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과 왕국 - 북한산성이 전하는 스물여섯 가지 한국사 이야기
조윤민 지음, 경기문화재단 북한산성문화사업팀 엮음 / 주류성 / 201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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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도 광주에 살 때는 남한산성에 자주 올랐습니다.
특히 남한산성을 세계문화유산 등재를 위한 경기도 블로거 모집을 인연으로 경기도 쇼셜락커 활동도 하게 되었지요.
1년 전 의정부로 이사 오며 북한산 둘레길을 걸으며 북한산성에 올라 보아야겠다 마음먹었답니다.
남한산성은 아침 일찍 시작하면 하루에 한 바퀴 순성할 수 있어 북한산성도 만만히 보았지요.
북한산성 대서문을 지나 가장 짧은 코스인 북문 서암문으로 돌아오는 코스를 올랐는데 정말 죽는 줄 알았습니다.
북문까지도 경사가 가파른데 원효봉을 넘을 때는 바로 옆 절벽이라 눈앞이 아득했답니다.
그래서 북한산성에 대해 공부를 해야겠다는 생각에 도서관에서 책을 빌려 왔습니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의 참화를 수습한 조선은 18세기를 전후해 안정기에 들어간다.
붕당 세력 간의 권력 다툼은 더 치열해지고, 비대해진 신권은 왕권을 위협한다.
숙종 36년(1710년) 10월, 조정은 북한산성의 축성을 놓고 격론에 휩싸인다.
축성 논쟁의 발단은 청나라 해역에 출몰한 대규모 해적 무리가 조선으로 향했다는 정보와 함께 조선 연해 지방의 방어에 유의하라는 문서가 도착했다. 병자호란 이후 조선은 성곽 축성과 군비확장을 청나라의 승인이 있어야만 움직일 수 있었는데 마침 좋은 빌미가 되었다. 1711년 2월 숙종은 마침내 북한산성 축성을 결정했다. 성곽 공사는 4월에 시작되어 10월에 마무리되었다. 
산성의 둘레는 약 13km, 16개의 성문과 동서남북 사방에 대문을 두었다. 무기와 군량미를 보관하는 8개의 창고를 짓고,
식수와 용수로 사용할 우물을 99개소와 저수지 26개소를 조성했다. 그 외 누각은 3개, 교량이 7개였다. 
산성 내 임금이 행차할 때 거처할 행궁은 1711년 8월에 공사를 시작해 다음 해 5월에 조성을 완료했다. 
그 외에 11개 사찰을 중건했으며, 2곳의 암자를 새로 지었다. 
산성의 관리와 방어를 위해 1100여 명의 인력을 배치하고 승영을 마련해 380여 명의 승병을 두었다. 

산과 산을 잇는 13km의 대규모 산성을 단 6개월 만에 완성했다. 비슷한 규모의 남한산성은 2년이 걸렸다.
무엇이 이렇게 단시일에 축성을 마무리하게 했을까?
숙종은 군영을 중심으로 축성 인력을 조직했다. 그리고 전문가 조직을 기용하여 업무를 조직 단위로 배정하였다.
또한 빈민 구휼정책의 일환으로 급료를 지급하며 모집한 모군을 동원하였다.
또한 성곽의 재원인 화강암이 주위에 쉽게 구할 수 있는 장점도 있었다.

숙종은 북한산성을 축성하며 도성 방위체제를 강화하여 오군영을 두었다.
오군영 중  훈련도감, 어영청, 금위영은 수도를 직접 방어하는 중앙 군영이고, 총융청, 수어청은 수도 외곽 지역의 방어를 담당했다. 북한산성의 축성은 유사시 국왕이 더 이상 피난 갈 필요가 없어졌음을 의미한다.
이렇게 수도 방위의 핵심인 북한산성은 영조와 정조대를 지나며 중요성이 높아갔다.
하지만 철종 이후 외척들이 정치를 주도하며 국정이 문란해졌다.

흥선대원군 이후 개혁의 기치를 들었지만 임오군란과 갑신정변을 야기했다. 갑오개혁은 북한산성의 마지막 날을 앞당겼다. 
갑오개혁이 추진되면서 북한산성 관리 기구인 경리청을 없애고 더불어 승군 제도도 폐지한다.
일본의 병탄 야욕이 노골화되던 1904년, 북한산성 중흥사에 원인모를 화재가 발생해 사찰 건물이 거의 소실된다.
1905년 일제는 의병 활동을 막는다는 구실로 북한산성을 수색하고, '일본군 헌병분견소'를 설치한다.
외적을 물리치려 쌓은 성이 외적을 품고 외적을 보호하게 되는 굴욕의 시간이 더욱 깊어갔다. 
옛 성터에 성곽을 다시 쌓은 지 200녀 년 만의 몰락이었다.
3년 뒤 고종이 강제 퇴위 당하고 군대까지 해산된다. 
2년 뒤인 1909년엔 북한산성 행궁의 사고에 보관된 서적과 왕실 물품을 도성 내로 옮긴다. 
1910년 일제는 조선을 강제 병탄하며 조선의 500년 역사의 종말을 고한다. 

성곽은 단순히 군사시설이 아닌 나라의 흥망성쇠와 밀접한 관련이 있습니다.
태평성대를 위해 구축한 성곽이 나라의 위급한 상황을 버텨내지 못한 안타까움이 남는 북한산성입니다.
북한산성과 행궁은 무수한 이야기를 책 속에 담아냈습니다.
문화재로서의 의미보다는 한 번 더 찾아가 보는 것이 책 내용을 더 마음 깊이 이해될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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