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이트홀이라는 매혹적인 소재에도 불구하고 <나 없이는 존재하지 않는 세상>에 비해 다소 싱겁게 느껴진다. 블랙홀을 통과해서 화이트홀을 통해 다른 차원이나 시간대로 이동할 수 있을까? 이런 판타지적이지만 흥미로운 의문은 허무하게 무너진다. 하지만 언제나 카를로 로벨리의 문장은 깊은 감흥을 불러 일으킨다. 양자와 우주, 이 광활한 공간의 중력과 시간, 블랙홀에 더해진 화이트홀이라는 미지의 세계에 취해 발이 5센치 쯤 공중에 떠올랐다가 금새 착지했다. 우주의 신비에 한발짝 다가서도, 시간의 개념이 뒤바뀐다 해도 내가 딛고 선 땅은 굳건하다. 아쉽겠지만 지금의 불행을 되돌릴 수 있을지 모른다는 희망은 헛되다. 그래도 되돌릴 수 없는 시간의 배열 속에서 내 몸이 차지한 공간, 이 수많은 사람들 사이에 숨을 함께 숨을 내쉬는 현실을 어떻게 받아들일지에 대해 생각하다 보면, 또다시 아득해지고 만다. 여전히 땅은 굳건하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