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으로 화해하기 - 관계가 내 마음 같지 않을 때, 그림이 건네는 말
김지연 지음 / 미술문화 / 202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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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미로 그림을 배운 적이 있는데, 부족한 실력이지만 그림을 주변에 종종 선물했다. 와인을 좋아하는 친구는 홈 바 테이블에 와인그림을 얹어놓고 와인과 함께 즐겼고, 반려견이 무지개다리를 건너 펫로스 증후군에 시달리는 친구는 강아지그림을 보며 그리움을 달랬다고 한다. 활짝 핀 해바라기그림으로 하루를 웃으며 시작 한다는 친척의 말은 나에게까지 웃음 바이러스를 전파해주었다. 내 만족감은 차치하더라도 그림이 주는 순기능은 실로 대단하다.

 

도슨트로 활동하고 있는 작가는 예술작품들 속에 스며있는 예술가들의 삶과 작품이 전해 주는 일상의 지혜를 전해준다. 제목처럼 예술작품의 감상을 통해 나 자신과, 타인과, 사회와 원만히 화해하고 마인드 컨트롤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책이다. 작품 속에 녹아 있는 예술가들의 일생과 당대의 시대상과 사회 문화 풍습 등을 자세히 풀어내어 흥미로운 이야기를 들려주는 이 책을 통해 익숙한 작가들의 몰랐던 이야기들을 포함해 낯선 예술가들의 생애와 작품들도 새롭게 접해볼 수 있었다. 작품 설명을 읽다 보면 어느새 내 삶과 비교하고 거기에서 본 받을 점과 지나간 날들의 회상, 미래의 지향점들을 찾는 나를 발견할 수 있다. 자존감이 떨어졌을 때나 주변인들과의 관계 회복이 필요할 때, 풍요로운 사색의 시간이 필요할 때, 한 폭의 그림을 통해 혹은 하나의 예술 작품을 통해 기분을 전환하거나 힐링을 얻고 싶을 때 읽으면 좋은 책이다. 그림은 언제나 지친 마음을 가만히 어루만져주는 힘을 발휘하기 때문이다.

 

인상 깊었던 부분 몇 가지를 소개해본다.

 

이 책의 표지를 장식하고 있는 그림은 <첫 구름>이라는 제목의 윌리엄 퀼러 오차드슨의 작품이다. 오차드슨은 당시 사회에 만연했던 상류층의 사랑이 없는 불행한 결혼을 삼연작을 통해 묘사했다. <첫 구름>에서 방을 벗어나려고 하는 아내의 뒷모습, 그리고 남편의 찌푸린 표정과 자세를 보면 방 안에 떠도는 냉기를 감지할 수 있다. 그 다음 작인 <정략결혼>은 부부의 사이에 놓인 긴 테이블과 따분한 아내의 표정을 통해 그들의 심리적 거리를 나타낸다. 마지막 작품 <정략결혼, 그 후>에 그려진 불이 꺼진 벽난로 앞에 홀로 앉은 남편의 모습은 불행한 결혼 생활의 끝을 보여준다.

 

p.181

결혼을 고민하는 사람이 있다면 오차드슨의 작품을 추천하고 싶다. 결혼이 주는 행복에 대한 이야기는 너무나 많으나, 불행한 결혼의 실체가 어떤 것인지를 알려주는 일은 상대적으로 적기 때문이다.

 

현대 조각의 아버지라 불리는 오귀스트 로댕의 작품은 전세계인들의 대부분이 익히 알고 있는 <생각하는 사람> 이외에도 프랑스의 소도시인 칼레시의 의뢰를 받아 제작한 청동 조각상 <칼레의 시민들>이 있는데 이는 14세기 칼레시의 영웅들을 주제로 했다. ‘백 년 전쟁을 치르던 시기에 잉글랜드군이 작은 도시 칼레시를 점령하는데 11개월이나 걸린 것에 대해 분노한 잉글랜드의 왕 에드워드 3세는 화가 나 모든 칼레 시민의 목숨을 살려 주는 대신 시민 여섯 명을 대표로 죽이겠노라고 선언했다. 작품 속의 사람들은 모두가 주저하던 그 때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치겠다고 자진해서 나선 여섯 명이다. 그들은 시민들의 영웅이었지만 같은 인간이기에 실상은 두려움, 슬픔, 비참함, 불안, 절망, 고통, 후회 등 수많은 감정들이 들었을 것이다. 로댕은 이들을 영웅적으로 표현하기 보다는 인간적이고 현실적으로 표현함으로써 더 묵직한 감동을 담아냈다.

 

p.179

로댕의 작품 속 비범한 일을 해내는 평범한 영웅들의 인간적인 모습은 흐려져 가는 희생의 가치를 다시 한 번 생각하게끔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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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문열 세계명작산책 2 - 죽음의 미학, 개정판 이문열 세계명작산책 2
레프 니콜라예비치 톨스토이 외 지음, 이문열 엮음, 김석희 외 옮김 / 무블출판사 / 202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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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을 빛나게 하는 죽음의 미학

 

소설가 이문열이 선정한 세계 명작의 모음집이다. 그 중에서도 <죽음의 미학>편에서는 죽음과 관련된 아홉 편의 작품을 다루었다. 서로 다른 나라에서 명성을 떨친 작가들의 제각기 다른 가치관에서 탄생한 작품들이기에 죽음을 이야기하는 방향과 스타일, 글의 분위기는 모두 다르지만 글 속에 묻어난 죽음이라는 운명을 향한 인간의 감정의 색깔은 거의 비슷하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레프 톨스토이는 이반 일리치의 죽음에서 죽음을 앞둔 자의 심경과 불안한 감정을 실감나게 그려냈다. 본의 아니게 아내와 가족들에게까지 괜한 신경질을 부리게 되는 이반 일리치의 감정의 움직임을 통해 죽음이란 인간을 얼마나 외롭고 두렵게 하는 대상인지 엿볼 수 있다. 그의 죽음 이후 권력과 세력의 변화 대해 민감하게 대응하려고 신경을 곧추세우는 주변 동료들의 심정과 나의 죽음이 아니라는 것에 대한 안도감 등 제3자들의 감정들도 지나치게 솔직하면서 공감이 간다.

스티븐 크레인의 구명정과 잭 런던의 불 지피기같은 경우, 무자비한 자연재해에 의한 죽음이 묘사된다. 특히 거친 파도 위에서 난파선 구명정에 몸을 의지한 채 무사히 살아나기 위해 발버둥치는 구명정의 등장인물들은 생명의 위협이 느껴지는 순간 날카롭고 비겁해지는 인간 본성을 세밀하게 표현한다. 죽음과 맞서는 상황에서 보여지는 인간의 저항과 용기, 인내심은 죽음의 미학을 연출하기에 충분하다.

샤를 루이 필리프는 앨리스에서 특이한 죽음의 양상을 보여준다. 어린 앨리스는 사랑을 독차지하려는 독점욕 때문에 굶어서 죽음에 이른다.

마지막에 실린 바이올렛 헌트의 마차라는 작품은 삶에 대한 애착 없이 덤덤하게 죽음을 논하는 자들의 염세주의적 이야기를 독특한 형식으로 진행시켰다.

여러 작품들 중 단연 헤르만 헤세의 크눌프가 돋보인다. 그는 크눌프라는 캐릭터의 여정을 통해 죽음에 대한 성찰 뿐만 아니라 인생의 기쁨, 회한, 사랑, 우정 등 삶의 요소들을 종합적으로 담아낸다. 이문열의 설명처럼 죽음을 앞둔 크눌프가 신과 더불어 삶을 문답하는 구절 또한 강렬한 인상을 준다.

 

무엇보다 이 책이 좋았던 이유는 저명한 세계의 작가들이 한 자리에 모여 같은 주제를 가지고 문학 발표회를 연 듯, 한 권의 책을 통해 세계문학의 장을 경험했다는 것과 우리나라의 문학계에서는 이미 중추역할을 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이문열의 작품해설을 곁들였다는 점이다. 사실 이름난 작가라고 해도 여기에 실린 작품 중에서는 처음 접해보는 작품들이 많았는데 광활한 문학의 세계에서 핵심작들을 엄선해 읽은 것 같아서 의미 있고 뜻깊은 시간이었다.

 

이반 일리치의 죽음 / 레프 톨스토이

p.120-121

그날 먹은 말린 자두를 생각하고 있노라면 그의 마음은 어느덧 어린 시절로 돌아가 쭈글쭈글 주름이 잡힌 프랑스 자두와 생과일의 독특한 풍미, 단단한 씨를 핥으면 저절로 흘러나오던 군침이 생각났다. 그리고 그 새콤달콤한 맛의 기억과 함께, 유모와 형제와 장난감 등 그 시절의 추억들이 차례로 떠올랐다.

 

구명정 / 스티븐 크레인

p.148

선장, 기관사, 요리사 그리고 신문사 특파원이 그 구성원이었으며, 그들은 서로에게 일상의 사례에서 확인할 수 있는 것보다 한결 더 강한, 별나다고 할 만큼 강한 결속력으로 다져진 친구가 되어 있었다.

 

크눌프 / 헤르만 헤세

p.343

어찌 알겠나? 우리는 늘 죽음이란 하나의 잠이라고 말하지 않아? 잠자면서 때로는 말을 하거나 노래를 부르기도 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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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이 사랑한 천재들 - 백석·윤동주·박수근·이병철·정주영
조성관 지음 / 열대림 / 202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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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파리, 뉴욕, 도쿄, 프라하 등 세계 각지의 도시들을 주무대로 이름을 떨친 소위 천재들에 대한 이야기를 그 해당 도시에 대한 소개와 더불어 들려준 도시가 사랑한 천재들시리즈 중 하나다. 저자에 의하면 이번 서울편은 그동안의 시리즈와 마찬가지로 공동체와 사회에 대한 업적에 따르되, 문인, 화가, 뮤지션, 기업인, 건축인 등 분야별로 후보군을 선발해 놓고 자문 그룹의 조언을 받으며 후보군을 좁혀 나갔다고 한다. 그렇게 해서 최종적으로 선발된 천재들이 이 책의 주인공인 백석, 윤동주, 박수근, 이병철, 정주영이다. ‘서울이 사랑한 천재들에 이 다섯 인물이 선정된 데 대해서는 조금의 이견도 없다. 서울을 넘어 대한민국 전체가 사랑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역사 속에 반짝이는 이름을 남긴 이들이 우리나라의 수도 서울에서 어떤 활약을 펼쳤을지 기대감에 천천히 책을 읽어 나갔다.

 

p.13

서울에 태를 묻지는 않았지만 이들이 만개한 곳은 서울이었다. 이들이 세상에 왔다 가고 나서 서울과 대한민국은 전혀 다른 세상으로 바뀌었다. 21세기를 사는 우리들은 1910년대생인 다섯 사람에게 큰 빚을 지고 있다.

 

<백석, 시인들의 시인> 

백석이 태어난 곳은 평안북도 정주군인데, 오산소학교와 오산고보를 나온 뒤 집안 사정으로 더 이상 진학하지 못한 채 고향에 머무르다 <조선일보> 후원 장학생으로 선발돼 일본의 아오야마가쿠인 대학의 영어사범과에서 우수한 성적과 영어회화 실력을 쌓을 수 있었다. 대학 졸업 후에는 조선일보 방응모 사장의 제안으로 조선일보사에 입사해 기자 생활을 했다. 교정부에서 그는 영문 번역과 교정, 원고 청탁을 담당하며 번역 일도 병행 했다. 기자 시절에 하숙을 했던 곳이 통의동이다. 현재는 디자인 사무실이 들어서 있다는 백석의 옛 하숙집은 좁은 골목길에 고즈넉이 자리하고 있는 한옥집이라는 것을 책에 삽입된 사진으로 확인 할 수 있다.

백석의 연인이었던 자야 김영한은 천억 원의 재물도 백석의 시 한 줄만도 못하다라는 말을 남겼다. 성북동에서 고급 요정 대원각을 운영했던 자야가 대원각을 시주하여 사찰로 재탄생된 곳이 길상사다. 지하철 4호선 한성대입구역에서 가깝다. 경내에는 백석의 시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와 함께 공덕비가 놓여 있는데, 시 속의 나타샤가 되고픈 자야의 소망이 담긴 유언도 함께 게재되어 있다.

 p.30-31

서울에 연고가 없던 백석은 통의동 7-6의 한옥 문간방에 하숙을 정했다. 경복궁 영추문 바로 앞이다. 통의동에서 조선일보사까지 양복을 멋지게 빼입고 걸어가는 모습은 여러 문인의 눈에 띄곤 했다. …… 영추문을 정면으로 보고 몇 발자국 걸으면 효자로 7길이 나온다. 자동차 한 대가 아슬아슬하게 지나갈 수 있는 골목길로 들어선다. 순간, 고즈넉한 한옥 골목이 나타난다.

 

<윤동주, 슬픈 자화상>

 한국인이 가장 사랑하는 시인이라고 해도 모자람이 없다. 윤동주는 일제강점기의 고초로 27세에 짧은 생을 마감했는데, 그의 생애에서 가장 눈부시게 자유로웠던 기간은 연희전문 문과를 다닌 4년이었다. 지금의 연세대가 그의 주요 활동지였고 2학년으로 진급하면서는 기숙사를 나와 아현동과 서소문에서 하숙을 했다. 재목의 짧은 생을 안타까워한 여러 지인들에 의해 그는 서울 곳곳에 자취를 새길 수 있게 되었고 지금은 많은 사람들의 뇌리에 가장 사랑하는 시인으로 각인되었다. 연세대학교 교정에는 윤동주 시비가 건립되었고 그가 수시로 거닐었을 길을 따라가면 윤동주 기념관도 만나볼 수 있다. 

p. 92

그때 윤동주의 발걸음을 지켜보았을 건물들이 과연 몇이나 남아 있을까. 그는 한국은행을 흘끗 보면서 을지로를 향해 걸었다. 그는 명동으로 이어지는 오른쪽 골목에 자리잡은 차이나타운을 보았다. …… 그는 을지로를 건넜다. 조금 더 가면 청계천 광교 다리가 나온다. 오른편에 서양식 건물이 반갑게 서 있다. 우리은행 지점 건물이다. 현관 위에 주식회사 조선상업은행종로지점이라는 현판이 보인다. 구한말인 1909년에 지어진, 우리나라 은행 최초의 근대식 건물이다.

 

<박수근, 나목의 화가> 

남루할지언정 비루하지는 않다.’ 이 대목에서 남루와 비루의 의미를 가만히 곱씹어 보았다. 박수근이 화폭 위에 표현했던 그림체의 느낌이면서 우리가 그의 그림을 좋아하는 이유다. 박수근은 첫눈에 반한 김복순과 결혼식을 올린 뒤 밥벌이를 위해 평양으로 가 평안남도 도청의 서기 자리에서 5년간 경제적인 안정기를 보낸다. 해방 이후 금성 본가로 가 미술교사로 지내던 중 625전쟁이 터지자 공산 치하에서 벗어나기 위해 목숨을 걸고 월남을 결심하는데, 일가족의 안전을 위해 홀로 떠나야 했다. 아내 김복순 역시 아이들을 데리고 월남하여 천신만고 끝에 남편과 사전에 약속했던 창신동의 오빠 집에서 극적으로 재회한다. 서울에서 일자리를 찾아야 했던 박수근은 현재 신세계백화점 본점에 있던 미8PX 초상화 가게에서 미군의 사진을 받아 스카프에 초상화를 그리는 일을 하며 생계를 유지한다. 생전 마지막 순간을 보낸 전농동 집터에 현재 들어선 아파트에는 기념물이 설치돼 있고, 화가의 고향 강원도 양구로 가면 박수근 미술관에서 그와 좀 더 깊은 교감을 나눌 수 있다. 

p.163

버스정류장에서 내려 동묘 담장을 왼쪽에 끼고 동대문 방향으로 걸어간다. 지하철 동묘앞역과 교차로가 나타난다. 청계천 방향으로 난 대로가 지봉로이고, 이 도로의 별칭이 박수근길이다.

 

<이병철, 끝없는 도전> 

경상남도 의령에서 나고 자란 이병철은 열한 살에 아버지를 졸라 서울로 가는 유학길에 오른다. 현 종로구청 뒤편에 있는 수송보통학교에서 4학년을 마치고 중동중학으로 편입을 했다. 보통학교 과정을 일 년에 마무리 짓는 속성과의 특성 상 학업에 열중할 수밖에 없었다. 이후 와세다 대학에 들어가 정치경제학을 공부하다 건강 악화로 고향으로 돌아와 노름과 방탕한 생활을 한다. 하지만 이미 세 아이의 아버지였던 스물 여섯의 그는 각성하고 사업을 결심한다. 정미소와 운수업 등 첫 사업에서 성공과 실패를 동시에 맛 본 이병철은 재출발을 위해 서울, 평양, 베이징, 상하이 등을 시장조사 한 뒤 청과물, 건어물 등 잡화 무역을 시작하는데, 대구에 문을 연 삼성상회가 바로 삼성그룹의 모체다.

장충동의 신라 호텔 역시 여러 선진국에서 경험한 최고가 축적된 결과물이다. 미술품 수집에도 일가견이 있던 그는 40년 가까이 수집한 미술품들을 용인 에버랜드 호암미술관에 전시했다. 부친의 안목을 그대로 이어받은 이건희 회장은 부인 홍라희 씨와 함께 수집한 미술품들을 전시한 한남동의 삼성미술관 리움을 운영하고 있다. 

p.243

장충체육관을 마주보고 있는 고지대가 장충동 부촌이다. 장충교회 건물 사이로 언덕길이 나 있다. 오르막길을 오르면 주한 터키 대사관이 나온다. 그 앞에 경찰초소가 서 있다. 그 앞길이 동호로 20나길이다. …… 화강암 돌담에 붉은 벽돌을 띠처럼 두른 저택이 눈길을 끈다. …… 닫힌 철문 사이로 내부를 들여다보았다. 오래된 2층 양옥이 보였다. 마당은 넓었지만 양옥은 생각보다 작고 낡아 보였다. 그가 1953년부터 살았으니 적어도 67년 된 집이다.

 

<정주영, 맨손의 신화>

강원도 통천에서 태어난 정주영은 서당 훈장이었던 조부의 영향으로 소학교와 상급학교에서 공부를 잘 하는 아이였지만 어려웠던 집안 형편으로 소년 농부 신세를 면할 길이 없었다. 동네 이장댁에 배달되던 신문으로 바깥 세상을 접하며 농사 일에 회의를 느낀 정주영은 아버지가 소를 판 돈 70원을 훔쳐 서울로 올라간다. 덕수궁 옆의 경성실천부기학원에 다니던 그를 아버지가 다시 설득하여 집으로 데려갔지만, 결국 가난에서 벗어나고 싶은 욕구를 이기지 못하고 재차 가출을 하고야 만다. 막노동 일을 전전하던 그가 우연히 들어간 쌀가게 주인으로부터 성실성을 인정받고 가게를 인수 받아 운영까지 하게 되었지만 일본의 쌀배급제 탓에 조선의 쌀가게는 모두 문을 닫아야 했다. 다시 고향으로 돌아와 동네 처자와 혼인을 하고 신혼살림을 차린 곳이 혜화동 낙산 산동네다. 지독한 절약 습관으로 돈을 모아 최초로 집을 장만한 곳은 서대문구 현저동이다. 가정을 꾸리고 나서 아현동 자동차 수리공장에서 아도서비스를 시작한 것이 현대의 시초다.

 p.300

아산의 숨결이 남아 있는 청운동 자택으로 가보자. 그가 1958년부터 43년간 살았던 집이다. 인왕산과 맞붙어 있는, 인간 정주영의 희로애락이 고스란히 저장된 공간, 자하문로 근처에서 지나는 사람 누구든 붙잡고 물어봐도 대부분 상세하게 설명해준다.

 

지금은 별이 되었지만 생전 다양한 분야에서 우리나라의 역사와 한국 경제를 빛나게 해 준 다섯 명의 위인들, 그들이 살아온 일생의 역사와 대한민국 수도 서울에 아스라이 스며있는 그들의 숨결을 느낄 수 있었고, 각 인물에 대한 자세한 이야기를 읽다 보니 전혀 알지 못했던 역사적 사실들도 새롭게 접할 수 있어 신선한 문화 체험을 할 수 있는 기회가 돼 준 고마운 책이다.

이를테면 화가 이중섭이 백석의 오산보고 후배이며, 그의 화풍이 만들어지도록 영감을 받은 작품이 사슴이라는 것, 내가 가장 예뻤을 때가 대표작인 일본의 여성 시인 이바라키 노리코가 쓴 윤동주에 대하여라는 산문이 일본 교과서에 실리면서 윤동주가 일본 사회에서 유명세를 탔다는 것, 박수근과 소설가 박완서와의 특별한 인연, 교보생명 창업자 신용호가 이병철의 평생 골프 친구였다는 것, 정주영이 외국에서 지폐에 그려진 거북선 그림을 보여주고 조선소 건설 차관을 얻어냈다는 전설 같은 이야기 등 놀라우면서도 운명적인 사실들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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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은 왜 죽는가 - 사람이 죽어야 할 16가지 이유
이효범 지음 / 렛츠북 / 202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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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을 진지하게 성찰하면 결국 나의 삶과 조우하게 된다.

p.241

 

 

사람은 누구나 죽는다. 나는 언제, 어떻게 죽게 될까.

사후(死後) 세계는 존재할까.

죽음이 두렵다.

죽음에 대해 위와 같은 생각은 종종 해 보았지만 라는 물음은 던져본 적이 없는 것 같다. ‘사람은 왜 죽을까?’ 그냥 삶과 죽음은 함께 하는 존재, 즉 태어났다면 반드시 죽는다는 자연의 순리에 딱히 반문을 해 보지 않았던 것 같다. 그것이 당연한 이치인줄 알면서도 죽음은 생()과는 반대적 의미이기에 늘 두렵고 피하고 싶고 불안하고 받아들이기 힘든 일이다. 그래서 우리의 뇌가 무의식적으로 죽음에 대해 거부하고 깊게 생각하기를 꺼려할 수도 있다.

 

이 책은 그런 죽음에 대해 동서양의 학문들과 죽음의 개념, 원인, 과정, 방법 등 여러 가지 연구들을 통한 총체적인 관련 이론들을 체계적으로 정리해 알려준다.

 

책에서는 죽음에 대해 16가지의 논점에서 정의를 내리고 있는데, 그 중 제8장의 <죽음은 삶의 고통에서 벗어나게 해주는 해방이다> 내용이 인상 깊다. 사람이 죽음을 두려워하는 이유가 궁극적으로는 고통스러워서일 텐데 그와 반대로 생각해보면 죽음 이후에는 아무런 감각도 지각능력도 없어지게 되므로 사람이 죽으면 살면서 겪는 고통, 번뇌, 아픔 등은 사라지게 된다. 스스로 삶을 포기하는 자살이 옳은 일은 아니지만 자살을 생각하는 사람들의 심리는 아마도 그런 이유에서 해방감을 찾으려는 것이 아닐까. 같은 맥락에서 11<죽음은 본능이다>라는 명제도 쉽게 이해가 된다. 삶의 본능에 대비되는 죽음의 본능은 정신분석학적 진리일 뿐만 아니라 근본적으로는 생명체에 고유한 본질적 진리라는 것이다.

 

그렇다고 죽음을 마냥 미화시킨것만은 아니다. 13장에서 설명해주듯 삶은 사실상 죽음에 의해 절멸되기 때문에 죽음은 삶의 박탈이다. 14장의 노자와 장자의 사상을 기초로 하는 도교에서는 죽음을 흉한 것, 악한 것으로 여기기 때문에 장생불사하여 신선이 되기를 바라는 학문이기도 하다. 영국의 철학자 버나드 윌리엄스도 죽음은 소망의 실현 가능성을 저지하기 때문에 범주적 소망이 있는 한 죽음은 악()이라는 이론을 펼친다.

 

문명이 진화하고 과학이 발달하면서 최근에는 죽음에 가까워지는 노화를 지연시키는 신약 개발이나 기계화가 활발히 이루어지고 있고, 유전과학과 나노과학 그리고 로봇 기술의 발달로 호모 에볼루티스라는 새로운 인류 탄생의 예측까지 나오고 있는데, 과연 현재 인간인 호모 사피엔스는 지구상에서 언제까지 지금 이대로의 모습으로 존재할 수 있겠냐는 연구도 많은 시사점을 남긴다.

 

이 책을 통해 죽음에 대해 좀 더 깊이 성찰해보는 시간을 갖게 되었다. 나는 아직까지는 가까운 곳에서 죽음을 마주한 적이 없다. 내가 사랑하는 주변인이 죽었다면 그 상실감과 슬픔이 얼마나 클지 막연하게 상상해봤을 뿐이다. 그러나 누군가 죽음은 삶의 과정이라 말했듯 죽음을 회피하고 두려워하기보다 잘 살기위한 하나의 수단으로 인식해야겠다라고 생각한 것이 이 책에서 얻은 가장 큰 교훈이다. 이 책은 삶이 있으면 죽음도 존재한다는 자연적인 논리와 삶이 죽음에 이르게 되는 생물학적 근거를 여러 가지 학문들을 통해 알려 주었으며 죽음이라는 현상 자체를 자연스럽게 받아들일 수 있게 도와주었고 왜 죽는가어떻게 살 것인가라는 물음에 대한 답을 찾는 방법을 알려준 인생의 가이드 책이라 평가 내리고 싶다. 죽음은 선일 수도, 악일 수도 있고 끝일 수도, 또다른 시작일 수도 있지만, 결론적으로 죽음은 삶과 필연의 관계이며, 서두에 적었듯 죽음의 성찰을 통해 삶을 더 값지게 할 수 있다는 점은 분명히 알게 해 주었다.

 

p.25

인간에게 진정한 불행은 죽음 때문에 오는 것이 아니다. 죽음을 어떻게 생각하는가가 그 사람의 삶의 질을 결정하고, 죽음을 어떻게 대하는가가 그 사람의 인생의 업적을 결정한다.

 

p.177

을 쓴 프란츠 카프카도 삶이 귀한 이유는 언젠가 끝나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죽음은 우리에게 유한함을 일깨워 줌으로써 살아 있다는 것의 소중함과 나와 관계를 맺고 있는 사람들에 대한 감사함을 배우게 해준다. 그래서 삶에는 반드시 죽음이 필요하다. 죽음이 있어야 비로소 삶이 완성된다는 것이다.

 

p.242

우리의 지상에서의 삶은 비록 짧지만, 의미가 있고 존엄하다. 죽음을 진지하게 사유하게 되면 죽음을 아는 것이 아니라, 나의 삶이 유일무이하고 관심을 가지고 살펴볼 만한 가치가 있음을 자각하게 된다.

 

p.301

생명공학의 최종 지점은 노후와 죽음의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다. 신과 인간의 근본적인 차이는 영생과 죽음이기 때문에 인간이 생명공학의 힘으로 죽음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면, 진정으로 인간이 신의 반열에 오른다고 할 수 있다.

 

p.308

이 새로운 인간은 늙지 않고 죽지 않는 로봇과 인간의 복합 형태의 존재이다. 그러면 자연적 진화는 끝나고 현재 인간인 호모 사피엔스는 공룡처럼 지구상에서 사라질 것이다. 그러면 지구에는 기존 질서와는 다른 새로운 생명체와 문명이 시작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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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금희 지음 / 문학동네 / 202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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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가 만든 인물은 이영초롱이라는 예쁜 이름을 가지고 이번에는 판사가 됐다. 영초롱은 아름다운 제주를 오가며 복자와의 소통과 교류를 이어 간다. 소설 속 등장인물을 통해 원하는 캐릭터를 마음껏 설정하고 원하는 장소를 어디든 그릴 수 있다는 것. 소설가가 누릴 수 있는 특권이기도 하지만 하나의 작품과 캐릭터를 완성하려면 그만큼 완벽에 가까워야 한다. 제주도 문화와 생소하지만 유창한 그곳의 방언들, 법조계라는 특정한 직업의 세계까지 종이 위에 완벽히 펼쳐졌다. 그래서 나는 이 소설을 읽으며 소설가들을 향한 존경심이 한층 더 높아졌고 <경애의 마음>과는 다른 느낌으로 한 번 더 김금희 작가의 매력을 찾게 됐다.

 

제주에서도 본섬과 떨어진 작은 섬에서 유년시절을 보낸 영초롱을 어딘가 위축돼 있고 늘 주눅든 표정의 말수 없는 소녀로 만든 건 부모와 떨어져 어쩔 수 없이 그 낯선 곳으로 전학을 가야만 했던 서글픈 현실이었지도 모른다. 그런 영초롱에게 처음으로 마음을 열고 먼저 다가와 준 친구가 복자였다. 이 책을 읽으며 나는 두 번의 잔잔한 충격을 받았는데 그 중 하나가 , ,” 하며 저돌적으로 접근했던 아이가 이름을 묻자 고복자.” 라며 자신의 존재를 밝히는 장면이다. 복자라는 인물은 어린 소녀지만 당차고 과하게 씩씩한 면이 있었기 때문에 그녀의 등장은 반전이나 중대한 사건이 아님에도 제법 놀라웠던 것 같다. 계단에서 넘어져 발목을 다친 영초롱을 할망당으로 데려가 억지로 자기고백과 안녕을 빌도록 만든 것도 복자였다. 그의식이 진짜였든 미신이었든 두 소녀는 무탈하게 어른이 됐고, 법대에 진학해 판사가 된 영초롱이 다시 제주로 돌아왔을 때 복자와 재회하게 된다. 나에게 또 한 번의 충격은 잊고 지냈던 복자의 존재가 동창생 고오세의 입을 통해 !’ 하고 환기되었던 장면.

 

p.78

그리고 이건 이판사 것. 저기 친구가 챙겨주라고 하더라고요. 동창이 팔아요. 거저나 마찬가지로 싸게 샀습니다.”

나는 요리를 거의 안 하지만 일단 고맙다며 받아들었다. 그리고 누가 아직 여기 사느냐고, 내가 아는 앤가? 하고 무심코 말을 흘렸다. 그러자 고오세는 나를 멀거니 바라보다가 , 복자라고 알죠?”라고 물었다. 복자가 돌아와서 산다고.

 

복자와 서먹한 사이로 헤어지게 된 계기는 어린 나이었기에 오해로 잘못 번질 수 있는 사소한 일 때문이었지만 성인이 된 그들은 제법 굵직한 사건으로 얽히게 된다. 복자는 간호사들의 산재 관련 사건으로 법적 싸움을 진행 중이었고 영초롱은 그 사건을 주도적으로 맡을지에 대한 기로에 서게 되는데, 복자가 영초롱에게 한 간절한 부탁때문인지는 몰라도 1심에서의 승소소식을 오세에게 전해 듣는다는 것과 영초롱이 훗날 프랑스에서 한국의 복자에게 편지를 쓴다는 것을 통해 영초롱은 끝내 재판에 개입하지 않았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p.217

그래, 그렇겠지. 그러니까 빠져줘. 내 평생의 부탁이야.”

나는 나중에야 복자가 그렇게 말한 것은 어쩌면 재판에서 지게 될 것이 두려워서라는 생각을 했다. 그러면 나를 영원히 원망하게 될 테니까. 나라는 애를 영영 그런 악연으로 묶어 기억 속에 가둬야 할 테니까. 하지만 초저녁에 외로이 뜬 별처럼 들판에 홀로 서 있는 그 오름에서 나는 말할 수 없는 배반감과 분노, 내가 맡고 있는 이 직분을 함부로 하는 침해 같은 것을 느꼈다. 그건 내가 베풀고 싶었던 선의와 우정이 깊으면 깊을수록 더 세게 나를 찌르는 것이었다.

 

어차피 소설은 소설일 뿐이지만 <복자에게>에서는 주요 인물들 사이에 제주 4·3 사건, 제주 의료원 산재 사건, 강경대군 구타치사사건 등 역사 속에 뼈저린 기억으로 남은 몇몇 사건들을 군데군데 넣어 지금의 현실과 조우하도록 설계했다. 소설의 줄거리 속에서 마주하는 그 기억들은 마침내 수많은 일상의 사색으로 감정선을 이끈다. 영초롱과 복자, 그리고 그들을 둘러싼 주변인물들의 긴밀한 관계들 속 세밀한 감정묘사를 실감나게 그린 이 소설, <복자에게>는 반복되는 일상 중에 한 번쯤은 따뜻하게 마음을 어루만지고 싶을 때, ‘장차 복을 많이 받을 사람이라는 뜻을 가진 복자라는 친근한 이름이 문득 떠오를 때, 이따금씩 책장에서 꺼내어지는 그런 책이 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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