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폴라 일지
김금희 지음 / 한겨레출판 / 2025년 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월동 대원들이 조디악을 몰고 와 남극 물개처럼 생긴 유빙에 묶고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맞바람에 떠내려가지 말라고 조디악을 고정해놓은 것이었다. 얼음이 말뚝을 대신하는 곳, 바로 여기가 남극이었다.”


 소복이 내리던 눈이 얼어붙는 겨울을 지나면서 읽었던 ‘나의 폴라 일지’. 번거로운 탑승수속과 지상을 떠난 두 발이 구름 위에 떠 있는 동안 느껴지는 기이한 불안으로 비행을 꺼려 하는데 나에게는 대륙을 건너고 극한 추위가 매일인 남극은 상상 밖의 공간이다.

감히 가볼 엄두도 내지 못했던 그곳의 눈이 시리도록 하얀 유빙과 빙벽, 펭귄, 해표, 자갈돌, 그리고 밟히는 중인 줄도 모를 만큼 작고 보드라운 이끼들을 고스란히 녹여낸 글은 다정한 다큐멘터리 한권이었다. 


“남극 하면 우리와 먼 곳처럼 드리지만 막상 여기 와 보니 남극의 모든 것이 삶을 관장하고 있었다. 지구의 양 끝인 남극과 북극은 세상의 대기와 해류를 이동시키는 아주 거대한 손이었다. 이곳의 변화들이 지구를 휘저었고 우리 일상이 조형되었다. ‘기후’라는 말 뒤에 붙는 변화, 위기, 때론 전쟁과 습격이라는 수많은 불확실성 속에서도 매일 전 세계의 과학자들이 같은 시각에 풍선을 올려 하늘을 살핀다는 것이 작은 낙관처럼 느껴졌다.”


라디오 존데. 남극에서는 매일 대형 관측 풍선을 띄워 대기 상황을 살피면서 지구의 오늘을 기록한다고 한다. 지금은 어떤 모습으로 기록되고 있을까. 그 속에 미미하게 기록되었을 작고 작은 나의 모습은 불확실성 속에서도 매일 라디오 존데를 띄우는 과학자들의 마음과 비슷한 낙관을 품고 주어진 하루를 충실히 살아내려고 고군분투하고 있겠지. (우리나라에서는 포항의 센터에서 매일 풍선을 올린다.)  


“정작 나는 추워 덜덜 떨고 있었지만 마음은 녹듯이 포근해졌다. 일면 슬퍼지기도 했는데 너무 순정한 것, 아름다운 것, 들끓는 자아 따위와는 무관한 자연 자체의 풍경과 맞닥뜨릴 때 느끼는 기이한 상실감 같은 것이었다. 남극이 좋아지면 좋아질수록 나는 실제 내 삶은 이곳과 얼마나 다른가를 동시에 감각했다. 적어도 지금의 내게는 남극이 인간이 인간처럼 살 수 있고 해표가 해표처럼 살 수 있는 지구상에서 가장 안정적인 공간이었다.”


마음이 시리고 버스럭거릴 때 ‘다감한 소설가의 투명한 기록’을 다시 들여다 볼 것 같다. 위버반도가 배경이 될 신작 소설도 기다리면서. 

남극이 좋아지면 좋아질수록 나는 실제 내 삶은 이곳과 얼마나 다른가를 동시에 감각했다. 적어도 지금의 내게는 남극이 인간이 인간처럼 살 수 있고 해표가 해표처럼 살 수 있는 지구상에서 가장 안정적인 공간이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쓸수록 선명해진다 - 내 안의 답을 찾아 종이 위로 꺼내는 탐험하는 글쓰기의 힘
앨리슨 존스 지음, 진정성 옮김 / 프런트페이지 / 2025년 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탐험쓰기는 약간은 지저분하고 솔직한, 살아 숨 쉬는 글쓰기다.”


어김없이 오전 6시가 되면 질문이 주어진다. 오늘은 6분 글쓰기 챌린지의 마지막 날이다.

아침형 인간이기에 나는 매일 오전에 글을 쓰려고. 타이머를 맞췄다, 단 6분.

매일의 작은 성취는 열흘이 쌓였다. 쓰고 싶은 연필을 골라 빈 종이 위에 질문을 옮겨 쓰고 거칠게 써 내려갔다. 하루 중에서 내가 가장 자유로워지는 시간이다. 키보드로 글을 썼다면 이토록 자유로울 수 있었을까.


“번거롭거나 돈이 많이 들지는 않았을 것이다. 시간도 오래 걸리지 않고 전문기술도 필요 없다. 오늘의 탐험쓰기가 완전히 실패로 돌아갔다 해도, 낭비한 것은 6분의 시간과 저렴한 종이 두어 장뿐이다. 이제 가벼운 마음으로 길을 떠나자.”


‘n살의 나에게...’라는 질문을 받던 날이 기억에 남는다. 과거의 나와 미래의 나를 고민하다가 잘 지내고 있을 미래의 나에게 말을 걸었다. 그곳에서 잘 지내고 있을 내가 오늘의 나에게 위로가 되었다. 나를 일으키는 건 언제나 나다. 챌린지는 오늘로 끝이 나지만, 매일 나는 책상에 앉아 질문을 떠올리고 글을 쓸 것이다. 그렇게 되어 버렸다는 게 맞다. 해소되지 못한 어제의 감정들을 써 내려가는 글도, 다가올 내일을 기다리는 감정들을 써 내려가는 글도 있겠지만, 나를 ‘탐험하는’ 글쓰기는 나의 작심이다. 


“내게 있어 탐험쓰기는 명상보다 더 효과적인 마음챙김 수단이다. 바로 그 순간에 집중할 수 있도록 나를 붙들어 두는 초점과 탐색할 공간을 마련해 주기 때문이다.” 



탐험쓰기는 약간은 지저분하고 솔직한, 살아 숨 쉬는 글쓰기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너의 오른발은 어디로 가니 - 돌봄 소설집 꿈꾸는돌 41
강석희 외 지음 / 돌베개 / 2024년 1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유난히 한숨이 잦은 날이었다.
아이가 나를 보고 있다는 생각을 하지 못했다.
눈치를 살피다 곁으로 천천히 다가왔을 태환이가 물었다.
“엄마, 오늘 왜 이렇게 한숨을 많이 쉬어?”
적당한 핑계와 이유를 찾지 못하고 머뭇거리는데 아이가 나의 등 뒤로 돌아와 어깨를 주물러주었다. 오늘 엄마가 힘들어 보인다고 했다. 어깨에서부터 퍼지는 아이의 마음이 가라앉은 나를 일으켰다. 얼마 전에 산 커피를 진하게 내리고 내 자리에 앉아 책을 펼쳤다. 30분 남짓 한 시간. 저녁 시간을 보낼 만큼의 힘이 났고 저녁메뉴를 고민하는데 어머님의 전화가 울렸다.
“시장 갔는데 닭이 좋아 보여서 닭볶음탕 했다. 가지고 올라가거라.”
요즘 태환이가 제일 좋아하는 어머님표 닭볶음탕이다. 점심 즈음에 어머님의 세금 신청을 도와드렸다. 우편으로 온 설명서를 아무리 읽어도 모르겠다고 민망한 듯 부탁을 하셨는데, 그런 도움을 받고 나면 과일이나 저녁 반찬을 만들어 주시는데 같이 먹자는 소리는 하시지 않는다. 편하게 먹으라는 어머님의 배려다. 집에 들어오니 태환이는 콧노래를 부르며 도마뱀들의 집을 청소하고 있었다. 그 사이 저녁상을 차렸고 우리는 한 공기의 밥을 온전히 비웠다.

책을 다 읽었던 날의 저녁이었다. 돌봄으로 이어지는 풍경. 어깨를 주물러주는 아이의 작은 손과 요리를 만드는 어머님의 손, 그리고 나를 위해 커피를 내리는 손까지. 육아에서 비롯된 일방적인 돌봄의 주체로 살아가는 고됨만을 생각하고 있었는데 서로의 빈자리와 결핍을 채워가며 나도 돌봄 노동의 주체이자 객체로 살아가고 있다는 걸 뒤늦게야 안다.

"“낙원”
소리 내어 단어를 말해 보았다. 낯설고 어색했다. 도망친 곳에 낙원은 없겠지만 악어도 없을 것이다. 등에 멘 가방을 한 번 추켰다. 집에서 멀어질수록 가방이 조금씩 무거워졌다. 언젠가 나도 라마처럼 지금보다 훨씬 큰 가방을 몸의 일부처럼 업고 다닐지도 모른다. 여전히 사랑을 바라고 청하면서. 그렇게 어른이 될 것이다."

소설 속 10대 주인공들도 각자에게 주어진 돌봄의 몫을 수행하면서 살아간다. 막연한 희망이나 절망이 아니라 [낙원] 속 ‘장해요’처럼 조금씩 무거워지는 가방을 메고서 세상 속으로 들어가는 아이들을 말하는 이야기가 그래서 좋았다. 돌아보면 나도 그랬고, 우리 모두 그랬다.

“말하기 전에는 막연했다. 선명하지 않으면 모른 척해도 되는 거라고 생각해 왔다. 하지만 기록하는 순간, 더는 예전의 나로 돌아갈 수 없다.”

누군가는 이런 이야기들이 무슨 문학이 되느냐고 할 수도 있지만 말이 되고 기록이 되었기에 ‘돌봄’이라는 개념과 가치를 알게 되었다. 삶의 어떤 시기에도 돌봄에서 제외되는 사람은 없다. 그렇기에 우리가 각자의 몫으로 수행하는 사소하고 위대한 돌봄의 가치를 이 책을 읽으며 함께 알아 가면 좋겠다.

오소소 소름이 돋을 만큼 특히 좋았던 김다노 작가님의 [낙원]. 해요는 어디쯤을 걷고 있을까?
한참을 머물렀던 작가님의 말을 남긴다.
“끝을 만들어 가는 건 각자의 자신이라고 믿고 있다.”

"낙원"
소리 내어 단어를 말해 보았다. 낯설고 어색했다. 도망친 곳에 낙원은 없겠지만 악어도 없을 것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엄마 없는 농담
김현민 지음 / 안온북스 / 2024년 6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엄마 없냐, 암 걸리겠네.” 라는 농담에 정색해서

“농담이야. Just kidding(정용준 작가님 책 제목이기도 하다). 왜 이리 진지해?”

웃자고 한 농담에 죽자고 덤비는 예민한 사람이 되고는 했다. ‘엄마 없는’ 시절을 지나고 있는 나는 언제쯤 그 말이 ‘농담’처럼 편안해질까. 작가님이 꿈에서 바라는 분노와 혐오는 없고 끝내주게 웃긴 농담만 남아 있는 그런 세상에서는 가능할까.

 

“엄마가 죽었다는, 대단할 게 없는 정보를 나 혼자 독점하는 이유는 단순하다. 당시 아픈 엄마를 제대로 돌보지 못한 뿌리 깊은 죄책감. 지금까지도 미세한 바늘이 가슴을 쿡쿡 찌르는 느낌이다.”

이 세상을 살아가는 동안은 비슷한 죄책감을 안고 살아가는 누군가가 정색하는 나를 이해해주고 있다는 사실에 그저 위안을 얻어야겠지.

 

작가님을 따라 타임머신을 타고 ‘엄마 있는’ 시절로 돌아가 본다. 아디다스 모자에 신발, 옷을 사드리고 함께 제주도를 여행할 것이다. 새로 산 모자와 신발과 옷, 그대로를 입고 신고서. 나중이라는 시간이 당연했기에 배우지 못했던 엄마표 콩나물 된장찌개, 시레기 된장 지짐, 진미채 무침을 배우고, 저녁이 되면 구운 오징어를 고추장에 푹 찍어먹으며 더 자주 수다를 떨 것이고 토요일 밤, 개그콘서트를 보며 너무 시끄럽게 웃는다고 등짝을 때리던 엄마를 안아 줄 것이다.

濃淡(농담). 농에서 담으로 흐르던 엄마에 대한 기억들 가운데 좋은 기억만이 담에서 농으로 흘러 책을 읽으면 서럽게 울어 버릴 줄 알았는데 희미하게 웃고 있었다. 엄마를 떠올리며 웃는게 낯설다. 그런 내가 애잔하고 슬프게만 기억한 엄마에게 미안해 유실되고 망각된 좋은 기억들을 찾으러 그 길을 낯설게 따라갔다. 엄마에 대한 기억이 달라지고 있었다.

 

“농담이란 때론 거칠지만 대상을 대하는 가장 다정한 방식이다.”

아이는 작년 3학년 담임 선생님이야기를 여전히 하는데 유연하고 시의적절하게 하는 선생님의 농담에 기대어 학교생활을 했다. 농담이 적은 4학년 선생님과 지내는 조금 지루해지 학교생활이 이해가 된다. 내가 농담을 던지면 냉혹하게 ‘노잼’이라거나 이건 3학년때 선생님 보다 재미없다며 이가 다 보이게 활짝 웃으며 피드백을 줄때가 있다. 귀엽다. 사춘기가 되면 이가 하나도 보이지 않을 텐데, 분발해야 겠다는 생각을 자주 하는 요즘.

나의 하루에는 농담이 없는 날이 없다. 기어이 찾아 하루 틈에 끼워 넣어 아이 만큼 나도 농담에 기대어 하루를 보낸다. 웃음 한번에 괜찮은 하루가 되기도 하는데 그만큼 나에게 농담의 힘은 세고 농담을 만들어 웃음을 주는 사람들은 귀하고 감사하다. 그런 작가님이 쓴 글을 읽었으니 그만큼 더 감사한 하루. 가볍게 넘기던 책장을 무겁게 덮었다.

나는 엄마가 생각날 때마다 속으로 고해성사를 할 것이다. 그 소리가 우표 없는 편지처럼 그곳에 닿지 않을지라도. 앞으로 잘살게요. 농담은 치유력이 있어서 상처가 깊은 사람도 꿋꿋히 살아갈 수 있게 도와주기도 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어린 심장 훈련
이서아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24년 5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그들은 고모와 대화하며 내게 눈길도 주지 않았고, 마치 단 한번도 아이를 낳아 본 적 없는 사람들처럼 굴었다. 만약 내가 그들에게 말을 걸면 그들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이렇게 말할 것 같았다. “어머 부모님을 잃어 버렸니?” 그러나 그건 이미 알고 있던 사실이었다. 그들은 나를 낳지 않았으면 훨씬 더 행복했을 것이다.

그때 나는 한 가지 사실을 깨달았다 : 개는 온 얼굴로 행복해 하고 온 얼굴로 슬퍼한다. 방방 뛰고 짖고 부르르 떨면서 자기 마음을 다 보여준다. 개는 그래도 된다.

내가 있는 곳까지 온몸으로 쓸어 만든 자국이 보였다. 내 체구만큼 자그마한 붓질이었다.
뭐, 어찌 됐든 이건 내 무대였다.

아무튼 나는 그러고 산다. 영혼의 왼쪽은 겨울에, 오른쪽은 봄에 두고 산다. 겨울과 봄은 서로 희망과 절망의 자리를 번갈아 맡아가며 나를 놀아준다.

나는 고독함에 익숙하고, 나를 달래는 일에 천부적이다. 그러므로 나는 나를 달래면서 산다.
이렇게 살든 저렇게 살든 내가 바다에 파도 하나 일으킬 수 없는 신세라면, 오늘 불안해할 이유는 무엇인가, 이렇게 죽든 저렇게 죽든 내 생이 바다의 기포와 같다면, 내가 내 것이 아닌 생에 미련을 가질 이유는 무엇인가.
*[검은 말]-[서울 장미 배달]-[서울 장미 배달]-[초록 땅의 수혜자들]-[푸른 생을 위한 경이로운 규칙들]에 실린 문장들

소설집에 실린 각 단편 속에서 밑줄 그은 문장들을 나란히 모아서 읽어보니 다시 하나의 이야기로 이어 진다. 나는 그 글 끝에 ‘어린 심장 훈련’이라는 제목을 붙였다. 성장해 나가는 주인공인 ‘나’의 이야기를 따라가며 나에게 묻는다. 나의 어렸던 심장은 어떤 훈련을 받으며 어른이 되었나. 쫓기듯 뛰고만 있지는 않은가. 속도를 바로 잡아 힘겨운 뜀박질을 도와주고 싶다.
고독과 외로움, 생의 어두운 모퉁이들을 날것 그대로, 어쩌면 가장 문학적으로 보여주는 낯선 작가가 쓴 낯선 형식의 소설을 읽으며 다음 소설을 기다렸다.

“살아 남는 것은 불변의 원칙입니다. 일상은 가벼운 게 좋습니다. 제발 모두 그래주었으면 합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