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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학 공부를 위해 필요한 101가지 철학 개념
켈리 제임스 클락 외 지음, 김지호 옮김 / 도서출판100 / 201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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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철학에 대해 책을 들여다보며 큰 관심을 보였던 때는 신대원시험을 준비할 때 외에는 거의 없었다. 그때 철학 시험을 준비하면서 책을 보다 보니 시험을 위한 독서가 될 수 밖에 없었고 시험에 나올 만한 것을 암기하는 수준이 내 철학에 대한 관심이었다. 신대원을 졸업하고 목회 현장에서 사역을 감당하면서 과연 내가 왜 신대원에 입할 할 때 철학 시험을 쳐야 했지?’라는 생각이 들만큼 철학은 나와 상관없는 단어라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사역의 연수가 늘어가고 점점 철(?)이 들어가면서 목회철학은 때려야 땔 수 없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다. 본서에서 철학이라는 단어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이런 진술을 하고 있는 것을 발견한다. “철학은 확실한 답을 거의 제공하지 않기 때문에, 종종 비판을 받는다(모든 철학적 이론에는 그와 대등하지만 반대되는 철학적 이론이 있다). 그러나 문제가 철학에 있지 않을 수도 있다. 문제는 아마도 큰 질문들의 거대함과 우리들의 인식 능력의 자그마함에 있을 것이다. 철학의 역사에서 배울 교훈이 있다면, 지적 겸손이 지적인 연마의 덕목이라는 것이다. (p175)”

 

   사역 초기에는 철학적 사고가 필요 없었다. 거기에는 이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아무래도 사역 초기에는 을 주어야 한다는 생각이 강력했기 때문이었으리라. 하지만 이제는 철학이 필요함을 느낀다. ‘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아가기 때문이다. 그리고 아마도 조금은 겸손(?)’해 졌기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본서는 사전이다. 사전은 소설이나 에세이처럼 읽을 수도 없고 그렇게 읽히지도 않는다. 그러하기에 네러티브나 논리적 흐름이 있는 책을 독서하는 습관에 젖어 있는 사람에게는 쉽게 읽히지 않는 책이다(필자가 그러했다.^^) 하지만 본서는 사전이라는 정체성에 충실할 뿐만 아니라 훌륭한 책이다. 특히 제목에도 나타나지만 신학을 공부한 또는 공부하고 있는 사람에게는 반드시 옆에 두고 읽어야 할 책이다.

 

   이 책이 신학을 공부하는 사람에게 좋은 점은 먼저 각 철학 개념(용어에 대한 해석이든 학자에 대한 평가 든)을 논증하는 가운데 결말을 신학적 필요를 충족시키는 방향으로 가져가고 있다는 점이다. 예를 들어 모더니티에 대한 개념을 진술하면서 마무리를 모더니티의 인식론적 측면이 변증학의 영역에서 논쟁점을 불러 일으키고 있는 것으로 정리하면서 신학적 관심을 불러일으킨다(p49). 진리를 변증하고 수호하는 역할을 감당했던 고전적인 변증학이 그들이 상정했던 근대의 보편적이고 자율적인 이성의 개념으로 인해 후기 자유주의 변증가들의 지지를 얻지 못하고 도리어 포스트모더니즘에 동조하려는 경향으로 나아가고 있다는 점이 나에겐 매우 흥미로웠고 신학적 함의를 가진 부분이었다. 이처럼 이 책은 철저하게 신학적 필요를 충족시키고 있다.

 

   또 하나의 장점은 모호한 것 또는 흔히 하나의 개념으로 생각할 수 있는 것을 정확하게 분류해서 설명해 주고 있다는 점이다. 우리는 포스트모더니즘과 포스트모더니티라는 말을 잘 구분해서 쓰지 않는다. 사실 포스트모더니티라는 말을 잘 쓰지 않는다고 하는 것이 더 정확할 것이다. 그러나 본서는 이 두 가지를 분명히 구분하는데 포스트모더니즘은 이론적이거나 학문적인 설명을 기술하기 위해 사용되는 반면에, 보다 광범위한 문화적 환경을 언급하기 위해서는 포스트모더니티라는 말이 사용된다(p190).”고 말하면서 그 구분을 분명히 하고 있다. 이에 따르면 우리는 사회, 문화 현상에 포스트모더니즘이라는 표현을 더 많이 사용하는 우를 범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이처럼 정확한 분류와 정의가 이 책의 또 하나의 장점이라 하겠다.

 

   마지막으로 이 책의 장점이라 생각하는 것은 마음에 와 닿는 현대적인 비유로 철학 개념을 설명하여 친숙하게 만든다는 것이다. 칸트의 인식론과 존 로크의 경험론에서 각각 마음을 어떻게 정의하는지를 비유로 설명하는 부분이 있다. “만약 로크와 경험론자들에게 있어서 마음이 경험에 의해 기록되는 백지라면, 칸트에게 있어서 마음은 포맷된 컴퓨터 디스크와 같다.(p180)” 백지는 감각 인상을 담는 수동적 의미에서 마음에 대한 비유라면, ‘포맷된 디스크는 자료를 짜임새 있게 기록할 수 있도록 체계를 세우는 작업이라는 의미이다. 이와 같은 훌륭한 비유를 통해 철학 개념을 보다 친숙하게 하려는 시도가 여러 군데에서 돋보인다.

 

   이 책을 읽는 방법은 서론에도 언급되어 있지만, 첫째로 각 표제어 아래에 포함되어 있는 여러 인물이나 관련 개념들은 상호참조 색인과 교차하면서 읽어가는 방법이 있다. 두 번째 방법은 각 표제어 맨 마지막 부분에 있는 함께 보기에 나타난 몇몇 항복을 따라가면서 함께 읽는 방법이다. 세 번째 방법은 이 책의 다양한 주제에 대한 유용한 책들의 참고문헌 목록으로 활용하는 것이다(p10). 나는 여기에 한 가지 방법을 더 제시하고 싶다. 그것은 책 겉표지에 친절하게 제시되어 있는 고대~현대기타까지 연대별로 제시되어진 목록을 참고하여 읽어가는 것도 역사적 차원에서 철학적 개념을 정리하는 방법이 될 것이다.

 

   이 책은 나에게 책을 다 읽고 난 후, ‘또 한 권을 다 읽었구나!’라는 쾌감보다는 앞으로 읽을 것이 더 많다는 숙제를 하나 가득 안겨 주었다. 하지만 앞으로 무수히 많은 철학의 거장들을 만날 때 마다 옆에 두고 곁눈질 할 수 있는 마치 공부 잘하는 친구를 옆에 두고 있는 것 같은 마음이 들어 든든하기도 하다. 신학을 공부하는 사람이든, 공부 했던 사람이든 아니면 전혀 신학과 상관없지만 여전히 인생의 을 찾아가는 과정으로 삶을 살아가는 누구든지! 이 책을 집어 들고 읽으라! ‘을 얻기는 어렵지만 어떻게 질문해야 할지는 알 수 있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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급진적 제자도
존 하워드 요더 지음, 존 C. 누겐트.앤디 알렉시스-베이커.브랜슨 L. 팔러 엮음, 홍병 / 죠이선교회 / 201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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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아직도 기독교 신앙 때문에 목숨을 걸어야 하는 많은 나라들이 있다. 그리고 그런 나라에서는 지금도 사도행전적 역사가 일어나고 있다. 대한민국에서는 어떤가? 적어도 목숨을 걸어야 하는 일은 없다. 그렇기 때문에 성경의 진리가 이 시대 이 나라에서는 적용되지 않는 것인가? 이제 더 이상 ‘제자도’에 대한 관심은 꺼도 되는 것일까?

 

한 동기목사님께서 대화 중에 이런 말씀을 하신 적이 있다. ‘이 시대에 정말 목숨을 거는 순교는 없을지 모르지만 쉽게 이야기해서 오늘날의 순교는 가난하게 사는 것이다.’라는 말이었다. 지금도 마음에 많이 남는 말이다. 이처럼 하나님의 말씀은 시대가 어떠하던지 적용될 수 있고, 그에 맞게 설명되어야 한다.

 

존 요더는 1997년에 작고할 때 까지 교회를 향하여 끊임없는 도전을 던졌다. 교회라고 이름 붙여져 있지만 교회가 아니고 그리스도인이라고 불리우지만 그리스도인이 아닌 그 시대의 교회공동체와 성도들을 향하여 ‘급진적 제자’가 되라고 선포하였다. 그리고 그의 선포는 지금 이 시대에도 여전히 적용되는 말이다.

 

그가 말하는 급진적 제자도는 결국 ‘불순응과 순응’으로 요약될 수 있다. 좀 더 사족을 붙이자면 ‘세속의 흐름에 불순응하고 예수의 메시지에 전적으로 순응하는 삶’이 제자도라고 말한다. 그런데 문제는 교회와 성도가 거꾸로 가고 있다는 것이다. 우리의 일상생활 가운데 끊임없이 ‘불순응의 과제’가 주어지는데 우리는 그 과제를 어떻게 다루고 있는지 묻고 있다.

 

“우리의 불순응은 가정과 일터와 교회 사역 등 인간 상호 작용을 하는 주요 영역들에서 표출되어야 한다. 인간들이 함께 모이는 곳이면 어디서든지 남을 지배하려는 시도와 남을 섬기려는 시도 사이에서 선택을 내려야 한다.(p105)” 그러나 문제는 우리의 선택이 언제나 후자이지 않다는 것이다. 섬겨야 하는데 지배하려 한다. 교회가 세상과 달라야 하는데 세상과 다른 모습이 전혀 없는 슬픈 현실일 지금의 교회는 아닌가하는 생각을 책을 읽으면서 계속 하게 되었다.

 

한국 교회가 지탄을 받고 있다. 더 이상 세상이 교회를 신뢰하지 않는다. 이 책을 읽으면서 생각하게 되는 것은 결국 세상이 교회를 향해 지탄을 한다는 자체가 세상이 교회를 향하여 거는 기대가 있다는 말이 아닐까라는 생각이었다. 다르기를 원한다. 세상은 짓밟고 일어서는 것에 관심이 있다면 교회는 예수님 이후로 끊임없이 ‘짓밟히는 역사’가 아니었는가? 그런데 이제 교회가 세상과 다르지 않은 모습으로 군림하려하니 교회를 향하여 손가락질 한다. 존 요더의 외침이 지금 이 시대를 향한 외침인 이유가 여기에 있다. 세속에 불순응하는 것 만이 참 제자가 되고, 교회가 다시 영광을 회복하는 지름길이다.

 

세상을 향한 불순응은 결국 ‘예수를 향한 순응’으로 연결된다. 존 요더는 예수님께서 이 땅 가운데 행하신 목적이 “...... 그 자신이 바로 세상에서 다른 이야기를 만들도록 하나님의 보냄을 받은.....(p198)” 것이라고 정의한다. "예수는 현실 세계에 대항하는 인물이 아니었다. 그는 행복과 구조, 혹은 권력과 가족과 생산성 조차 반대하지 않았다. 단지 이런 것들이 현실 세계에서 어떤 모양을 지녀야 하는지에 관하여 이야기하신다(p199)."

 

그 ‘어떤 모양’이 세상과 다르다. 바울 사도는 고후 5:15에 그리스도인은 더 이상 자기 자신을 위한 삶이 아니라 자신을 위해 자기 몸을 버린 예수님을 위해 산다고 했다. 그리고 그런 ‘목적’을 가지고 살아가는 존재인 그리스도인들을 ‘새로운 피조물(고후 5:17)’라고 선언한다. 새로운 ‘존재’는 새로운 ‘삶의 양식’을 가질 수 밖에 없는 것이다. 그것이 세상을 향한 불순응이고, 예수를 향한 순응이다. 그 예수를 향한 순응이 바로 ‘십자가의 도’이다.

 

이 책은 여러 개의 설교를 묶었지만 각 장의 주제에 맞게 편집자가 적절하게 잘 배열하였다. 편집자 서문에도 나타나 있지만 존 요더의 비교적 어려운 신학적 개념들을 쉬운 표현으로 잘 설명한 설교문 들이기에 ‘존 요더’라는 신학자와 그의 신학을 처음 접하는 사람에게 친절하게 다가갈 책이다. 책 두께도 참 얇다. 하지만 조심해야 한다. 쉽게 책장이 넘어가지는 않을 것이다. 한 장 마다 생각할 거리로, 내 삶의 장에서 바뀌어야 할 도전 거리로 흘러넘치는 책이다. 내가 정말 그리스도인인가? 정말 이렇게 가도 괜찮은 것인가?라는 질문이 드는 사람들마다 이 책을 당겨 읽기를 바란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친절하지 않게’ 내 삶을 진단하는 소리를 듣게 될 것이다. 읽는 것으로 끝나지 않기를... 나도, 이 책을 읽을 또 다른 독자들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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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 뇌 영혼 신 - 심리학과 신앙에 관한 허심탄회한 대화
말콤 지브스 지음, 홍종락 옮김 / IVP / 201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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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신앙과 과학의 대척점에 대해 별로 관심이 없었다. 제도권 교육을 받는 '학생' 신분일 때는 철저한 이원론적 삶(?)의 방식을 고수했다. 학교에서는 '무신론에 근거한 진화론'을 기저로 한 과학을 공부하면서 교회에 와서는 그 '세속의 때'를 말씀과 기도로 씻으면 그만이라 생각했다. 그리고 대학만 들어가면 그까이꺼 '과학' 나하고는 상관 없는 것이 될 거라는 믿음(?)으로 지금까지 왔다.?

 

그런 내가 최근 '과학'과의 심심찮은 조우로 마음이 꽤 불편하게 되었다. 우종학 교수님이 쓰신 '무신론 기자 크리스천 기자에게 따지다' 라는 책을 만나면서 이른바 '창조과학'이라는 것이 한 줄기가 아니라 그 속에서도 여러 지류다 있고 그 속에 치열한 논쟁과 그리스도 인으로서 간과해서는 안되는 지적 논의들이 가득하다는 걸 깨닫게 되었다. 더불어 내가 알고 있던 국내 '창조과학'의 전부인 것으로 인식되고 있는 '젊은지구론'이 한국 교계에서는 전폭적인 지지를 받고 있지만 여러 그리스도인 과학자들 사이에서는 전폭적인 비판(?)을 받을 여지도 다분히 가지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그리고 신앙과 과학의 문제가 나와 전혀 상관없는 문제가 아니고 결국 성도들의 신앙관을 뒤 흔들 만큼 위력적인 문제이기에 이 부분에 대한 목사로서의 관점을 분명히 정립해야 할 필요성을 느꼈고 '신앙과 과학'에 대한 고민과 공부가 필요함을 직시하게 되었다. 그 찰나에 '마음, 뇌, 영혼, 신'이라는 책을 만났다.?

 

이 책의 부제가 '심리학과 신앙에 관한 허심탄회한 대화'이지만 사실 여기에서 다루고 있는 심리학은 '뇌과학, 신경과학' 등에 기반을 둔 이른바 '과학심리학'을 다루고 있기 때문에 '과학과 신앙의 대화'로 바꾸어도 손색이 없을 것 같다. 솔직히 고백하자면 워낙 전문용어가 많이 나오고 '상담심리'를 전공한 내가 '심리'라는 단어만 보고 이 책을 집어 든 것에 무한한 후회를 하면서 한장씩 책장을 넘겼다. 끝까지 다 보기는 했지만 사실 머리에 남는 것이 많이 없다. 너무나 방대한 주제를 다루고 있기 때문이다. 뇌와 마음의 관계, 종교성은 유전적으로 타고나는 결정적인 것인가에 대한 논의, 신 존재에 대한 인식이 이른바 '뇌 영역'이라고 부르는 뇌의 부분에서 만들어진 체계가 아니냐는 논쟁, 영성은 실측 가능한 것이고 여러 생화학적 반응의 결과라는 과학자들의 결론에 대한 또다른 반론 등 생물학에서 문화인류학에 이르는 방대한 내용을 저자가 한 제자의 대화 형식으로 풀어내고 있다.?

 

이 책의 저자인 말콤 지브스는 '뇌-마음'의 문제에 대한 이야기를 하면서 인간은 '심리생물학적 통일체'이므로 뇌와 몸의 물리적 기초에서 벌어지는 일과 정신 과정에서 벌어지는 일 사이에는 놀라운 상호의존성이 있는 것(p54)으로 파악한다. 그리고 그런 주장을 하는 자신을 '이중 양상 일원론자'로 소개한다(p55). 이러한 저자의 견해는 그가 데이비드 마이어스와 공저한 '신앙의 눈으로 본 심리학(1995, IVP, 박원기 역)'에서도 드러나는데 저자가 가지고 있는 인간관의 바탕은 구약성경에 나타난 '인간 본성의 이미지'이다. 히브리 성경에서 영혼을 지칭하는 단어 네피쉬는 '육체적으로 살아 숨쉬는 피조물, 실제로 만저볼수 있는 물질적인 사람을 나타낸다. 이것은 영육 이원론을 말하는 플라톤의 불멸하는 영혼과는 거리가 멀다는 것이다(신앙의 눈으로 본 심리학 p43).?

인간을 어떤 관점으로 보는가에 대한 부분을 저자가 강조하는 이유는 이 책에 나타난 과학적 실험과 연구를 통해 얻게 되는 인간의 뇌를 포함한 물리적 작용에 의해 일어나는 결과를 해석하는데 있어서는 결국 '관점'이 작용하기 때문이다. 심리 과학자들이 '마음, 영혼, 신 이해'와 같은 이른바 '정신 작용'과 관련된 문제를 '신체 생리적 작용'과 분리된 개념으로 인간을 바라보는 이른바 '영육 이원론'적 관점을 가지고 있다면 계속해서 쏟아져 나오는 연구 결과들은 그러한 관점을 옹호하는 쪽으로 해석될 수 밖에 없다.?

 

그러하기에 저자는 '신앙'에서 '과학'을 몰아내야 하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전문 분야'에 자신의 신앙적 관점을 분명히 하고 논쟁하고 분별해 내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마땅한 도리라는 것을 간접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이 책이 저자(교수)와 제자(갓 대학을 들어간 크리스천 심리학도)사이의 대화로 설정하여 쓰여진 이유도 바로 '성경적 관점'을 가지고 필드에서 연구하는 사람들이 책임감을 가지고 쏟아지는 데이터와 연구 결과들을 토대로 '진리를 수호하고 논증해 내는' 역할을 후학들에게 도전하려는 의도가 녹아 있다고 생각했다.?

 

자신이 공부하고 있는 학문분야에서 특히 과학 분야에서 그리스도 인으로서 태도와 학문의 자세를 가져야 하는지에 대한 고민이 있는 사람이라면 주저 없이 보아야 할 책이다. 신경과학과 인지심리학 분야의 역사적 흐름에서부터 최신 동향을 아우르는 동시에 앞으로 연구의 방향과 흐름에 대해서까지 집어 주는 저자의 혜안을 통해 앞으로 어떻게 하면 '상아탑에 갖힌 하나님'을 인생의 실재 가운데 호흡하며 다스리는 창조주로 드러낼 수 있을지를 발견케 하는 이정표를 만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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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하나님을 어떻게 믿어요?
김기현 외 지음 / SFC출판부(학생신앙운동출판부) / 201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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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 절망

이 책을 읽으면서 나는 먼저 ‘절망’했다. 먼저 이 책을 쓸 당시 고3이었던 희림이가 읽은 독서의 폭이 내일 모래 마흔(?)이 될 나보다 훨씬 넓다는 것에 그리고 생각의 깊이와 자신의 생각을 표현하는 필력에서 너무나 큰 절망감이 밀려 왔다. ‘기도’에 대한 질문을 하는 부분에서 언급한 프란시스 베이컨의 ‘신기관’(p 80, 나는 이런 책이 있다는 것을 이 책에서 처음 알았다.), ‘예정’에 대한 질문을 하는 부분에서 인용한 사르트르의 ‘지식인을 위한 변명’(p153), 그리고 ‘과학’에 대한 질문에서 인용한 책들 일일이 나열할 수 없을 만큼 나를 부끄럽게 만드는 희림이의 ‘독서력(讀書歷)’에 혀를 내 둘렀다. 역시 ‘그 아버지의 그 아들’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자신이 희망하는대로 ‘훌륭한 인문학자’가 될 것 같다.

 

- 배움

저자가 아들 희림이를 대하는 태도를 많이 배워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책 곳곳에 한참 나이가 어린 아들임에도 불구하고 처음부터 끝까지 ‘진지함’으로 그 질문들을 수용하고 최선을 다해 답하려는 ‘아버지’의 모습이 묻어 있었다. “어려운 질문만 골라서 하네. 주제 자체도 까다로운 데다가, 네가 집요하게 캐묻고 작정하고 달려드니 가볍게 응수할 수 없게 됐어....”(p157)라고 앓는 소리를 하는 듯 보이지만 그 속에 이미 아들을 ‘하수(下手)’로 보는 것이 아니라 함께 인생의 주제들을 놓고 고민하는 ‘동반자’로 대하는 태도가 녹아 있었다. 나도 아들이 있고 이 아이가 어떤 모습으로 자라갈지 모르겠지만 목사님께서 희림이를 대하듯 나도 대할 수 있으면 참 행복할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 개념정리

어떤 용어나 현상에 대해 설명하려면 ‘명확한 개념 정리’가 있어야 한다. 그것이 선행되지 않으면 결코 잘 표현할 수 없다. 희림이와 저자가 주고 받는 편지를 통해 내가 얻은 유익은 ‘개념 정리가 되었다.’는 것이다. 특별히 ‘예정’에 관해 주고 받은 편지는 나에게 아주 큰 도움이 되었다.

 

예정의 핵심은 ‘하나님의 주권’이다.......... 하나님의 예정을 강조하는 것이 필연적으로 배제를 함축한다고 보느냐, 아니면 그렇게까지 보는 것을 거부하느냐의 차이(p160. 강한 예정론, 약한 예정론에 대한 탁월한 정의라고 생각한다.)

예정에는 구원받은 당신의 백성과 창조된 당신의 세상을 구원하려는 하나님의 의지가 담뿍 담겨져있어. 그러므로 예정은 하나님의 사랑인 거지(p163).

 

많이 읽고, 많이 깨지고, 많이 물어야 할 이유를 두 사람간의 편지가 여실하게 보여주었다.

 

- 아들에게 이야기하듯

이 책은 앞으로 내가 읽게 될 책들, 접하게 되는 지식들이 어떻게 정리되어야 할지에 대한 물음에 답을 주는 책이었다. 앞으로 나는 아들 이야기해 주듯, 아들에게 이야기 해 주기 위해 준비하듯 지식을 정리하고 책 내용을 정리하겠다. 먼 훗날에 내 아들에게 대답해 줄 답을 준비하는 것이 나의 ‘독서목표’가 되었다. 이제 나는 그렇게 읽고, 쓰고, 책을 먹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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