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의 시장 내고향 서울 5
서울특별시사편찬위원회 엮음 / 서울특별시시사편찬위원회 / 2007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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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장'은 우리말로 '저자' 라고 하며 백제 때 가요인 정읍사에도 "져재"라는 표현이 등장한다.우리나라 사서에는 주로 시(市), 시사(市肆), 장(場), 장시(場市) 등으로 기록되어 있으며, 시장(市場)이라는용어는 별로 사용하지 않았다.
고조선시대에 팔조금법에도 곡물을 화폐와 같은 교환수단으로 삼고 돈을 사용한 기록을 통해 우리나라 시장의 기원을 찾을 수 있다. 
서울에 시장이 본격적으로 형성된 시기는 조선시대이다.
조선시대 수도였던 서울에는 태종 때부터 국가에서 실립한 시전(市廛)이 종로거리와 남대문로에 길게 늘어서 있었다.
시장에서는 국가권력에 대항한 모반자와 강간범, 살인범 등을 처형해 국가의 치안과 왕권 강화를 위한 처벌이 이루어졌다.
또한 가뭄이 들면 시장을 옮기는 '이시(移市)'의 풍속이 있었는데 가뭄에 시장을 옮기는 것은
화려한 시장을 닫고 근신하는 모습을 보임으로써 비를 기원하는 기우의 한 방법이었다.

 시전상인은 시전 행랑 이외에 자신의 집에서 상품을 판매하기도 하였다. 이를 재가(在家)라 하였는데,
종이를 판매하는 경우에는 지전재가, 면포를  판매하는 경우는 면포전재가라 하였다.
시전 상인은 각 칸에서 독자적으로 영업하였으나 대체로 1평 남짓한 가게에 앉아 장사를 하였는데,
전방 문 바로 앞에 붙어 있는 퇴청에 방석을 깔고 앉아 손님을 기다렸다.
이처럼 상인은 퇴청에 앉아 있고 상품 진열이 눈에 잘 띄지 않아, 물건을 사로온 소비자가 시전 거리에서 헤메는 경우가 많았다.
이에 상점 앞에 서 있다가 손님을 끌어들여 물건을 사게하고 주인에게 돈을 받는 '여리꾼'이 거래에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여리꿈은 시전 상인이 작정한 값보다 높은 가격으로 물건을 팔아주고 그 차액을 챙겼는데 그 차액을 바로 여리(餘利)라 하였다.

 개항이후 외국 상인들이 본격적으로 개점하며 기존 상인들과의 마찰이 시작되었지만, 막강한 자본력을 바탕으로한 이들과의 기세싸움은 패할 수 밖에 없었다. 그나마 민족 자본을 지키자는 명분으로 버텨보지만 조선의 힘으로는 어림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이들과의 경쟁을 통해 시장의 다양화와 전문성을 증가하는 계기가 되어 우리나라 근대화 촉진에 밑거름이 되었다.

 해방과 전쟁 후에는 슈퍼마켓, 대형 할인점, 편의점, 외국계 창고형 마트 등 다양한 유통 체널이 생겨나면서 기존의 전통시장과 백화점의 아성이 무너지기 시작했다.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는 동대문시장과 남대문시장은 이제는 살아 남기 위해 색다른 재화의 판로에 눈을 돌리기 시작하여 패션과 의류 전문 시장으로 탈바꿈하였다. 이러한 개혁이 없는 기존의 시장은 앞으로 살아남기가 어려운 시대가 되었다.

이 책을 통해 조선시대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다양하게 변화되는 시장의 역사와 다양한 유통 체널을 보며
우리나라의 발전상과 시장의 변화를 재미있게 파악할 수 있어 좋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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