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에 관하여 - <개를 데리고 다니는 여인>과 대표 단편들 펭귄클래식 70
안톤 파블로비치 체홉 지음, 안지영 옮김 / 펭귄클래식코리아 / 201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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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곡과 단편집으로 유명한 안톤 체호프. 벚꽃동산만 겨우 읽어본 나에게 펭귄클래식에서 내놓은 안톤 체호프의 <사랑에 관하여>는 상당히 신선하게 다가왔다. 그간 말로만 들었던 단편의 대가 체호프. 요즘 과연 고전이란 것이 무엇인지, 고전이 과연 그 가치를 특수하게 인정받을만한 것인지에 대해 의문이 들고 있는 나에게 그래도 고전은 고전이다라는 것을 새삼 다시 한번 일깨워준 작품이 될 것 같다.

<사랑에 관하여>는 안톤 체호프의 잘알려진 대표작 몇 선과 그의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꼭 읽어보아야 할 몇 선의 작품을 잘 혼합해 놓고 있다. 특히 그의 초창기 작품이라고 할 수 있는 '굴'과 '진창', '구세프'는 그간 잘 소개되지 않은 체호프의 작품들 중 왜 이 작품들이 꼽혔는지 절로 고개를 끄덕이게 만드는 작품들이라고 할 수 있다.

그 중 첫 번째로 배치된 '굴'은 그 순서와 내용 모두 의미가 깊다. 가난한 아버지와 아들이 구걸을 하러 돌아다니는 와중에 아들이 '굴'이라는 단어를 처음 접한다. 아이는 굴에 대해 이런저런 상상을 해보다가 결국 사람들의 잔인한 호기심과 관음증으로 인해 굴을 먹게 된다. 역시나 현실은 굴과는 전혀 상관없이 변하지 않고 아버지는 아픔에 헛소리를 하고 있다. 어찌보면 큰 내용없이 전개되는 이야기 속에서 체호프는 자신이 바라보는 인간과 현실에 대한 찐득한 어둠을 너무도 잘 그려내었다. 그리고 이 '굴'이 첫번째로 소개되면서 독자들은 이 <사랑에 관하여>가 어떤 느낌의 책일지 그 진정한 맛을 이미 확실히 자기도 모르게 인지한 후에 책의 세계로 빠져든다.

이후 책은 '굴'을 제외한 8편의 이야기가 펼쳐지고 그 하나하나 체호프의 스타일과 내면을 느낄 수 있게 해준다. 그리고 체호프는 별다른 일 없이 벌어지는 이야기들과 그 안의 인간의 짐작할만한, 그러나 딱히 무어라고 설명할 수 없는 인간들의 내면과 심리,본성에 대한 이야기속에서 그 개개인의 특성이 아닌 사회와 인간의 특성에 대해서 너무도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특히 이 책의 제목이기도 한 '사랑에 관하여'는 이러한 것을 가장 극명히 보여주는 작품 가운데 하나다. 그는 이 작품을 통해 자신의 현실을 깨버리고 싶지만 결국 또 그렇게 할 수 없는 소시민의 모습, 소시민이 아닐지라도 대부분의 사람들이 깰 수 없는(사실 깬다고 특별히 변할 것 같지 않다고 해도 깨지 못하는 것들)현실의 보이지 않는 벽과 그에 대한 소회를 통해 이야기를 마무리 짓지만 그 모습을 통해 사랑에 관한 것이 아닌, 인간에 관한, 세상에 관한 이야기를 전개해나가고 있다. 결국 '사랑에 관하여'는 '사랑'이야기를 하고 있지만 그것을 통해 '인간'과 인간들이 모인 '사회'의 속성에 대히 보여주고 있다.

체호프가 보여주는 현실은 상당히 우울하다. 소설속의 주인공들과 등장인물들은 하나같이 가난하거나, 잘못된 욕망에 탐닉하거나, 결혼생활에 실패했거나, 정신병등의 질환을 앓고 있다. 또한 그들의 현실은 나아지기는커녕 결국 '예정대로' 죽음을 맞이하고, 계속 가난하며, 진창에서 빠져나올 생각을 못하고 새로 찾은 사랑에 대해 확고한 결말을 짓지 못한다. 그리고 어쩌면 그래서 더욱 우리는 체호프의 소설들을 떠받들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 안에서 우리는 지금도 이어지는 우리와 세상의 모습들을 발견한다. 그 체호프의 예리함은 100년 이상의 시간이 흐른 지금에도 여전히 유효하다. 우리는 100년이 지난 지금도 사랑을 찾아 헤매지만 결국 스스로의 벽앞에 좌절하고, 일은 꼬이기만 하며, 가끔 헛된 진창과 같은 욕망에 빠져 허우적댄다. 체호프는 100년 전에 이미, 우리가 100년 후에도 이럴 것을 알고 있었다.
  



ps 보통 책의 구성과 편집에 인색한 내가 이 책의 구성은 칭찬을 하지 않을수가 없는데 <사랑에 관하여>는 이런 체호프의 시선을 너무도 잘 담아내고 있다. 특히 각 9편의 단편들이 너무도 적절히 잘 배치되어있다. 특히 처음에 '굴'을 배치하고 마지막에 '개를 다니고 다니는 여인'을 배치한 편집자의 센스는 안그래도 빛날 체호프의 단편들을 더욱 찬연하게 하는데 혁혁한 공을 세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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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주의 아이들 - 부모를 한국으로 떠나보낸 조선족 아이들 이야기 문학동네 청소년 8
박영희 지음 / 문학동네 / 201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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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주 이야기

만주. 사실 우리는 당연하게도 만주를 잘 모른다. 만주땅이라하면 예전 고구려와 발해에 의해 다스려졌던 땅. 우리의 고토(古土). 간도협약으로 우리가 빼앗긴, 언젠가 통일이 되면 다시 찾길 간절히 소망하는 땅. 일제시대 폭정을 피해, 그리고 폭정에 맞서기 위해서 조선의 백성들이 도망가고, 힘을 키우러 갔던 곳. 우리는 만주를 그저 땅으로 기억한다. 북한의 주민들은 어떨지 모르겠다. 그들에게 중국은 혈맹국이고 만주는 북한과 바로 맞닿아있는 그런 곳이니까. 그러나 중국과 소원한 관계를 수십년간 유지했던 한국에게 만주는 그저 '땅'이었다. 역사시간에 국내 영토를 제외하고 가장 많이 등장하는 땅. 우리는 그곳을 땅으로만 기억하고 책속에서만 기억해왔다. 수십년 간 가볼수 없는 곳이었고 굳이 가려고 하지도 않았다. 우리에게 만주는 피상적인 단어이다. 그토록 한국의 역사와 밀접한 관련을 맺은 곳임에도 불구하고 어떤 모습일지 상상도 한번 해보지 않았던 그곳. 그러나 사실 만주는 '땅'으로만 기억될 곳이 아니다. 만주는 광복과 일제시대의 종료와 더불어 한국의 역사와 이별한 역사 속 유적지가 아니다. 그 곳은 아직도 한국과 맞닿아있는 '한국인'들의 삶의 터전이었으며 지금도 역시 한국인의 생활공간이다. 물론 우리는 한번도 실감하지 못했지만, 그곳엔 조선족이라는 한국인이 살아간다. 

 

 
조선족 이야기

우리는 지금 너무도 조선족을 쉽게 접할 수 있다. 200만 조선족중 40만이 한국에 취업해 있는 상태라니, 쉽게 접하기 싫어도 자연스레 식당에서건, 공장에서건, 연구소에서건 어디든 어색하지 않게 만날 수 있다. 이미 한국인에게 조선족은 너무도 일상적인 존재가 되어버렸다. 이것은 조선족이 자연스레 생활로 드러나는 영화들에서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영화 '댄서의 순정'이 가장 쉬운 예라 할 수 있다. '댄서의 순정'에서 문근영은 조선자치주 댄스우승자인 언니를 대신해 한국에 오게되고 박건형과 위장결혼을 하며 한국에서의 삶을 이어나가는 모습을 보여준다. 조선족이 한국에 들어오기 위해 위장결혼을 하는 모습은 지금은 많이 사라졌다고 해도 역시 우리에게는 뉴스나 기타 프로그램을 통해 익숙해진 생활의 모습이다. 조선족들은 그렇게 어느덧 한국사람들에게는 자연스러운 '이방인'이 되었다.

이방인. 우리는 조선족을 이방인으로 생각한다. 한국사람들에게 조선족은 저 멀리 베트남이나 중국인, 필리핀, 말레이시아 사람과 다름아니다. 우리는 조선족을 따로 조선족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조선족이나 다른 동남아에서 온 사람들이나 우리에게는 그저 이방인, 한국에 돈을 벌러온 사람들로 분류된다. 한국의 경제발전과 함께 몸을 쓰는 힘든 일, 중소기업의 공단에서 힘든 일을 한국사람 대신 하는 사람들. 이게 우리가 이방인에 대해 가진 생각의 전부다. 지금은 더욱 그 인식이 나빠졌다. 안산 등지에 대규모 외국인 집단 주거지들이 생기면서 그런 곳들은 자연스레 우범지대, 피해야 할 곳으로 생각하며, 실제로 외국노동자들의 사건사고가 심심치 않게 접해짐과 동시에, 가족을 위해 힘들게 타국에 와서 고생하는 사람들이라는 인식과 함께, 잠재적인 범죄자, 피해야 할 사람들이라는 부정적인 인식도 함께 생기고 있다. 조선족 역시 마찬가지다. 그나마 말이 통한다는 이유로 사람을 많이 대하는 식당 등에서 일을 하던 조선족들은 보이스피싱 등과 같은 문제들과 함께 그래도 조금이라도 피가 섞인 주제에 한국인들에게 더욱 못된 짓만 일삼는 사람들로 부정적 인식들만 쌓여가고 있다. 한국사람들에게 조선족은 타국사람들보다도 더 질이 안좋은 '이방인'이란 인식만이 강해지고 있다.

조선족은 어떤 사람들일까. 우리는 조선족을 현재의 모습으로만 기억한다. 식당에서 흔히 보는 사람들. 어눌한 북한식 한국말을 하는 사람들. 언제 우리에게 범죄를 저지를지 모르는 사람들, 아니면 우리가 실컷 부려먹어도 괜찮은, 한국 사람들은 하지 않는 일을 하는 낯선 사람들. 이게 2011년 한국 사람들이 조선족에 대해 가지고 있는 이미지의 총체다. 지금의 우리들은 조선족이 누구인지는 기억하지 않는다. 그저 지금 어떤 사람들인지만 기억한다. 그들의 할머니, 할아버지들이 우리와 같은 한국사람들이었다는 것을 기억하지 못한다. <만주의 아이들>에 재미난 부분이 있다. 바로 북한 사람들과 조선족 사람들의 비교부분이다. 북한 사람들은 남한에 가게되면 돈을 받는다. 정착자금을 주고 한국의 한 시민으로 살 수 있게 집을 주고 직장을 구할 수 있도록 취업 교육을 시켜준다. 그런데 조선족이 한국에 가기위해서는 그들은 의심받고, 빚을 지고 브로커에게 수만위안의 돈을 가져다 바친다. 그것도 여의치 않을 경우 이혼과 위장결혼을 한채 겨우겨우 한국에 필사의 노력으로 들어온다. 분명 그들이 비슷한 북한억양의 말을 쓰고 같은 생각을 하고 불과 수십키로 떨어진 곳에 살고 있지만, 그들의 국적에 따라서, 민족과는 아무런 상관없이 그들의 차이는 간극을 좁힐 수 없다. 이것이 우리가 조선족을 어떻게 생각하는지의 극명한 대비일 것이다.

그들이 왜 만주에 가게 되었는지, 그들은 스스로를 중국인으로 여기는지, 한국인으로 여기는지 생각하지 않는다. 그들의 할머니, 할아버지들이 일제시대의 폭정에 항거하기 위한, 이름 모를 수만, 수십만의 독립군이었는지는 생각하지 않는다. 조선족. 그들은 스스로를 단 한번도 중국인이라고 생각해본 적이 없었을 것이다. 물론 반세기가 넘는 시간이 흐르면서 실제 한국과는 동떨어진 생활 속에서 스스로를 한국 사람이라기보다는 중국인이라고 생각하는 젊은 조선족이 늘어나고 있는 것은 사실이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스스로를 한국인으로 생각한다. 조선족. 그들은 이방인이 아니라 한국인의 피를 이어받은, 단지 나고 자란 곳이 한국이 아닌 한국사람의 다른 이름이다. 

그런데 어느 순간 우리에게 조선족은 그저 한국말을 비슷하게 할 수 있는 '조선족'일 뿐이다.

 

  

아이들 이야기

우리는 누군가의 아들이고, 딸이었으며, 아버지이고, 어머니다.

그런 '낯선' 조선족들이 '친숙한' 한국에 취업을 하러 들어오기 시작했다. 약 20년 정도 흐른 시간동안 조선족자치구에는 많은 일들이 있었다. 200만의 조선족 중 40만이 한국에 들어와 있는 조선족의 생활은 어떤 모습일까. <만주의 아이들>은 이 20년이 흘러 이제는 서로 분리하기 힘든 조선족 자치구와 한국의 모습 중 한국의 모습이 아닌 조선자치구의 모습에 주목한 책이다. 특히 조선족 자치구의 모습 중에서 부모가 한국으로 흘러간 아이들의 삶을 다룬 책이다. 책은 우리가 지금까지 보아오지 못한 모습이상으로 잔혹하다. 우리는 지금까지 한번도 생각하지 않았다. 우리가 만날 수 있는 젊은 조선족들이 한 가정의 아들이고 딸이며, 가장이고 어머니일 것이란 사실을. 우리는 그들을 지금까지 피상화, 사물화 시켜버렸다. 물론 그것이 우리의 잘못은 아니다. 현대사회의 모든 사람들은 그들을 더이상 한 가정의 구성원보다는 회사의, 사회의 구성원으로 보는데 익숙해져버렸다. 그래서 우리는 조선족을 당연히 이 사회를 지탱하는, 조금 낮은 위치에서 일하는 유기체로 보았을 따름이다. 그러나 그들의 고향에는 그들만을 시커멓게 바라보는 그네들의 아들, 딸들이 있었다. 이 책은 그것을 한번 슬쩍 끄집어내어주는 책이다.

아이들은 힘겹다. 우리나이로 중학생 나이에 부모들이 한국에 나가는 건 그나마 양호한 편이었다. 어떤 아이들은 세살, 네살, 아직 부모의 정이 무엇인지조차 기억하지 못하는 나이에 부모 모두 한국을 떠난 아이들의 경우도 부지기수였다. 그래도, 그래도 그 아이들의 부모들이 한국에서 이혼하지 않고 아이들을 위해 열심히 일을 하고 아이들을 걱정하고 있다면 그것은 그것만으로 행운이었다. 한국에 나간 수 많은 엄마, 아빠들은 수십년간 느껴보지 못했던 자본주의와 자유의 물결 속에서 스스로를 퇴폐와 방종의 수렁으로 몸을 내던졌다. 남편과 부인이 각각 다른 살림을 차리는 순간 그들은 서서히 자신들의 아이들과 멀어지기 시작했다. 그렇게 '만주의 아이들'은 하나, 둘 버려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안타깝게도 우리가 그 아이들을 위해서 해줄 수 있는 것은 더더욱 아무것도 없다. 이 책 역시 마찬가지다. 작가는 그냥 그렇다고만 이야기한다. 그래서 우리가 어떻게 해야하는지는 말해주지 못한다. 그리고 이 것은 이 책의 한계가 아니다. 이 책은 이런 이야기가 있다, 우리가 접하는 조선족들은 한 가정의 아버지이고 어머니이었다 라는 사실을, 조선족 자치구에는 그들에게 버려지고 있는 아이들이 있다는 사실을 이렇게 알려주는 것만으로도 모든 한계는 허물어버렸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도 안타까움은 변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저 우리는 아무도 의도하지 않은 모든이의 불행앞에서 그저 안타까움을 표하는 수 밖에 없다. 이것이 지금 만주의 아이들이 처한 현실과 그것을 바꾸어줄 수 없는 우리의 현실이다.

그래도.

조금 희망은 있다. 우리는 미혜의 이야기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미혜의 부모님들은 함께 한국에 나와 살고 있다. 그 둘은 함께 나와 함께 사는 것만으로, 그래도 부부가 이혼하여 조선족 가정 자체가 박살나는 것만은 그래도 면할 가능성이 높다. 물론 부모가 모두 한국에 나와버린 바람에 미혜와 언니는 버림받은 듯이 어렵게 서로에게만 의지하며 살아가고 있지만, 그래도 미혜정도면 부모님의 머나먼 관심 속에서 그래도 다른 가정보다는 조금 희망을 느낄 수 있다. 그리고 미혜네 가정에서 조금 더 희망을 찾아낸 것은 미혜가 한국에 방문하여 부모님들의 실상을 보게 된 이후부터일 것이다. 미혜는 자신들의 부모가 한국에서 어떻게 생활하는지 꿈에도 몰랐을 것이다. 조선족 자치구에서 비록 미혜의 가족은 생활은 어려웠을지언정 그래도 잠하나는 마음껏, 대자로 뻗어서 잘 수 있었을게다. 그러나 드라마에서는 별천지와 같은 한국에서 미혜의 부모님은 셋이 누으면 돌아설 공간조차 희미한 공간에서 새우잠을 자며, 미래를, 미혜를 위해 살아가고 있었다. 물론 미혜 역시 자신의 부모님이 자신을 버리고 호의호식한다고 생각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을 실제로 보는 것은 엄청난 차이임은 우리 누구나 알고 있다. 미혜는 자신의 부모님이 고생하는 모습을 보며, 대견하게도 다시 한번 자신을 채찍질했을 것이다. 그리고 전보다 훨씬 부모에 대한 마음이 애틋해지고 살가워졌을 것이다. 이것이 가족이다. 사진으로만 접한 아빠에게 3일의 시간동안 살가운 말한마디 못한 것을 중국에 돌아와 내내 가슴아프게 생각했던 천륜. 이것이 가족만이, 가르침없이 표현할 수 있고, 표현될 수 밖에 없는 것이 부모와 자식간의 천륜일 것이다.

우리는 이런 케이스들을 앞으로 많이 만들어내야한다. 백년전 한국의 독립을 위해 싸웠던 자손들이 한국에 와서 어렵게 어렵게 일을 하고, 그들의 자식들은 한국이란 나라는 자신들의 부모를 뺏어간 나쁜 나라, 자신의 아빠,엄마를 나쁘게 변화시켜서 돌아오게 한 나쁜 나라, 아빠를 다치게 하고, 엄마를 병들게 만든 나라로 기억하게 하는 일은 없어야 한다. 이것은 백년전 그들이 우리 땅에서 그곳으로 갔던 한국인이라서만의 문제는 아니다. 우리네 TV프로그램을 보자. 얼마전 1박2일에서 외국인 노동자 특집과 함께 그들의 가족을 모두 한국에 초대해서 전국민에게 가족의 정을 다시 한번 느끼게 해준 일이 있었다. 이뿐 아니라 우리는 멀리 외국에서 한국으로 시집온 여자들의 가정을 찾아가기도 하고, 그들의 만남을 주선해주기도 한다. 모두 좋은 일이다. 그런데 나는 그 좋은 일에 조선족 가정이 있는 경우는 거의 보지 못했다. 우리가 조선족을 바라보는 시선은 기묘하다. 우리는 그들을 이방인이라 생각하면서도 다른 이방인과는 조금 다르게 생각한다. 마치 가까운 관계의 사람들에게 더욱 소홀히 대하는 것처럼, 같은 이방인임에도 우리는 다른 나라의 이방인을 더욱 멀리서 고생하는 불쌍한 이방인으로 생각한다. 생면부지의 사람들은 챙길지언정, 그보다 아주 조금 더 가까운 사람들을 우리는 당연히 소홀히 대한다. 남이 아니라고 생각해서일수도 있다. 그러나 남보다 잘해주지도 못하면서 남처럼 부려먹는 친척은, 더욱 모두를 잔인하게 한다. 우리도 조금씩 조선족을 새로이 대해야 한다. 그들이 우리와 같은 한민족이었다는 사실을 기억해내야한다. 그들의 현재 모습이 아닌, 그들이 어떻게 그곳에 자리를 잡고 그곳에서 살게 되었는지를 기억해야 한다. 남모르게 대한민국의 독립을 위해 싸우다 죽어간 사람들의 자손인 사람들을 기억해내야한다. 꼭 그것이 아닐지라도 그곳이 우리의 유적지가 아닌, 한국인의 생활의 터전으로 지속되고 있음을 기억해야한다. 그래서 그곳의 아이들이 더이상 한국을 부모를 뺏어간 나라로 기억하지 않도록, 자신의 부모들이 자신들을 위해 희망을 키우고 있는 곳으로 기억하게 해주어야 한다. 미혜의 경우처럼. 많은 방법이 있을 것이다. 미혜의 경우와 같이 자매결연 식의 도움도 있을 것이며, 조선족들이 근무하는 회사를 상대로 정부가 재정적 지원을 해주어서도 가능할 것이다. 또한 여러 시민사회단체들의 도움 역시 가능할 것이다. 아직 우리보다 빈곤과 질병의 늪에서 고통받는 사람들을 도와주는 사람들이, 이제 조선족의 아이들을 기억하면 된다. 

첫 발자국이 중요하다. <만주의 아이들>의 저자 역시 안타까워할 뿐이다. 그리고 취재하고 그 이야기를 이렇게 책으로 담아낼 뿐이다. 저자는 처음 머리말에서 이런 이야기를 전한다. "바람이 있다면 이 책이 한국에 머물고 있는 조선족 부모와 만주에 남은 아이들을 잇는 끈이 되었으면 하는 것이다." 이 책이 조선족 아이들의 문제에 대해 이 첫발자국을 남겼다는 것만으로도 이 책은 저자의 목표와 가치를 충분히 다하고 남았음이다. 우리가 만나는 조선족의 고향에는 그들만을 오매불망 기다리며 짹짹거리고 있는 아이들이 있다는 사실을, 우리가 한 번도 신경쓰지 않았던 그 사실을 우리는 이 책을 통해 처음으로 알게 되었다. 그것으로 이 책은 족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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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펭귄클래식 20
프리드리히 니체 지음, 레지날드 J. 홀링데일 서문, 홍성광 옮김 / 펭귄클래식코리아 / 200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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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라투스트라는 대체 어떻게 말했을까.

아마도. 역대 철학자들의 책 중에서 가장 익숙한 철학자의 책이라고 한다면, 그 책을 실제 읽었는지 안읽었는지를 떠나서, 읽어보려고 시도를 해본 가장 유명한 책이라고 한다면 단연 니체의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일 것이다. 나 역시 이번에 완독(어찌되었든 읽긴 다 읽었으니까!)하기 전까지 알아들을 수 없는 말들과 말투의 향연으로 역시나 10페이지를 채 넘지 못하고 좌절했던 적이 한 두 번이 아니었다. 누구나 알고 있는 너무도 유명한 철학자의 너무도 유명한 책. 그러나 그 요상한 말투와 이해할 수 없는 단어들의 범람으로 읽긴 읽었으되 무엇을 말하는지 제대로 이해하기 어려운 책. 어쩌면 그래서 더 유명할지도 모르는.

 

사실 이런 책의 서평을 쓰기란 여간 어려운 것이 아니다. 이미 너무도 많은 똑똑한 사람들이 이 책에 대해서 샅샅이 파헤치고 분석해놓았기 때문이다. 기실 그래서 이런 책에 대해서 내가 머라고 딱히 덧붙일 것은 없다. 이미 이 책에 나오는 중요한 개념들과 그것들의 철학사적 의미, 헤게모니의 변환과 그로 인해 연속적으로 터져나오는 프로이트와 마르크스 등에 대한 이야기까지. 우리는 이미 니체와 이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가 차지하는 그 의미와 위상에 대해 너무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책에 대해 내가 굳이 무언가를 덧붙이고자 하는 것은 그것만으로 만용일 뿐 아니라 쓸데없는 일이 될 것이다.

 

결국 나는 이 책에 대한 느낌과 펭귄클래식판에 대한 이야기를 할 수 밖에 없을 것 같다. 이 책을 읽기 전에 니체에 대해 조금 더 알아보려는 마음에 여러 인터넷 사이트들과 책들을 찾아보았다. 그리고 한가지 재미있는 점을 발견했다. 그것은 러셀의 서양철학사와 들뢰즈가 평한바가 너무도 극과 극을 달린다는 점이다. 물론 들뢰즈가 직접 쓴 책을 읽어본 것은 아니고 들뢰즈의 평에 많이 기댄 '철학과 굴뚝청소부'를 읽은 것이지만. 어찌되었든 현대철학사에서 쟁쟁한 위명을 날리고 있는 두명의 철학자가 니체를 바라보는 눈이 이렇게도 갈릴 줄이야. 어쩌면 그것이 니체의 매력이고 위상일 수도 있겠지만 말이다. 러셀은 니체를 상당히 과소평가한 느낌이다. 러셀의 서양철학사에서 니체는 그저 지나가는 철학자 중 하나일 뿐으로 아주 간략히 묘사된다. 하지만 굴뚝청소부에서는 니체를 계보학의 창시자로 칭하며 그 이후 철학사에 상당히 지대한 영향을 끼친 철학자로 평가한다. 어떤 것이 옳고 그른 것인지는 모른다. 하지만 지금 현재 우리의 무의식적 패러다임 속에서는 후자의 평가가 더욱 잘 나타나있지 하는 마음과 함께. 이런 극명한 호불호가 어쩌면 니체를 더욱 유명하게 만든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어찌되었든 이런 저런 니체에 대한 평가와 함께 니체에 대한 전문가 한사람을 알게 되었으니 바로 펭귄클래식판의 서문을 담당한 레지날드 홀링데일이다. 영미권에서 니체에 관한한 최고 권위자로 평가받았던 그가 바로 펭귄클래식판에서도 서문을 담당했다는 사실이 조금 반갑고 놀랍기도 하였다. 그의 서문은 <차라투스트라>의 실제 내용에 들어가기에 앞서 워밍업을 하기에 아주 적절한 형태를 띄고 있다. 그렇지만 반면에 각각의 내용에 대한 써머리를 하는 부분도 있기 때문에 온전히 <차라투스트라>를 스스로 이해해보고 싶은 독자라면 일단 다 읽고 다시 읽어보는 것이 좋을 듯 싶다. 그러나 대부분의 독자들의 경우, 즉 나와 같이 그냥 순전히 너무도 유명한 책을 한번 접해나보자는 식의 경우라면 일단 이 서문을 읽고 본 내용을 접하는 것이 상당히 도움이 될 듯 싶다. 물론 이 서문도 본문보다는 덜하지만 상당히 어렵긴 매한가지다.  

 

책을 읽으면서 니체에 대한 생각을 해보았다. 니체는 과연 자신을 무엇이라고 생각했을까? 하는 의문이 진하게 남았다. 그는 자신을 철학자라고 생각했을까? 나는 그가 스스로를 꼭 철학자라고 생각하지는 않았을 것 같다. 그는 비록 쇼펜하우어의 제자였고, 그를 박차고 나와 여러 책을 저술했지만 그는 자신을 철학자보다는 작가, 예술가로 알아주길 바랬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현대로 넘어오면서 술기의 영역에서 철학의 영역으로 점점 넘어오고 있는 예술사에서 니체또한 어쩌면 자신의 영감과 생각을 문학이라는 틀을 통해 자신을 드러내고 싶어했던, 예술가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 문학에 추상화가 있다면 꼭 이런 모양이지 않을까 싶은 그의 글쓰기를 보면서, 니체를 철학자라는 이름보다 작가,예술가라는 이름으로 불러보기 싶었던 소망. 또한 이것이 니체가 하고 싶은 말과도 관련이 있지 않을까 싶다. 니체가 진실로 하고 싶었던 말은 역시 아무도 알지 못한다. 그냥 적당히 이러한 것들을 말하고 싶었던 것이 아닐까? 추측하고 자신들이 평상시 가지고 있던 선입관과 잣대에 맞추어 니체를 쪼개고 다시 끼워맞춘다. 그것이 나쁘다는 것이 아니다. 니체 스스로가 그것을 바랐던 것은 아닐까.. 생각이 든다는 것이니까. 니체는 그저 자신의 영감을, 위버멘시와 영원회귀와 힘에의 의지와 같은 관념어를 섞어서, 그냥 타오르는 대로 그렇게 두었던 것은 아닐지.

그래서 더더욱 니체는 자신이 예술가라고 생각했을것만 같은, 역시나 내가 생각하는 니체의 하고자 하는, 아니 그냥 했던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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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파트의 주목 신간을 본 페이퍼에 먼 댓글로 달아주세요.

 

 표지에 상당히 신경을 쓰는 나로서는 표지부터 끌리지 않을 수 없었던 소설. 비록 제목의 글자체와 표지가 어울리지 않아 아깝지만 말이다. 

 살인마의 아들로 살아온 주인공의 아버지가 사형집행 소식으로 다시금 날아들었다. 그리고 살인마의 아들은 죽을 뻔한 사람들을 구조한다. 이것만으로 충분히 기대감을 들게하는 소설이다. 

 

 

 

 

 사실 표지와 제목부터 그다지 맘에 들지 않아 넘겼던 소설이다.  

 아직은 생소한 터키작가들 가운데 그나마 이름이라도 한번 들어본 몇 안되는 작가. 그가 썼다는 것을 알게 되니 표지와 제목이 다시 한 번 다가온다.  

 일단 웃고나서 혁명. 일단 읽고나서 생각해보자 

 

 

 

  

최악의 비극에 직면한 인간에게도 구원의 순간은 찾아오는가? 

제목과 표지, 주제까지 모든게 완벽해보이는 소설에서 우리는 내용에서마저 완벽함을 발견할 수 있을까? 

 

 

 

 

 

 추리소설, 형사물을 그다지 좋아하지는 않는 나로서는 선뜻 주목하기 쉽지 않은 소설이었지만, 그래도 그토록 많은 분들이 이 소설을 기다리고 주목하는 것에는 이유가 있을 것이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 이것으로 주목해보고 싶게 만드는 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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