포퓰리즘은 인민의 외국인 혐오증을 먹고 살고, 또 어떤 포퓰리즘은 부자와 권력자에 대한 인민의 혐오를 먹고 살며, 또 다른 포퓰리즘은 평등에 대한 인민의 지나치게 단순화한 인식을 먹고 산다. (중략) 이득보다는 비용에 주목하고, 낮은 확률을 과대평가하며, 의심스러울 땐 가만히 있는 게 좋다는 등의 사고방식을 조장한다."(309쪽)
궁극적으로 저자는 '쉽게 믿는 자들의 민주주의'에서 '지식의 민주주의'로 가야 한다고 역설한다. 이 책의 마지막 장에는, 그에 따른 저자 나름의 논리와 대안이 나와 있다. 어떤 사회 현상에 대한 문제 제기와 분석에 그치지 않고 해결 방법과 새로운 방향을 모색했다는 것만으로도, 유의미한 장이 아닐까 싶다. (개인적으로는, 책임이 막중한 언론에 대한 저자의 기대 부분에 선뜻 동의하기가 어렵다고 해도.)
이 책을 읽으면서, 우리 생활의 일부가 되어버린 인터넷이 민주주의의 본질을 심각하게 훼손하고 있다는 것, 손쉬운 검색 가운데 은연중 판단의 착오와 추론의 오류를 초래한다는 사실을 실감해본다. 무엇보다 가짜 뉴스와 거짓 정보에 대한 저자의 식견을 보면서, 이 문제가 단순하지 않고 꽤 심각하다는 것, "그저 안 믿으면 그만, 내가 잘 분별하면 되지" 수준을 훌쩍 뛰어넘는다는 것을 알게 됐다. 그렇기에 저자가 말하는 '지식의 민주주의'로 가는 여정이 쉽지는 않겠구나 하는 생각, 반면 '합리적 의심'이 무조건 음모론으로 내몰리는 것도 경계할 부분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스친다. 기존에 가진 생각의 틀을 제대로 흔들어보게 되는 책인 것만은 분명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