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이 사랑한 천재들 - 백석·윤동주·박수근·이병철·정주영
조성관 지음 / 열대림 / 202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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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파리, 뉴욕, 도쿄, 프라하 등 세계 각지의 도시들을 주무대로 이름을 떨친 소위 천재들에 대한 이야기를 그 해당 도시에 대한 소개와 더불어 들려준 도시가 사랑한 천재들시리즈 중 하나다. 저자에 의하면 이번 서울편은 그동안의 시리즈와 마찬가지로 공동체와 사회에 대한 업적에 따르되, 문인, 화가, 뮤지션, 기업인, 건축인 등 분야별로 후보군을 선발해 놓고 자문 그룹의 조언을 받으며 후보군을 좁혀 나갔다고 한다. 그렇게 해서 최종적으로 선발된 천재들이 이 책의 주인공인 백석, 윤동주, 박수근, 이병철, 정주영이다. ‘서울이 사랑한 천재들에 이 다섯 인물이 선정된 데 대해서는 조금의 이견도 없다. 서울을 넘어 대한민국 전체가 사랑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역사 속에 반짝이는 이름을 남긴 이들이 우리나라의 수도 서울에서 어떤 활약을 펼쳤을지 기대감에 천천히 책을 읽어 나갔다.

 

p.13

서울에 태를 묻지는 않았지만 이들이 만개한 곳은 서울이었다. 이들이 세상에 왔다 가고 나서 서울과 대한민국은 전혀 다른 세상으로 바뀌었다. 21세기를 사는 우리들은 1910년대생인 다섯 사람에게 큰 빚을 지고 있다.

 

<백석, 시인들의 시인> 

백석이 태어난 곳은 평안북도 정주군인데, 오산소학교와 오산고보를 나온 뒤 집안 사정으로 더 이상 진학하지 못한 채 고향에 머무르다 <조선일보> 후원 장학생으로 선발돼 일본의 아오야마가쿠인 대학의 영어사범과에서 우수한 성적과 영어회화 실력을 쌓을 수 있었다. 대학 졸업 후에는 조선일보 방응모 사장의 제안으로 조선일보사에 입사해 기자 생활을 했다. 교정부에서 그는 영문 번역과 교정, 원고 청탁을 담당하며 번역 일도 병행 했다. 기자 시절에 하숙을 했던 곳이 통의동이다. 현재는 디자인 사무실이 들어서 있다는 백석의 옛 하숙집은 좁은 골목길에 고즈넉이 자리하고 있는 한옥집이라는 것을 책에 삽입된 사진으로 확인 할 수 있다.

백석의 연인이었던 자야 김영한은 천억 원의 재물도 백석의 시 한 줄만도 못하다라는 말을 남겼다. 성북동에서 고급 요정 대원각을 운영했던 자야가 대원각을 시주하여 사찰로 재탄생된 곳이 길상사다. 지하철 4호선 한성대입구역에서 가깝다. 경내에는 백석의 시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와 함께 공덕비가 놓여 있는데, 시 속의 나타샤가 되고픈 자야의 소망이 담긴 유언도 함께 게재되어 있다.

 p.30-31

서울에 연고가 없던 백석은 통의동 7-6의 한옥 문간방에 하숙을 정했다. 경복궁 영추문 바로 앞이다. 통의동에서 조선일보사까지 양복을 멋지게 빼입고 걸어가는 모습은 여러 문인의 눈에 띄곤 했다. …… 영추문을 정면으로 보고 몇 발자국 걸으면 효자로 7길이 나온다. 자동차 한 대가 아슬아슬하게 지나갈 수 있는 골목길로 들어선다. 순간, 고즈넉한 한옥 골목이 나타난다.

 

<윤동주, 슬픈 자화상>

 한국인이 가장 사랑하는 시인이라고 해도 모자람이 없다. 윤동주는 일제강점기의 고초로 27세에 짧은 생을 마감했는데, 그의 생애에서 가장 눈부시게 자유로웠던 기간은 연희전문 문과를 다닌 4년이었다. 지금의 연세대가 그의 주요 활동지였고 2학년으로 진급하면서는 기숙사를 나와 아현동과 서소문에서 하숙을 했다. 재목의 짧은 생을 안타까워한 여러 지인들에 의해 그는 서울 곳곳에 자취를 새길 수 있게 되었고 지금은 많은 사람들의 뇌리에 가장 사랑하는 시인으로 각인되었다. 연세대학교 교정에는 윤동주 시비가 건립되었고 그가 수시로 거닐었을 길을 따라가면 윤동주 기념관도 만나볼 수 있다. 

p. 92

그때 윤동주의 발걸음을 지켜보았을 건물들이 과연 몇이나 남아 있을까. 그는 한국은행을 흘끗 보면서 을지로를 향해 걸었다. 그는 명동으로 이어지는 오른쪽 골목에 자리잡은 차이나타운을 보았다. …… 그는 을지로를 건넜다. 조금 더 가면 청계천 광교 다리가 나온다. 오른편에 서양식 건물이 반갑게 서 있다. 우리은행 지점 건물이다. 현관 위에 주식회사 조선상업은행종로지점이라는 현판이 보인다. 구한말인 1909년에 지어진, 우리나라 은행 최초의 근대식 건물이다.

 

<박수근, 나목의 화가> 

남루할지언정 비루하지는 않다.’ 이 대목에서 남루와 비루의 의미를 가만히 곱씹어 보았다. 박수근이 화폭 위에 표현했던 그림체의 느낌이면서 우리가 그의 그림을 좋아하는 이유다. 박수근은 첫눈에 반한 김복순과 결혼식을 올린 뒤 밥벌이를 위해 평양으로 가 평안남도 도청의 서기 자리에서 5년간 경제적인 안정기를 보낸다. 해방 이후 금성 본가로 가 미술교사로 지내던 중 625전쟁이 터지자 공산 치하에서 벗어나기 위해 목숨을 걸고 월남을 결심하는데, 일가족의 안전을 위해 홀로 떠나야 했다. 아내 김복순 역시 아이들을 데리고 월남하여 천신만고 끝에 남편과 사전에 약속했던 창신동의 오빠 집에서 극적으로 재회한다. 서울에서 일자리를 찾아야 했던 박수근은 현재 신세계백화점 본점에 있던 미8PX 초상화 가게에서 미군의 사진을 받아 스카프에 초상화를 그리는 일을 하며 생계를 유지한다. 생전 마지막 순간을 보낸 전농동 집터에 현재 들어선 아파트에는 기념물이 설치돼 있고, 화가의 고향 강원도 양구로 가면 박수근 미술관에서 그와 좀 더 깊은 교감을 나눌 수 있다. 

p.163

버스정류장에서 내려 동묘 담장을 왼쪽에 끼고 동대문 방향으로 걸어간다. 지하철 동묘앞역과 교차로가 나타난다. 청계천 방향으로 난 대로가 지봉로이고, 이 도로의 별칭이 박수근길이다.

 

<이병철, 끝없는 도전> 

경상남도 의령에서 나고 자란 이병철은 열한 살에 아버지를 졸라 서울로 가는 유학길에 오른다. 현 종로구청 뒤편에 있는 수송보통학교에서 4학년을 마치고 중동중학으로 편입을 했다. 보통학교 과정을 일 년에 마무리 짓는 속성과의 특성 상 학업에 열중할 수밖에 없었다. 이후 와세다 대학에 들어가 정치경제학을 공부하다 건강 악화로 고향으로 돌아와 노름과 방탕한 생활을 한다. 하지만 이미 세 아이의 아버지였던 스물 여섯의 그는 각성하고 사업을 결심한다. 정미소와 운수업 등 첫 사업에서 성공과 실패를 동시에 맛 본 이병철은 재출발을 위해 서울, 평양, 베이징, 상하이 등을 시장조사 한 뒤 청과물, 건어물 등 잡화 무역을 시작하는데, 대구에 문을 연 삼성상회가 바로 삼성그룹의 모체다.

장충동의 신라 호텔 역시 여러 선진국에서 경험한 최고가 축적된 결과물이다. 미술품 수집에도 일가견이 있던 그는 40년 가까이 수집한 미술품들을 용인 에버랜드 호암미술관에 전시했다. 부친의 안목을 그대로 이어받은 이건희 회장은 부인 홍라희 씨와 함께 수집한 미술품들을 전시한 한남동의 삼성미술관 리움을 운영하고 있다. 

p.243

장충체육관을 마주보고 있는 고지대가 장충동 부촌이다. 장충교회 건물 사이로 언덕길이 나 있다. 오르막길을 오르면 주한 터키 대사관이 나온다. 그 앞에 경찰초소가 서 있다. 그 앞길이 동호로 20나길이다. …… 화강암 돌담에 붉은 벽돌을 띠처럼 두른 저택이 눈길을 끈다. …… 닫힌 철문 사이로 내부를 들여다보았다. 오래된 2층 양옥이 보였다. 마당은 넓었지만 양옥은 생각보다 작고 낡아 보였다. 그가 1953년부터 살았으니 적어도 67년 된 집이다.

 

<정주영, 맨손의 신화>

강원도 통천에서 태어난 정주영은 서당 훈장이었던 조부의 영향으로 소학교와 상급학교에서 공부를 잘 하는 아이였지만 어려웠던 집안 형편으로 소년 농부 신세를 면할 길이 없었다. 동네 이장댁에 배달되던 신문으로 바깥 세상을 접하며 농사 일에 회의를 느낀 정주영은 아버지가 소를 판 돈 70원을 훔쳐 서울로 올라간다. 덕수궁 옆의 경성실천부기학원에 다니던 그를 아버지가 다시 설득하여 집으로 데려갔지만, 결국 가난에서 벗어나고 싶은 욕구를 이기지 못하고 재차 가출을 하고야 만다. 막노동 일을 전전하던 그가 우연히 들어간 쌀가게 주인으로부터 성실성을 인정받고 가게를 인수 받아 운영까지 하게 되었지만 일본의 쌀배급제 탓에 조선의 쌀가게는 모두 문을 닫아야 했다. 다시 고향으로 돌아와 동네 처자와 혼인을 하고 신혼살림을 차린 곳이 혜화동 낙산 산동네다. 지독한 절약 습관으로 돈을 모아 최초로 집을 장만한 곳은 서대문구 현저동이다. 가정을 꾸리고 나서 아현동 자동차 수리공장에서 아도서비스를 시작한 것이 현대의 시초다.

 p.300

아산의 숨결이 남아 있는 청운동 자택으로 가보자. 그가 1958년부터 43년간 살았던 집이다. 인왕산과 맞붙어 있는, 인간 정주영의 희로애락이 고스란히 저장된 공간, 자하문로 근처에서 지나는 사람 누구든 붙잡고 물어봐도 대부분 상세하게 설명해준다.

 

지금은 별이 되었지만 생전 다양한 분야에서 우리나라의 역사와 한국 경제를 빛나게 해 준 다섯 명의 위인들, 그들이 살아온 일생의 역사와 대한민국 수도 서울에 아스라이 스며있는 그들의 숨결을 느낄 수 있었고, 각 인물에 대한 자세한 이야기를 읽다 보니 전혀 알지 못했던 역사적 사실들도 새롭게 접할 수 있어 신선한 문화 체험을 할 수 있는 기회가 돼 준 고마운 책이다.

이를테면 화가 이중섭이 백석의 오산보고 후배이며, 그의 화풍이 만들어지도록 영감을 받은 작품이 사슴이라는 것, 내가 가장 예뻤을 때가 대표작인 일본의 여성 시인 이바라키 노리코가 쓴 윤동주에 대하여라는 산문이 일본 교과서에 실리면서 윤동주가 일본 사회에서 유명세를 탔다는 것, 박수근과 소설가 박완서와의 특별한 인연, 교보생명 창업자 신용호가 이병철의 평생 골프 친구였다는 것, 정주영이 외국에서 지폐에 그려진 거북선 그림을 보여주고 조선소 건설 차관을 얻어냈다는 전설 같은 이야기 등 놀라우면서도 운명적인 사실들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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