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영원한 저녁의 연인들
서윤빈 지음 / 래빗홀 / 2024년 4월
평점 :
<영원한 저녁의 연인들> 서윤빈
그렉 이건의 ‘쿼런틴’을 떠올렸다. 보르헤스의 ‘기억의 천재 푸네스’나 영화 ‘이터널 선샤인’을 떠올리기도 했다. 깊이 연관 지을만큼 비슷하진 않다. 그냥 좋아하는 것을 떠올리며 이 소설을 읽었다는 말이다. 아, 떠올린 것이 하나 더 있다. 산책. 얼마 전에 누나(파트너)와 손을 꼭 잡고 길거리를 가득 메운 인파를 헤치며 걸었다. 한참을 걸어서 도착한 중식당에는 짜장면이 없어서 가지튀김을 먹었고, 돌아오는 길에는 조금 지쳤던 것 같은데 그래도 우리는 몇 번을 크게 웃었다.
어떤 SF는 잘 구축된 세계관 자체가 소설의 전부인 것처럼 느껴진다. 테드 창이나 그렉 이건의 작품처럼 대체로 하드SF라고 부르는 장르들이 그렇다. 그리고 영원한 저녁의 연인들이 그렇다. 소설 속에 등장하는 버디, 모드, 명상, 장기 임플란트 등의 소재는 새롭지 않지만 그 기술의 등장 배경이 매우 설득력 있다. 각각의 소재를 연결시킨 맥락 자체도 개연성이 높다. 초지능, 생명연장에 대한 설득력은 기억과 죽음, 존재에 대한 철학적 고민으로 이어진다. 그러니까 SF팬이 SF 소설에서 기대할 수 있는 것은 다 들어있다.
하지만 진짜 재밌는 건 이런거다. 그러니까 잘 구축된 미래 세계가 펼쳐져 있다면, 주인공에게는 무슨 흥미진진한 일이 벌어질까? 작가는 주인공에게 어떤 시련을 줄까? 범죄, 살인, 초국가적 음모 같은 거대한 사건들이 일어나지 않겠는가, 하고 기대가 점점 커지는 순간… 그냥 걷는다. 어디로 가는지 모를 산책을 넋을 놓고 따라가게 된다. 두 주인공이 함께 걷는 풍경이 머릿속에 선명하다. 물론, 산책이 끝나면 존재통이 찾아오겠지. 그래도 다시 걷는다. 뛰기도 한다. 첨단의 기술과 초지능 사회 속에서 주인공이 하는 일이 걷는 것이라니. 또 존재통이 몰려올 것이고 그러면 페이지를 다시 앞으로 넘긴다. 이 아름다운 산책이 자꾸 머릿속을 맴돌아서 다시 읽고, 또 읽었다.
전에 샘플북을 읽고 서윤빈 작가의 소설에는 전혀 SF스럽지 않은 것이 천연덕스럽게 놓여있다고 생각했다. 해녀나 알파카 같은것. 그리고 산책 같은 것. 상상할 수 있거나 어쩌면 도달가능한 미래, 그것이 어떤 세계라도 우리는 산책을 하겠지 아마. 산책을 하고 사랑도 하겠지.
이 글은 출판사로부터 제공받은 책을 읽고 작성한 서평입니다.
#서윤빈 #래빗홀 #영원한저녁의연인들 #서평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