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자에게
김금희 지음 / 문학동네 / 2020년 9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작가가 만든 인물은 이영초롱이라는 예쁜 이름을 가지고 이번에는 판사가 됐다. 영초롱은 아름다운 제주를 오가며 복자와의 소통과 교류를 이어 간다. 소설 속 등장인물을 통해 원하는 캐릭터를 마음껏 설정하고 원하는 장소를 어디든 그릴 수 있다는 것. 소설가가 누릴 수 있는 특권이기도 하지만 하나의 작품과 캐릭터를 완성하려면 그만큼 완벽에 가까워야 한다. 제주도 문화와 생소하지만 유창한 그곳의 방언들, 법조계라는 특정한 직업의 세계까지 종이 위에 완벽히 펼쳐졌다. 그래서 나는 이 소설을 읽으며 소설가들을 향한 존경심이 한층 더 높아졌고 <경애의 마음>과는 다른 느낌으로 한 번 더 김금희 작가의 매력을 찾게 됐다.

 

제주에서도 본섬과 떨어진 작은 섬에서 유년시절을 보낸 영초롱을 어딘가 위축돼 있고 늘 주눅든 표정의 말수 없는 소녀로 만든 건 부모와 떨어져 어쩔 수 없이 그 낯선 곳으로 전학을 가야만 했던 서글픈 현실이었지도 모른다. 그런 영초롱에게 처음으로 마음을 열고 먼저 다가와 준 친구가 복자였다. 이 책을 읽으며 나는 두 번의 잔잔한 충격을 받았는데 그 중 하나가 , ,” 하며 저돌적으로 접근했던 아이가 이름을 묻자 고복자.” 라며 자신의 존재를 밝히는 장면이다. 복자라는 인물은 어린 소녀지만 당차고 과하게 씩씩한 면이 있었기 때문에 그녀의 등장은 반전이나 중대한 사건이 아님에도 제법 놀라웠던 것 같다. 계단에서 넘어져 발목을 다친 영초롱을 할망당으로 데려가 억지로 자기고백과 안녕을 빌도록 만든 것도 복자였다. 그의식이 진짜였든 미신이었든 두 소녀는 무탈하게 어른이 됐고, 법대에 진학해 판사가 된 영초롱이 다시 제주로 돌아왔을 때 복자와 재회하게 된다. 나에게 또 한 번의 충격은 잊고 지냈던 복자의 존재가 동창생 고오세의 입을 통해 !’ 하고 환기되었던 장면.

 

p.78

그리고 이건 이판사 것. 저기 친구가 챙겨주라고 하더라고요. 동창이 팔아요. 거저나 마찬가지로 싸게 샀습니다.”

나는 요리를 거의 안 하지만 일단 고맙다며 받아들었다. 그리고 누가 아직 여기 사느냐고, 내가 아는 앤가? 하고 무심코 말을 흘렸다. 그러자 고오세는 나를 멀거니 바라보다가 , 복자라고 알죠?”라고 물었다. 복자가 돌아와서 산다고.

 

복자와 서먹한 사이로 헤어지게 된 계기는 어린 나이었기에 오해로 잘못 번질 수 있는 사소한 일 때문이었지만 성인이 된 그들은 제법 굵직한 사건으로 얽히게 된다. 복자는 간호사들의 산재 관련 사건으로 법적 싸움을 진행 중이었고 영초롱은 그 사건을 주도적으로 맡을지에 대한 기로에 서게 되는데, 복자가 영초롱에게 한 간절한 부탁때문인지는 몰라도 1심에서의 승소소식을 오세에게 전해 듣는다는 것과 영초롱이 훗날 프랑스에서 한국의 복자에게 편지를 쓴다는 것을 통해 영초롱은 끝내 재판에 개입하지 않았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p.217

그래, 그렇겠지. 그러니까 빠져줘. 내 평생의 부탁이야.”

나는 나중에야 복자가 그렇게 말한 것은 어쩌면 재판에서 지게 될 것이 두려워서라는 생각을 했다. 그러면 나를 영원히 원망하게 될 테니까. 나라는 애를 영영 그런 악연으로 묶어 기억 속에 가둬야 할 테니까. 하지만 초저녁에 외로이 뜬 별처럼 들판에 홀로 서 있는 그 오름에서 나는 말할 수 없는 배반감과 분노, 내가 맡고 있는 이 직분을 함부로 하는 침해 같은 것을 느꼈다. 그건 내가 베풀고 싶었던 선의와 우정이 깊으면 깊을수록 더 세게 나를 찌르는 것이었다.

 

어차피 소설은 소설일 뿐이지만 <복자에게>에서는 주요 인물들 사이에 제주 4·3 사건, 제주 의료원 산재 사건, 강경대군 구타치사사건 등 역사 속에 뼈저린 기억으로 남은 몇몇 사건들을 군데군데 넣어 지금의 현실과 조우하도록 설계했다. 소설의 줄거리 속에서 마주하는 그 기억들은 마침내 수많은 일상의 사색으로 감정선을 이끈다. 영초롱과 복자, 그리고 그들을 둘러싼 주변인물들의 긴밀한 관계들 속 세밀한 감정묘사를 실감나게 그린 이 소설, <복자에게>는 반복되는 일상 중에 한 번쯤은 따뜻하게 마음을 어루만지고 싶을 때, ‘장차 복을 많이 받을 사람이라는 뜻을 가진 복자라는 친근한 이름이 문득 떠오를 때, 이따금씩 책장에서 꺼내어지는 그런 책이 될 것 같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