빨간 피터의 고백 - 프란츠 카프카의 학술원에 드리는 보고
마히 그랑 지음, 서준환 옮김, 프란츠 카프카 원작 / 늘봄 / 202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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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이 된 원숭이는 벌레가 된 인간만큼 극적이진 않다. 그런데 아침에 일어나보니 갑충이 되어버린 이야기보다 인간보다 더 인간적인(?) 인간으로 변한 원숭이 이야기가 더 어려웠다. 원어 독일어가 문제인지, 글이 짧아선지 카프카의 글 학술원의 보고시골 의사다음으로 난해하다. 물론 개인적인 의견이다. 아마 이 책을 만나지 못했다면 인간이 된 원숭이 이야기는 내게 꾸준히 어렵기만 한 글이 였음이 확실하다. 고마운 책이다.

 

21세기의 오분의 일이 지났다. 정말이지, 과거의 잔재를 먼지 털 듯 털어낸 상큼하고 신선한 새 세상이 오리란 기대까진 하지 않았다. 반대로 힘들고 고통스러운 일들이 기다리고 있을 것이라 예상했다. 기후변화, 인구과밀, 양극화, 종교 갈등, 식량부족 따위의 문제들로 말이다. 그렇다고 해도 모진 환경과 조건을 지혜롭게 극복한 인간종에 대한 희망이 있었기에 새롭게 맞이하는 신세기가 회색빛이긴 해도 칠흑의 검은색은 아니었다. 하지만 이 작은 기대는 무너졌다. 코로나 팬데믹 상황에서 인간이 보인 극단적인 이기심은 놀라웠다. 가난한 나라의 방역이 속절없이 무너지는 가운데 돈 많은 소위 선진국은 백신을 독점했다. 그 잘 사는 나라 사람들은(나를 포함해) 없는 나라 사람들이 구경조차 할 수 없는 백신을 두 번 세 번 맞았다. 보편이라는 수사가 붙어야 할 휴머니즘은 어디에도 없었다. 세계가 어두컴컴했다.

 

생존을 위한 대의(?)로 전쟁이 벌어졌다. 1930년에 볼 수 있었던 민족주의, 국가주의, 영토확장주의가 2022년에 다시 세계 정치에 극적으로 부활했다. 이를 대응하기 위해 만든 국제연합은 마이크 앞에서 실체도 없는 말잔치만 할 뿐이고 강대국으로 불리는 나라들은 자국의 이익을 계산하며 주판알을 튕길 뿐이다. 정의는 이해당사자들 저마다의 논리에 찢겨 너덜너덜해졌다. 무력으로 남의 나라를 해방시킨다는 나라도, 잘 싸워 이기라며 무기며 물자를 지원하는 나라도 곱게 보이지는 않다. 참화 속에서 죽어가는 사람들은 어차피 먼 나라 남의 일이다. 입으로 정의를 말하기는 쉽다. 하지만 자식의 팔에 이름과 주소를 새기는 부모 마음을 우리가 어찌 완벽하게 이해할 수 있겠는가. 지금 실시간으로 벌어지는 일들이 과연 희망찬 2022년이란 말인가.

 

피터는 원숭이에서 인간으로 진화했다. 그에게 인간되기란 생존을 위한 절대적인 선택이었다. 지난한 과정을 통해 피터는 인간이 되었다. 그런데 인간은 생존을 위해 원숭이가, 아니 짐승이 되어가고 있다. 지독한 혐오와 배제, 집단주의는 이성의 존재가 아니라 본능에 따르는 동물의 습성이다. 대화와 타협보다 힘으로 억누르고, 약자에 대한 배려가 아닌 강자의 독식은 진보를 역행하며 짐승의 길을 가고 있는 인간 문명 퇴화의 전조다. 기후변화 따위의 물리적 파국을 걱정했던 나의 낭만적인 예상은 완전히 빗나갔다. 인간은 스스로 파멸하고 짐승이 되는 존재였던 것이다.

 

오래던 마키아벨리라는 선지자는 인간이 지닌 이성과 본능에 관한 통찰을 글로 남겼다. 군주론에서 이상적인 군주는 야만과 이성을 동시에 지녀야 한다고 한다. 백성들은 인간보다 동물에 가깝기 때문에 사랑보다 폭력이 통치에 효과적이라고 했다. 물론 배부르고 등따신 시절에는 인간적인 풍모를 풍기는 것이 더 유리하다. 하지만 고난의 시대엔 짐승처럼 대하는 것이 권력을 유지하는데 필수 조건이라 했다. 우리는 인간이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존재라는 착각 속에서 산다. 짐승의 본능을 숨기면서 말이다. 숨겨진 야만성은 언제나 생존의 위협이라는 허울 아래서 폭력을 정의로 탈바꿈한다. 그게 인간이다.

 

어쩌겠는가. 세상이 이런 걸 말이다. 인간이 그런 존재인걸. 그저 최대한 애쓰고 결과를 기다릴 수밖에. 인간이 된 원숭이 이야기 속에서 인간의 길이 무언지 찾으면서 말이다. 피터는 인간이 되는 최종 과정이 풍경에 녹아든 것이라 했다. 아마 인간사회의 일부분으로 동화된 것을 그렇게 표현했을 것이다. 인간이 인간의 풍경이 된다는 것은 이성과 본능을 초월한 그 무엇이란 생각이 든다. 서로가 연결되어 하나를 만들어내는 건 우리 인간종이 자연의 일부요 지구 생태계의 부분이라는 자각에서 가능하다. 내 존재가, 우리라는 공동체가 특별하고 우월하다는 오판이야말로 파멸의 시작이다. 우리에겐 그저 약간의 이성을 갖춘 원숭이일 뿐이라는 겸손함이 필요하다. 부족함을 함께 채워가는 그런 존재라는 사실을 받아들여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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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속가능한 세상을 위한 데이터 이야기 - 디지털 시대에 알아야 할 핵심 지식 지속가능한 세상을 위한 청소년 시리즈 1
박옥균 지음 / 이상북스 / 202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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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의 세상으로 들어가는 입구가 있다. 그곳을 통과하면 거대한 책들의 세상이 펼쳐지고, 또 그 너머에는 세상의 모든 진리가 존재한다. 물론 지극히 나 자신의 개인적인 생각이다. 여하튼 기쁜 것, 행복한 것, 슬프고 절망적인 것이 적당히 섞여있는 그 진리의 세계를 맛보려면 먼저 책을 읽어야 한다. 무엇보다 중요한 건 입구다. 그곳을 거치지 못하면 책과 그 너머의 매혹적인 세계를 엿볼 수 없다. 역설적이지만 입구 또한 책이다. 독서가라면 누구나 자신을 책의 바다에 풍덩 빠지게 만든 책이 존재한다. 감동 아니면 충격을 준 책 말이다. 도끼로 얼음장을 깨는 것처럼 말이다.

 

지금은 고인이 되신 최성일님의 “책으로 만나는 사상가들”.

20년 전 나를 책 세상으로 인도한 책이다. 빛나는 사회과학 이론의 정수를 뽑아 놓은 책에는 다양한 인물이 등장한다. 워낙 다루는 분야가 많아 자칫 방만하고 산만해질 수 있는데 이 책은 다르다. 메타서적의 한계를 뛰어넘은 명저다. 그람시의 ‘옥중수고’, 푸코의 ‘감시와 처벌’, 레비스트로스의 ‘슬픈 열대’, 발터 벤야민의 ‘발터 벤야민의 문예이론’을 접할 수 있었던 건 오로지 이 한권의 책 덕분이다. “책으로 만나는 사상가들”은 그래서 각별하다.

 

10년이 넘었다. 난 매주 토요일 도서관에 간다. 입구를 통과해 1층을 지나면 2층이 장서실이다. 신간코너 앞에 선다. 정확하게 말하면 300번대 사회과학 서가 앞이다. 10년 전 책장을 압도하던 인문사회 책이 지금은 초라하게 줄었다. 재테크, 투자, 부동산에서 메타버스, 암호화폐, NFT 까지 온통 돈 이야기가 공공 도서관 300번대 책꽂이를 휩쓸고 있다. 이것이 자본주의의 마지막 모습인지 씁쓸하다. 4차 산업혁명이란 단어도 애써 외면하고 싶을 지경이다. 책에 관해 편식이 심하지 않지만 이상하게 돈이나 부, 인공지능이니 빅테이터 따위에 관심이 별로 없다. 좋은 책이 있을 텐데 도저히 손이 가지 않았다. 나를 인공지능과 AI, 테이터와 코딩의 세계로 끌어줄 책이 필요했다. 다양하고 풍성한 정보로 가득하고 장르의 경계가 존재하지 않는 그런 책.

 

그러던 차에 좋은 책이 세상에 나왔다.

 

이 책은 데이터라는 풍성한 바다위에 펼쳐진 한편의 스펙터클이다. 코딩과 데이터, 인공지능과 각종 정보통신기술이 쉽고 흥미롭게 전개된다. 단순한 IT 교양서가 아니다. 글쓴이의 깊은 내공이 느껴지는 인문학을 바탕으로 데이터 이야기가 펼쳐진다. 데이터의 본질이 결국 지식과 지혜 그리고 책이었으니 말이다. 헤겔의 정반합, 마르크스의 물신숭배에서 조선왕조실록과 논어, 스키너의 심리실험과 유발 하리리의 사피엔스까지 철학, 심리학, 뇌과학, 역사, 미술과 음악을 넘나든다. 글쓴이의 엄청난 독서량이 느껴진다. 물론 테이터 기반의 인공지능, 메타버스, 알고리즘에 관한 내용도 알차고 간결하다. 데이터 과학 초심자인 성인에게도 좋지만 무엇보다 청소년들에게 좋은 책이라 자신한다. 읽기도 쉽고 이해하기도 쉽다. 따분하지 않아 좋다. 파트별로 추천 도서가 책 속에 자연스레 녹아 있는 세심한 편집도 장점이다. 분명 이 책이 입구가 되어 책 세상에 이르는 아이들이 많을 것이라 자신한다.

 

서평을 마치며 반드시 언급하고 싶은 내용이 있다. 책을 마무리 하며 글쓴이는 잠깐이라도 스마트폰이나 컴퓨터에서 벗어나는 삶을 고민하자고 말한다. 맞는 말이다. 다가오는 디지털 시대에 더욱 가치가 빛나는 건 바로 ‘오래된 미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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빨간 머리카락 마담의 숙소 - 할머니의 우아한 세계 여행, 그 뒷이야기
윤득한 지음, 츠치다 마키 옮김 / 평사리 / 202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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멋진 삶이다.

서평을 써야 하는데 떠오르는 말이 없다. 그저 멋지다는 말밖에.

 

앞 두 줄이 내 서평의 전부다.

아래 쓴 글은 사족이다.

 

사업가, 예술가, 여행가, 시인 윤득한.

그(그녀)의 한 세기 남짓한 생은 인간의 아름다움과 생의 경이로움으로 가득하다. 인연을 만들기 위해 세계를 여행한 경계인이었다. 예술과 사업 중간 어딘가의 경계인이었고 한국인이면서 하이쿠를 사랑한 경계인이었다. 몇 째 아들인지 모르지만 그 아들이 한 말이 정답이다. 경계인이어서 고독하고 외롭지 않았다. 경계에 서 있어 그녀는 자유인이었다. 그녀가 일본이나 한국이라는 정체성을 선택받아야 했다면 결코 이처럼 멋진 삶을 살지 못했을 것이다.

 

떠나고 싶으면 떠나고, 만나고 싶으면 만났다. 보고 싶으며 봐야 했다.

‘그리스인 조르바’의 말미에 조르바는 두목(카잔차키스)에게 아름다운 돌덩이를 보러 오라고 전보를 친다-두목은 독일에 조르바는 기억나지 않지만 동유럽 어디쯤에 있었다. 당시 유럽은 처참한 경제공황으로 죽어가던 때였다. 카잔차키스는 결국 가지 않는다. 비겁하게. 여튼 조르바는 펜대 운전사라 조롱하며 두목에게는 지옥이 존재할 거라고 답장한다.

맞다. 글쓴이에겐 지옥이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조르바와 결이 다르지만 그녀는 완전한 자유인이었기에.

 

사족이 길다.

생각나는 대로 적겠다.

유쾌한 로마의 덩치 좋은 남정네들. 스코틀랜드의 무반주 첼로곡, 베를린의 택시 운전사, 깁스를 예술로 승화시킨 지중해 의사들, 캐나다에서 만난 정중한 홍콩신사. 무엇보다 미쓰코시 백화점에서 열린 최초의 한국전. 그리고 자유로운 영혼. 아름다운 하이쿠.

읽어야 알게 될 것이다. 자유와 예술을.

눈이 띄는 하이쿠 한 편을 끝으로 글을 마무리 한다.

 

“가을 국화꽃 피는 골목 느긋한 고양이의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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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서운 극장 - 산만한 관객 K의 사유하며 영화 보기
김형중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2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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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나로 거리두기가 시작되었을 때 푸코의 생체권력을 떠올렸다. 물론 생명과 건강권을 둘러싼 철학적 사유에 대한 깊이는 없다. 정치권력이 어떤 시스템으로 생명을 부여잡고 시민에게 강제를 휘두르는지도 잘 모른다. 평소 숨 쉬듯 자연스러웠던 행동권의 범위가 제한되는 순간 반사적으로 생각났다는 편이 정확하겠다. 정신병원과 책 “뻐꾸기 둥지 위로 날아간 새” 그리고 잭 닉콜슨이란 단상이 줄을 이었고 영화 ‘뻐꾸기 둥지 위로 날아간 새’를 검색했다. 네이버 블로그에 영화에 대한 번득이는 비평을 읽었고 이런 분이라면 책을 써도 될텐데라며 글쓴이의 내공이 부러웠다. 작년 일이다.

 

“후르비네크의 혀”는 내가 갖고 있는 몇 안 되는 비평집이다. 2차대전 유대인 대학살, 5.18 광주, 세월호 참사와 같은 타살된 대규모 죽음에 관한 문학작품에 대한 김형중 교수의 비평이 담겨있다. 감당할 수 없는 고통 속 인간은 일상의 언어로 대화할 수 없다는 것 혹은 이성과 감정으로 도저히 이해가 불가능한 현실을 반영하는 장르가 환상문학이다(정확하지 않다. 책을 읽고 느낀 내 감정이다) 따위의 깨달음을 얻은 책이다. 책 제목 후르비네크도 말과 언어에 대한 깊은 울림을 지니고 있다. 좋은 책이다.

 

“무서운 극장”이라는 책은 영화 비평이다. 반가운건 지은이가 김형중 교수란 사실. 책을 구입하고 목록을 살피던 중 ‘뻐꾸기 중지 위로 날아간 새’가 보였다. 설마 하는 마음에 책을 넘겨 그 부분을 확인해 보니 작년에 블로그에서 읽은 글이 아니던가. 다시 블로그를 찾아보니 글쓴 사람이 김형중이었다. 블로그도 일반적이 블로그가 아니라 씨네 21이 운영하는 곳이었다. 읽고 싶은 것만 읽고 자질구레(?)한 정보에 둔감한 내게 자주 있는 일이다. 기이한 우연이다.

 

지난 1년 동안 의미 없음의 의미를 찾으려 했다. 사유의 허무함도 사무쳤다. 읽는 내용 족족 현실과 동떨어진 꿈처럼 느꼈다. 쓰는 글은 모두 문자 쓰레기였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이 모든 것이 과정이었다. 아닐 수 있겠지만 다음 계단으로 올라가는 과정. 경로의존과 확증편향에서 벗어나는 몸부림이라 혼자 결론지었다. 이렇게 놓았던 정신줄을 다시 잡는 시기에 무서운 극장은 마침맞았다. 보고도 알지 못했던 정보, 다른 방향의 사유와 성찰의 존재를 알려준 책이다. 시집보다 조금 큰 작은 책에 어마어마한 깊이가 느껴진다. 특히 책 앞 부분의 세 개의 글에 주목하기 바란다. 숫자 3이 1이 되는 마법이다. 깊이와 울림, 사유와 성찰을 가득 품은 글! 이렇게 쓸 수 있다니, 내공이 부러울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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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보의 상상력 - 기후위기와 불평등의 시대, 정치란 무엇인가
김병권 지음 / 이상북스 / 202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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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달 동안 책이 손에 잡히질 않았다. 문장과 문장은 따로 놀았고, 맥락은 아득히 먼 나라로 달아난 지 오래였다. 그 밥에 그 나물. 맛이 없었다. 휴일 도서관에서 빌려온 책은 다음 휴일에 펼쳐보지 못한 채 반납됐다. 책을 대신한 건 넷플릭스 동영상이었다. 하지만 영상을 통해 본 세상은 허무하고 씁쓸했다. 내겐 텍스트가 주는 단단한 통찰과 위안을 현란한 화면으로 대체하기 불가능했다. 뭐든 읽어야 한다는 생각으로 집어든 책이 바로 진보의 상상력, 바로 이 책이다. 벌써 읽어야 했어야 했는데 이리도 변명이 길다.

 

진보와 미래라는 단어가 낯설어진지 꽤 됐다. 현실과 동떨어진 진보, 곧 붕괴될 지구 문명의 미래라는 관념이 내 머릿속에 가득하다. 그래서 일부러 피했다. 이런 느낌이다. 읽어봐야, 그래서 어쩌라는 건가? 기본 소득, 탈탄소, 진보정치를 말하는 게 몽상이란 생각이 들었다. 십 수년 전까지 난 탈핵주의자였다. 전기료가 인상되더라도 핵발전소가 없어지는 것이 정의라 생각했다. 하지만 문명 붕괴 시간을 지연시키기 위해, 지속가능한 시스템이 자리 잡을 때 까지 원자력을 이용해야 한다는 쪽으로 생각이 바뀌었다. 위험하지만 어쩔 수 없는 것 아닌가. 가용 자원이 부족한 현실에서 말이다. 기본소득도 그렇다. 취지는 공감하지만 그 기본소득의 재원을 어떻게 마련해야 하는지 난 모르겠다. 수출을 늘려 돈만 팡팡 벌면 되는 것인지, 어떤 방식으로든 수입만 많으면 되는 건지, 무기를 팔아 얻는 수익도 괜찮은 건지(우리나라 방산수출액은 20조 이상이다). 당연히 시민 개개인의 의지로 과연 탄소를 줄일 수 있을지 난 도무지 모르겠다. 그렇다고 개인과 시민단체의 힘으로 가능할까?

 

지속가능한 지구를 위한 전문가들의 의견은 한 곳으로 수렴된다. 각 나라의 정치권력이 위기 대처에 앞장서야 한다고. 탈탄소, 기본소득, 소득 불평등, 기후위기에 대한 강력한 법제를 마련해야 한다고. 이는 몇몇 나라에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고 전 세계 대부분 국가들이 동참해야 한다고. 하지만 과거 역사와 현재 진행형인 국제정치를 바라보건데 모든 국가의 일치된 힘이란 꿈같은 이야기다. 법과 정의와 도덕이란 국제무대에서 힘없는 국가의 자기위안일 뿐이다. 파국에 맞선 개인의 저항이 세상을 바꿀 수 없다. 인류 문명의 붕괴에 가장 큰 요인은 불평등이다. 경제적, 사회적, 정치적, 종교적 불평등. 구조화된 불평등은 약자가 약자를 혐오하고 배제하는 기형적인 사회를 만든다. 중요한 것은 불평등이란 개인과 공동체에서 시작되어 세계 정치의 매커니즘으로 구조화 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강대국에 의해 좌우되는 불평등이 자본주의 시스템을 통해 각 나라, 각 공동체, 각 개인으로 전파되는 것이다. 다르게 말하면 불평등의 구조화는 위에서 아래로 전개된다. 당연히 문제 해결 또한 위에서 시작해야 한다. 현실적으로 개인과 시민단체의 안간힘으로 어림없다는 말이다. 불평등이 해결되지 않는 한 인간에게 미래는 없다.

 

현실을 진단하고 처방을 내리고 있다는 점에서 책을 충분히 읽어 볼만 하다. 많은 자료와 관련 서적을 접하고 고민한 흔적이 곳곳에 녹아있다. 답이 없는 문제에 답을 찾기 위해 글쓴이가 가진 모든 걸 쥐어 짠 듯하다. 파국의 눈덩이에 조금 큰 생채기를 낼 수 있는 책이다. 다양한 정치적, 경제적 입장에서 벗어나 충분히 읽어볼 만한 책이다.

 

거대한 붕괴 앞에서 우리가, 내가 지금 해야 할 일이 뭔지 난 모른다. 단지 무너지고 부서지는 현실을 바라보며 붕괴의 과정에서 뭔가를 얻기 바랄 뿐이다. 그 뭔가를 찾기 위해 언제까지 무의미의 늪에서 허우적거릴 수 없는 노릇이다. 어차피 의미와 무의미의 반복이겠지만 그 사이에 의미를 넘어선 소중한 무언가를 어쩔 수 없이 희망한다. 무척 어리석어 보이지만 난 이성과 논리가 아닌 인간의 선한 본성에 기대를 건다.

 

소설가 허준(나도 근래에 처음 들어본 이름이다)이 쓴 “잔등”이라는 소설 속 국밥집 할머니 이야기로 글을 마치려한다. 할머니의 하나 남은 막내아들은 노동운동으로 감옥에 갇혀 있었다. 면회 때 아들은 함께 투옥된 일본인 동료에 대해 말한다. 일본인 동료는 일본인은 일본에서 잡히는 멸치만 먹고 살아도 넉넉히 잘 산다는 말을 했다는 이유로 감옥에 갇혔다. 아들은 해방 한 달 전에 옥사했고 할머니는 해방 후 편하게 모시겠다고 찾아온 아들 친구들을 모두 물렀다. 사방에 굶고, 고통 받고, 죽어가는 사람이 천진데 어떻게 자신만 편히 살 수 있겠냐며. 국밥집 할머니는 그토록 미워하는 일본인들(패전국 국민으로 온갖 박해를 받고 있던)에게 묵묵히 국밥을 말아준다. 일본인이 밉지만 아들이 말한 그 일본인 친구 때문에. 혐오와 차별이 넘치는 세상에서 미워하는 이에게 사랑을 베풀어줄 수 있는 할머니의 (책에서 표현된) 슬픈 너그러움이 필요한 시대가 아닐까? 서서히 타올라 꺼지기 직전의 잔등(殘燈)은 희미하지만 어두운 세상을 비추는 소중한 무언가가 아닐까? 무의미와 의미, 이해의 지평 건너편에 존재하는 소중한 무언가가 말이다. 희미하지만 따뜻한 빛을 뿜는 잔등과 슬프지만 너그러운 할머니의 잔상이 어른거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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