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리브 키터리지
엘리자베스 스트라우트 지음, 권상미 옮김 / 문학동네 / 2010년 5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찬란하여라. 그래도 삶은.

지금 나는 어느 한 시골 마을의 보건지소에서 근무하고 있다. 군복무 대신에 한의사로서 시골 보건지소에서 환자를 보고 있다. 충청남도의 한적한 시골 어딘가. 이 곳을 찾는 대부분의 환자들은 자연스레 할머니, 할아버지들일 수밖에 없다. 60대조차 찾아보기 힘든, 70,80대 할머니, 할아버지들을 보면서, 나도 자연스레 내가 저 나이가 되었을 때는 어떤 삶을 살고 있을까 하는 생각을 떠올리게 된다.

“나는 저들의 나이가 되었을 때 지금처럼 철이 없을까? 무슨 생각을 하고 살아갈까?

후회? 만족? 보람? 두려움? 초탈?”
물론 그 나이가 되어보지 않아서 알 수는 없겠지만 조금의 힌트를 <올리브 키터리지>가 내게 던져주었다.

<올리브 키터리지>는 미국 어느 한적한 바닷가 마을에서 벌어지는,

그 마을에 사는 올리브 키터리지 본인의 이야기들, 올리브가 직접적, 간접적으로 연관되어 있는 마을 사람들의 이야기들을 단편의 형식으로 담백하게 묶어내고 있는 소설이다.

올리브 키터리지. 헨리 키터리지의 아내. 지금은 은퇴한 학교 선생님. 족부의학 전문의 크리스토퍼 키터리지의 어머니. 흔히 말하는 다른 사람들보다 조금 기가 센, 약간 한 성격하는 평범한 여자.


조금 강한 성격으로 아들을 그녀만의 방식으로 사랑한 탓에 아들과의 관계가 조금 원만하지 않은 것을 제외하고는 -심지어 그것마저도- 흔히 볼 수 있는 황혼기의 나날을 보내고 있는 그야말로 내 진료실에서도 흔히 볼 수 있는 그런 할머니(라고 하면 왠지 혼날 것 같은.)


이 올리브 키터리지를 중심으로 소설은 그의 남편, 그의 아들, 그의 이웃 사람들, 자살을 결심하고 마을에 돌아온 그의 제자까지.. 그 외연을 넓혀가며 그들 하나하나의 삶을 주목하고 파고 들어간다.

조금 심심하다 못해 섭섭하기까지 할 정도로 양념을 치지 않은 담담한 이 소설이 결코 비린내가 나지 않는 것은 이것 때문이다. 어찌보면 아무것도 아니랄 것만 같은 이야기. 우리가 흔히 기대하는 스펙타클 충만한 어떤 이야기도 나오지 않는 이 소설의 미덕은 마을 사람들의, 암만 들어도 스펙타클하진 않지만 당사자에게만큼은 꼭 누구에게 들려주어야 할 것만 같은 이야기, 내 안에만 담고 있으면 안 될 것 같은 울컥울컥한 감정을 소설에 담아내고 그것을 통해 우리 또한 느꼈던 그 감정을 격발시키기 때문이다.


이 소설에는 하나의 절정이 없다. 책 전반에 흐르는 발단도 없고 전개도 없고 절정도 없으며 결말도 담아내지 않는다. 대신, 하나하나의 이야기가 발단이요 전개요 절정이다. 그러나 역시 하나하나의 이야기에도 결말은 담겨있지 않다. 절정과 ‘그리고’ 가 담겨있다. 이것이 삶이기 때문이다.

 
결말은 없다. 살아있는 동안에는 우리에게 결말은 없다. 우리를 거쳐 가는 소소한 이야기들 속. 발단과 전개와 클라이막스 속에서 우리는 다시 또 다른 소소한 사건의 발단과 전개와 절정을 만난다. 그것들이 쌓이고 또 쌓이고 굴러다니고 이리 엮이고 저리 엮이면서 우리네 삶을 만들어낸다. 이 소설은 그 삶을 그대로 담아내었다. 그래서 이 소설에는 하나의 단편이 끝나고, 소설의 모든 페이지를 다 넘겨내어도 결말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래서 이 소설은 하나의 삶이다. 살아있음에 모든 것이 아름다운, 찬란함을 뿜어내고 있다.


인생에서 가장 아름다운 때, 찬란한 때는 무엇일까.
청춘. 청춘이 왜 청춘일 수 있는 것일까.
사랑. 

작가 또한 이렇게 생각하는 것일까. 이 책의 처음도 사랑이요, 마지막도 사랑이다.

평생의 결혼생활. 아무리 서로 평생 사랑한다고 할지라도 다른 누군가에게 마음이 가는, 물론 그럼에도 불구하고 너의 사랑은 누구냐 라고 할 때 양심의 가책 없이 서로의 배우자를 말할지라도 지나고 보면 그것이 다른 또 하나의 무엇이었구나. 라고 깨달을 수밖에 없는 우리네 인간, 그리고 그 자체로서 삶의 당연함. 

남편을 보내고 홀로 남은 올리브 키터리지. 그리고 평소에 재수 없는 영감탱이라고 생각했을 뿐인 마을의 잘 알지 못하는 노친네 잭 케니슨. 둘은 예기치 못한 사고로 친해지고, 또 서로 친해지고 싶어 했으며, 친해질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또 누군가 한사람이 남을 때까지 서로를 아낄 것이다. 또 한사람이 남게 되면 또 다른 사람을 찾지 않더라도, 찾는 것을 원하지 않더라도 찾아질 것이다. 또 친해지고 또 친해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것이 살아있음이라는 것의 증명이니까.

"젊은 사람들은 모르지, 이 남자의 곁에 누우며, 그의 손을, 팔을 어깨에 느끼며 올리브는 생각했다. 오, 젊은 사람들은 정말로 모른다. 그들은 이 커다랗고 늙고 주름진 몸뚱이들이 젊고 탱탱한 그들의 몸만큼이나 사랑을 갈구한다는 것을, 다시한번 내 차례가 돌아올 타르트 접시처럼 사랑을 경솔하게 내던져서는 안된다는 것을 모른다."-p483

그래서 인생의 모든때가 청춘이요 아름답다.

나는 그네들의 나이가 되었을 때 어떤 삶을 살고 있을까?

나는 그때도 철이 없을 것이며, 책을 읽는 것보다 책을 책장에 놓아두고 바라보는 것을 더 좋아할 것이다. 여전히 기계치일 것이며, 어쩌면 그때까지도 환자를 보며 환자가 너무 많다고 투덜대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냥. 삶은 이것들의 연속일 것이다. 발단 전개 절정, 발단 전개 절정. 그리고 그래서 그랬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아있음이 끝난 다음에야 이 것들의 결말이 한번에 이루어질 것이다. 아직은 생각하기 싫지만 말이다. 생각하기 싫다고 생각안할 수야 있나. 죽음에 대한 두려움 역시 삶의 일부분인 것을. 


찬란하여라.

그래도 삶은.

아직 살아있음에.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