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권 백제 - 이야기로 만나는 백제 역사 문화 기행
충청남도역사문화연구원 지음 / 로도스 / 2013년 9월
평점 :
절판


우리 역사에 약 7백여 년간 존재한 나라, '백제'
백제의 문화유산만이 7백여 년간 존재했던 백제의 이름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신라의 경우 삼국유사나 삼국사기 등과 같은 역사 문헌이 남아있지만,
당나라와 신라에 패한 백제의 역사 책은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백제에 대한 고대의 기록 및 유적을 통해 남아 있는 백제의 자취를 더듬어가며 그 역사와 문화를 복원하는 일이 숙제로 남아 있습니다.

백제의 시조 온조왕은 고구려로부터 이동해 와서 한강 하류지역에 정착합니다.
당시 온조가 세운 나라의 이름은 십제(十濟). 
10명의 신화가 보좌했다 해서 붙여진 국호입니다. 
당시 마한은 54개 국으로 분할되어 있었는데 천안 일대를 기반으로 한 목지국(木支國) 중심의 연맹체제였습니다. 당시 십제는 목지국 왕이 100리의 땅을 할애해 주어 나라를 세울 수 있었습니다. 
십제는 위례 지역의 풍부한 생산력을 기반으로 마침내 한강 하류 지역의 미추홀(인천)에 자리한 비류 집단과 지역 연맹체를 형성하며 나라의 이름을 백제(百濟)로 고치며 지역의 소국을 하나씩 병합하여 고대국가로 성장하였습니다.

백제는 남쪽의 마한 연맹체의 맹주국인 목지국에 대한 병합을 추진하여 8대 고이왕 또는 13대 근초고왕 대에 병합을 완성하였습니다.
고이왕 이후 비류왕과 근초고왕 대까지 영토 확장을 위한 정복활동을 전개합니다.
313~314년에 낙랑군과 대방군이 고구려에 의해 축출됨에 따라 백제와 고구려는 국경을 접하게 되어 긴장관계가 조성됩니다.
고구려는 미천왕 대부터 요동 지역 진출을 시도했지만 전연의 방해로 뜻을 이루지 못했고, 고국원왕 대에는 전연 모용황의 공격으로 왕도가 함락되고 왕모가 포로로 잡혀가고 왕부의 묘가 파헤쳐 지는 수모를 겪습니다. 이때부터 고구려가 시선을 돌려 남진정책을 추진하자 4세기 후반 결국 군사적 충돌이 일어났습니다.
369년 고구려 고국원왕이 친히 군대를 거느리고 '치양(황해도 연백)'을 공격해 오자 백제는 태자 근구수를 보내 이를 막았습니다.
2년 뒤인 371년에 고구려가 다시 공격해 오자 근초고왕은 겨울임에도 친히 3만의 정예 군사를 거느리고 전투에 참가했습니다.
선봉에 선 태자 근구수가 고구려군을 격퇴하고 평양성까지 진격해 들어가 고국원왕을 죽이는 대승을 거두었습니다.
또 15대 침류왕 원년에 마라난타에 의해 동진으로부터 전해진 불교는 국가의 지배이념으로 작용하였습니다.

21대 개로왕은 초기 왕권의 전제화를 추진하는 과정에서 동생 문주를 상좌평에 임명하는 등 측근 중심의 지배체제를 구축하며, 전제군주로서의 위상을 대외적으로 과시하고자 인력과 물자를 동원하여 성을 쌓고 궁실과 누각을 조영하는 등 대규모 토목사업을 벌였습니다. 이를 위해 지방 제지 세력들을 중앙에 편제시켜 그들의 인적 물적 기반을 중앙으로 끌어들였습니다.
하지만 이런 대규모 토목공사로 인해 한성과 가까운 지역의 귀족세력의 반발과 한강 이북 지역의 재지 세력의 이탈로 인해 고구려 광개토왕의 한강 이북 지역에 대한 공략 때 58성 700촌을 상실했고, 475년 9월 장수왕의 남침으로 단기간에 한성이 함락당하며 개로왕이 사망하는 국난을 당하게 됩니다. 22대 문주왕은 결국 한성을 포기하고 수도를 웅진으로 천도합니다. 문주왕이 지방의 대호족인 백씨 세력의 재지기반이 아닌 금강 이남의 협소한 웅진에 도읍을 정한 이유는 먼저 고구려의 위협에서 벗아나는 동시에 귀족세력들로부터의 정치적 간섭을 최소화하고자 했을 것입니다.

25대 무령왕은 출생부터가 베일에 싸여 있습니다.
무령왕릉의 지석의 기록에 의하면 523년 5월 7일 62세로 생을 마감했다고 합니다.
이를 통해 역산하면 왕이 태어난 해는 461년이 되며 개로왕 7년임을 알 수 있습니다.
무령왕은 501년 왕위에 올라 523년까지 23년 동안 백제를 통치한 것인데, 그가 왕위에 오를 때 나이가 마흔 살입니다.
무령왕의 탄생과 관련된 '일본서기' 설화가 기록되어 있지만 사실 여부는 확인할 수 없습니다.
무령왕이 즉위하면서 백씨 세력의 반란을 진압하고 고구려를 공략하기 시작하여 513년에는 위천에서 고구려군을 대파합니다.
이때 빼앗겼던 한강 유역의 일부를 회복하고 가야 지역에 진출했으며 섬진강 상류인 임실부터 하류인 하동까지 일대를 확보합니다.
또한 귀족세력의 중요한 기반이었던 좌평제를 개혁하여 22부제를 실시하였습니다. 

26대 성왕은 중앙과 지방의 행정 및 군사조직을 재정비하였고 538년에 도읍을 웅진에서 사비로 옮기고 국호를 남부여로 바꿉니다.
성왕은 사비 천도를 통해 왕실이 부여를 계승하고 있음을 강조하며 다른 귀족세력과의 차별화를 시도하였고, 대성 8족 이외의 새로운 정치세력을 중용하여 친왕 세력으로 삼았습니다. 그리고 왕도 5부제의 시행을 통해 귀족세력의 거주 지역을 통제함으로써 왕권 강화를 도모했으며, 농경지 확보를 통해 경제적 부를 확보했습니다. 이를 통해 성왕은 대외 전쟁에서 태자인 창(27대 위덕왕)에게 군사 지휘권을 위임하며 왕권을 강화합니다. 
6세기 무령왕과 성왕이라는 중흥 군주를 맞이한 백제는 한성 함락 이후 약화되었던 왕권과 국력을 회복하는데 성공합니다. 
이를 바탕으로 남쪽으로는 가야 제국으로 진출하는 한편 북쪽으로는 고구려에 빼앗긴 한강유역의 땅을 회복하고자 신라와 가야와 손잡고 고구려를 공격합니다. 당시 고구려는 안장왕의 피살과 야원왕 대 외척 간의 내분, 밖으로는 돌궐의 공격으로 세력이 약화되었습니다. 성왕은 이러한 상황을 틈타 고구려를 공격하여 한강 하류의 6군을 되찾았습니다. 
나제동맹으로 한강 상류의 죽령 이북 고현 이남의 10군을 점령했던 신라의 진흥왕이 553년 백제의 한강 하류 지역을 공격하여 점령한 뒤 그곳에 신주(新州)를 설치했습니다. 이로 인해 성왕이 왕권 강화와 북방 진출 정책이 모두 실패로 돌아갑니다. 
백제는 가야 및 왜의 원군과 함께 태자 창을 총사령관으로 하여 신라의 관문인 관산성을 공격합니다. 
관산성은 추풍령과 아산만 및 남양만에 이르는 교통로에 위치하며 관산성을 얻을 경우 자연스럽게 한강유역을 되찾기에도 유리한 성이었습니다. 양 군의 대치가 길어지자 성왕은 백제군의 사기를 높이기 위해 보병과 기병 50명을 이끌고 전장으로 향하던 중 신라의 삼년산군의 비장 고간 도도의 매복작전에 걸려 죽게 됩니다. 이 소식에 백제군은 사기가 떨어지며 좌평 4명과 군사 29,600명을 잃게 됩니다.

무왕은 백제 제30대 왕으로 41년간 재위하였습니다. 재위 2년 만에 사망한 법왕(29대)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올랐지만 무왕의 출생과 관련해서는 여러 가지 기록이 전해집니다. 먼저 '삼국사기' 백제본기에 따르면 "이름은 장이고 법왕의 아들이다"라고 기록되어 있지만 "삼국유사"에는 그 어머니는 과부가 되어 서울 남쪽 못 가에 집을 짓고 살았는데, 못 속의 용과 관계하여 장을 낳았다. 어릴 때 이름은 서동으로 마를 캐다가 파는 것으로 생업을 삼았다"라는 다른 내용이 전합니다. 
이렇게 서로 상반되는 내용이 전하는데 일반적으로 용에 비정되는 인물은 왕을 상징하며, 인물됨이 비범하고 호걸다움을 갖춘 사람을 비유하였습니다. 즉 무왕은 법왕의 아들은 아니지만 아버지가 지룡으로 상징될 수 있을 정도의 유력한 왕족이었을 것입니다.
27대 위덕왕의 직계로는 아좌와 망왕자가 있었습니다. '일본서기' 민달기 12년 시세조에 태좌평과 왕자에 대한 기록이 확인되는데, 이때는 위덕왕 30년(583)으로 '망왕자' 사망 이후 6년 뒤가 되므로 망왕자 이외에 다른 왕자가 존재 가능성이 추정됩니다. 그런데 아좌는 위덕왕 44년(597) 왜에 사신으로 파견되어 갑니다. 한편 망왕자의 존재는 왕흥사지에서 출토된 사리기의 명문을 통해 확인되는데 "정유년 2월 15일 백제 창왕(위덕왕)이 죽은 왕자(망왕자)를 위해 사찰을 세우는데, 본래 사리가 2매였으나 묻을 때 신기하게 3매가 되었다"라는 기록이 나옵니다. 30세에 왕위에 오른 위덕왕이 53세가 되었을 때 왕자가 사망한 것이며, 이때 사망한 왕자가 장자라고 한다면 30세를 전후한 나이로 추정할 수 있습니다. 만약 이 망왕자가 20세 전후한 나이에 혼인하였다고 가정할 경우 사망 시에 자식이 10살 정도로 추정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법왕의 짧은 재위가 정치적인 이유에 의한 것이었다면 그 배후는 그가 사망한 이후 왕위를 승계할 수 있는 유력한 인물과 밀접한 관련이 있을 것입니다. 이때 후계구도를 주도한 세력은 위덕왕 직계였을 것이며, 그 중심에 '망왕자'의 적장자였던 무왕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 근거는 위덕왕이 죽은 왕자를 위해 원찰을 세웠다는 왕흥사와 관련하여 무왕 때 왕흥사가 완공되었으며 무왕이 자주 왕흥사에 행차하여 무왕의 아버지가 '망왕자'임을 증명하고 있습니다.
무왕은 위덕왕의 직계 손자였음에도 불구하고 왕도에서 살지 못하고 익산으로 피신한 것은 위덕왕의 동생 '혜' 때문입니다.
혜는 성왕 사후 이듬해 왜에 파견되었는데 부왕의 원수를 갚고자 556년 정월, 좋은 무기와 여러 마리 말과 아울러 왜군 1천 명의 호위를 받으며 귀국하였습니다. 위덕왕이 왕위에 오른 지 1년 남짓 지난 시기이므로 일정 기간 혜가 정사를 위임받아 국정을 운영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이후 위덕왕 사후에 정국의 주도권을 장악한 혜왕 세력에 의해 정치적으로 핍박을 받아 구명을 위해 익산으로 도피했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백제의 마지막 31대 왕 의장왕.
'삼국사기' 백제본기 의자왕조 서문에는 의자왕이 용맹스럽고 담이 크며 결단성이 있었고 어버이를 효도로 섬기고 형제와 우애롭게 지내 당시에 '해동증자'라 불리며 성군의 소리를 들었다고 소개되어 있습니다. 의자왕은 즉위하면서 중국 당 태종에 의해 '주국대방군왕백제왕'으로 책봉되어 정통성을 확보한 뒤, 안으로는 정권의 안정에 힘쓰고 밖으로는 중국과의 교류를 지속하는 한편, 신라에 대해서는 강경책을 구사하는 동시에 일본이나 고구려와는 화친을 도모하는 등 다각적인 외교정책을 추진해나갔습니다.
642년 8월 신라의 대야성을 공략하여 성주로 있던 김춘추의 사위 김품석과 그 아내를 죽이며 적대적 관계로 나아갑니다. 이렇게 신라에 대한 공격을 효과적으로 수행하기 위해 643년 적대 관계로 유지해오던 고구려와 화친하는 쪽으로 외교 방향을 전환하였습니다. 이에 신라는 점차 당에 대한 의존도가 높아질 수밖에 없었고, 백제는 당의 간섭에서 벗어나 독자노선을 걷기 시작한다. 
이후 의자왕은 반발하는 관료들을 정계에서 퇴진시키고, 자신이 선택한 정치노선에 찬성하는 자들을 중심으로 새로운 집권체제를 구축하여 내부 기반을 다진 뒤, 655년 2월 태자궁을 화려하게 수리하고 망해정을 궁전 남쪽에 세우며 왕권 강화합니다. 또, 657년 1월 왕서자 41명을 좌평으로 삼고 식읍을 주어 대내외적인 정치를 개혁하였습니다.
659년 4월 백제가 신라를 공격하자 당 고종이 신라의 구원병 요청을 받아들여 660년 3월 당의 장군 소정방 등에게 13만군을 거느리고 가 백제를 정벌하도록 함으로써 중국은 한반도 문제에 군사적으로 직접 개입하게 되었습니다. 백제군은 기벌포와 황산벌에서 나당 연합군을 막지 못한 채 7월 13일 밤 사비도성이 공격을 받게 되었다. 이에 의자왕은 사비성을 떠나 북방의 웅진성으로 향하였지만 18일 웅진 방령이었던 예식의 배반으로 사비도성으로 사로잡혀왔다. 8월 2일 의자왕은 왕자 및 군신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신라왕 김춘추와 소정방, 김유신 등에게 술을 따라 올리는 굴욕적인 항복식을 거행하였으며 의자왕을 비롯한 왕자, 귀족 등 88명과 백성 12,807명이 당나라로 끌려가게 되었다. 

그런데 의자왕은 삼천궁녀를 두었을까?
낙화암이란 명칭은 고려 말기에 활동한 이곡이 부여를 회고하며 쓴 시에 나타난다. 
그러나 삼천궁녀의 내용은 고려 시대의 기록에서는 찾아 볼 수 없다. 
'삼천'이란 숫자가 들어간 첫 기록은 조선시대인 15세기 후기에 김흔이 낙화암에 대해 쓴 시에서 '삼천궁녀들이 모래에 몸을 맡기니'라는 표현이 처음 나온다. 결국 삼천궁녀라는 표현은 조선시대 시적인 문장에서 처음으로 볼 수 있다.
중국의 문학작품에서 '많다'라는 의미의 극적인 표현을 위해 '삼천'이란 용어가 자주 등장한다.
예를 들면 당나라 시성 이백의 시에서 '날아 흐르며 삼천 척을 곧바로 내려가네'라는 표현은 높은 곳에서 떨어지는 폭포의 모습을 나타낸 것이며, 이익의 시에 보이는 '강 위에 삼천 마리의 기러기'는 수많은 기러기의 시적인 표현인 것이다.
당시 사비성 인구가 5만 명 정도로 추산되고, 또 조선시대에도 궁녀의 수가 최대 600명 정도였다는 것으로 미루어볼 때 사비성에 3천 명의 궁녀가 있었다는 것은 믿기 어렵다. 또한 당시 기록 가운데 삼천궁녀에 대해 언급한 부분은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다.
이러한 슬픈 역사적 사실을 조선시대 문인들이 시의 소재로 삼으면서 '삼천'이라는 중국의 문학적인 표현 수법을 동원하여 극적인 효과를 꾀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한 권의 책을 통해 잊힌 백제의 역사를 한눈에 볼 수 있어 좋았습니다.
차주 백제와 부여를 여행을 위한 기초 지식을 한꺼번에 공부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