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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이트홀
카를로 로벨리 지음, 김정훈 옮김, 이중원 감수 / 쌤앤파커스 / 202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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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이트홀이라는 매혹적인 소재에도 불구하고 <나 없이는 존재하지 않는 세상>에 비해 다소 싱겁게 느껴진다. 블랙홀을 통과해서 화이트홀을 통해 다른 차원이나 시간대로 이동할 수 있을까? 이런 판타지적이지만 흥미로운 의문은 허무하게 무너진다. 하지만 언제나 카를로 로벨리의 문장은 깊은 감흥을 불러 일으킨다. 양자와 우주, 이 광활한 공간의 중력과 시간, 블랙홀에 더해진 화이트홀이라는 미지의 세계에 취해 발이 5센치 쯤 공중에 떠올랐다가 금새 착지했다.

우주의 신비에 한발짝 다가서도, 시간의 개념이 뒤바뀐다 해도 내가 딛고 선 땅은 굳건하다. 아쉽겠지만 지금의 불행을 되돌릴 수 있을지 모른다는 희망은 헛되다. 그래도 되돌릴 수 없는 시간의 배열 속에서 내 몸이 차지한 공간, 이 수많은 사람들 사이에 숨을 함께 숨을 내쉬는 현실을 어떻게 받아들일지에 대해 생각하다 보면, 또다시 아득해지고 만다. 여전히 땅은 굳건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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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성과 나 - 배명훈 연작소설집
배명훈 지음 / 래빗홀 / 202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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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현 가능성이 높거나, 여전히 가능성이 제로는 아닌 미래, 혹은 외계'를 다룬 SF라는 측면에서 '화성과 나'를 좋아한다. 종종 왜 판타지가 아닌지 의문이 드는 SF 작품이 있다. 소재와 시대, 공간을 제외하면 판타지와 SF가 크게 다르지 않다. 실험실에서 우연히 투명인간이 되는 것과 망토를 둘러입고 투명해진 해리포터 사이에 어떤 차이가 있을까. 하지만 나는 겨우 한 명의 독자에 불과해서 SF소설을 정의내리기는 어렵다. 다만 배명훈 작가의 소설을 읽다보면 SF소설은 이런 것이구나, 라고 생각하게 된다. 배명훈 작가의 작품 중 좋아하는 소설을 쉽게 꼽을 수 있지만, 앞서 말한 이유로 '화성과 나'는 더욱 각별하다.

화성 이주, 테라포밍의 가능성에 대한 의견은 분분하지만, 여전히 일론 머스크는 우주선을 발사하고 있다. 뭐, 화성이 목성보다는 더 가능성이 있지 않나. 지구 생태, 환경 문제와 결부시키면 또 가타 부타 말할 거리는 많겠지만 일단은 접어두자. 그냥 인간이 발을 딛고 사는 지구에서 한 발짝보다 조금 더 떼서 화성까지 생각의 반경을 넓혀보자. 그러면 기존의 시간 관념이 바뀌고, 국가를 구분짓는 경계가 바뀐다. 물론, 실현되지 않은 미래의 세계관이 지금 유효하다고 주장할 수는 없지만, SF소설은 미래에서 도리어 지금 세계에 의문을 던지기도 한다. 연작 소설이라서 가볍게 읽히지만, 구성은 탄탄하고 무겁다. 법 체계와 식문화, 소통의 문제, 지구와 정치적 관계 등 큼지막한 주제들을 가볍게 다룬다. 배명훈 작가의 다른 작품처럼 큰소리로 웃음을 터뜨릴테지만, 결연한 의지의 인물들을 맘속 깊이 응원하게 될 것이다.

테드 창을 좋아하지만 겨우 단행본이 2권 뿐이다. 그렉 이건의 소설은 국내에 겨우 3권이 번역됐을 뿐이다. 하지만 괜찮다. 한국에는 배명훈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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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렌지와 빵칼
청예 지음 / 허블 / 202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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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야 모든 게 환해졌다. 나는 정말이지 조금도 세계를 사랑하지 않았던 것이다.“
이 퇴폐적인 문장에 전두엽의 일부가 건드려진 것이 분명하다. 문장을 소리 내 발음하면 다문 입 사이로 키득대는 소리가 새어 나올 것 같다. 나는 최선을 다해 나를 둘러싼 세계를 사랑하는 중인데 이런 비관적인 문장에서 끈적한 쾌감을 느끼다니. 사실 이 세계를 살아내는 일이 버거웠던 건 아닐까. 쾌감 뒤에는 죄책감이 살갗을 타고 올라온다. 그래서 나는 이 책을 좋아할 수 없다. 서평단으로 선정된 주제에 이렇게 써도 괜찮을까. 출판사에 블랙리스트 같은 것이 있다면 앞으로 서평단은 힘들겠지만, 아 뭐 어쩌겠나.

한쪽 단면을 보고 그것이 실체의 전부라고 판단하는 것은 위험한 일이다. 또 그 단면들이 모여 선입견이 되었을 때, 누군가는 반드시 그 반대편을 상상하기 마련이고. ’오렌지와 빵칼‘은 우리가 단면이 아닌 양면으로 존재할 수 있는지에 대한 물음이 아닐까. 이야기는 자기 통제와 사회적 통제의 극단을 상상한다. 사실, 이렇게 터프하고 단호한 이야기를 기대하진 못했다. 오렌지는 상큼하고 빵칼이 그렇게 위협적이지는 않으니까. 아, 그래서 오히려 뒤도 돌아보지 않고 직진하는 건가? 걱정 말고 탑승하셔도 좋습니다. 다소 안전한 편입니다.

혼자서 차를 운전할 때, 가끔 심한 욕설을 한다. 특히 고속도로의 차 안은 더욱 밀실 같아서 거칠고 우악스러워진다. 가끔은 사람 몸에 기생하는 말벌 유충 영상을 본다. 유충은 생각보다 커서 그걸 뽑아낸 자리에는 싱크홀 같은 공동이 생긴다. 늘어나는 구멍들을 마치 내 몸인 양 기괴하게 감각한다. 아주 많은 경우에, 나는 내 안에서 기괴하거나 부정적이거나 비사회적인 면모를 발견할 수 있다. 자기통제 없이 튀어나오는 그런 면면이 겨우 ’빵칼‘에 불과하다면 다행이지 않나. 그러면 좀 더 맘껏 반대편을 상상할 수 있다. 빵칼이 파괴할 만한 것은 기껏해야 바게트 정도일 테니까.

무언가를 너무 싫어하는 상태는 사실 깊이 애착하는 상태가 아닐까-생각한다. 사랑과 증오는 동전의 양면 같으니 그냥 한꺼번에 ’애증‘이라고, 한단어로 정의하면 어떨까. 서로 정반대 편에 있으니, 하나의 논리적 맥락에서 이해하기는 힘든 일이겠지만, 뭐 그러려니 하자. 우리는 다면체니까. 가끔 아주 싫어하는 대상을 도리어 ”사실 엄청 좋아하는 거 아냐? 이 정도면 사랑이지“라고 농담을 한다. 그렇게 농담하면 웃음이 나는데, 저 맨윗 문장도 이렇게 바꿔 말해보면 웃음이 난달까.

”이제야 모든 게 환해졌다. 나는 정말이지 미치도록 세계를 사랑하고 있던 것이다.“
그러니까, 나 이 책 좋아하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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엿보는 자들의 밤
빅터 라발 지음, 배지은 옮김 / 현대문학 / 201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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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분의 일 쯤 읽었을 때, 서평에서 이 소설의 어떤 작은 부분도 언급하지 말아야겠다고 생각했다. 전혀 짐작 못하게 아무 말도 안해줘야지. 옛날엔 소설이라는 것이 아주 하찮은 취급을 받았다고 한다. 밤이 되면 사람들이 촛불 아래 모여서 읽는 것이었고, 순전히 재미를 위한 것이었다고. 그러니까 사실 소설은 그냥 엄청나게 재밌는 것이 아닐까. 요즘은 넷플릭스로 밤을 지새우지만 그때는 소설책을 읽으면서 눈이 벌개졌겠지. 이런 면에서 '엿보는 자들의 밤'은 아주, 매우, 엄청 소설스럽다. 그러니까 그냥, 아주 재밌다. 전반부만큼은 지난 2년 동안 읽었던 어떤 책보다 잘 읽혔다.

하지만 나는 좋아하는 것에는 아주 호들갑을 떨고, 재밌는 것은 상세하게 떠벌리고 싶어하는 사람이라서 뭐라도 말하고 싶은데... 지하철이 등장하면 이를 악물거나 손을 꽉 쥐게 될것이다. 나는 솔직히 식은 땀을 흘렸는데, 그건 그냥 직장상사가 자리를 비운 시간에 몰래 책을 펼쳤기 때문일 수 있다. 아무튼 혹시 회사 출입문이 열리지 않을까 노심초사하면서도 책을 손에서 놓지 못했고, 이야기의 긴장감을 4DX로 체험했다. 그 짧은 에피소드가 끝나면 곧 평화가 찾아오지만, 결코 속지 않았다. 여기가 겨우 오분의 일이 지난 시점이고, 서평에 대해 생각한 시점이다.

아마 시간이 넉넉하다면 600페이지를 단숨에 읽을 수 있다. 출퇴근하는 버스에서 잠깐 읽고 끊어지는 순간들이 얼마나 아쉬웠는지 모른다. 아무튼 이야기는 출퇴근도 없이 전속력으로 전진한다. 고통의 순간에는 희망이 보이는 것 같고, 평화가 감돌 때에는 정체모를 긴장감이 선명하다. 아, 이런 게 소설을 읽는 맛이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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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누군가는 더 검은 밤을 원한다
우다영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2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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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라 형언할 수 없을만큼 좋았다. 자아와 인과와 현재와 세계의 경계가 모두 흐릿해졌지만, 돌연 현실로 돌아와 내 삶이 더 없이 소중하다고 생각했다. 내 안에 신이 깃든줄 알았지만 또 먼지 같기도 했다. 어떤 소설 속 이야기는 텍스트를 허물고 밖으로 튀어나올 것 같다. 우다영을 읽어서 다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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