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 조선 선비의 자존심 - 조선 500년 명문가 탄생의 비밀
한정주 지음, 권태균 사진 / 다산초당(다산북스) / 201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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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 선비의 자존심 / 한정주 / 다산초당 / 704pg

 

엄청난 두께의 책을 이렇게 재미있게 읽은 것이 얼마만인가 싶다.

아무런 지식도 서평도 미리 읽어보지 않은 채, 책 겉표지만 보고 책을 접하게 되었다.

조선 500년 명문가, 탄생의 비밀 호, 조선 선비의 자존심이라고 되어 있어서, 명문가에서 인재를 발굴하는 방법, 어떠한 비밀이 숨겨져 있나? 하는 생각에 처음 책을 읽기 시작했다.

 

이 책은 조선 선비가 자기 자신이 지금 호()를 짖게 되는 계기, 역사적 바탕, 인물의 됨됨이 등을 재미있게 풀어낸다. 역사적 서적을 읽을 때, 왕비중심으로, 또는 특정사건 중심으로, 인물 중심으로 된 책만 접해봤는데, 이렇게 이름을 중심으로 역사와 그 인물에 대해 배우는 건 신선하고, 저자가 역사적 바탕이 되는 자료들을 제시했을 때 설득력도 있었다. 그림, , , 남겨진 역사적 기록들 바탕으로 추리해 나가는 기분이라고나 할까.

 

요즘의 우리는 특별한 일이 없으면 이름 한 개를 가지고 살아가지만, 옛 조선의 선비들은 최소한 셋 이상의 호칭인 명(), (), () 지니고 있었다고 한다. ()은 우리가 지금 사용하고 있는 이름이고, ()는 성인식을 치른 후, ()을 함부로 부르지 않았다고 한다. 너무너무 귀해서 자()를 지어서 불렀다고 한다. 이때 이름()과 연관되게 지었다고 한다. 위의 둘은 자신이 직접 짖지 않고 스승이나 부모가 지어주지만, ()는 자기 자신의 직접 지을 수 있는데, 자신이 살아가는 신조, 장소, 사물 등을 바탕으로 지을 수 있는 호칭이라고 한다.

 

예를 들어보자면 율곡 이이와 교산 허균, 연암 박지원은 자신이 좋아하는 지명(地名)을 호로 삼은 것이고, 퇴계 이황과 조청 박제가, 순암 안정복은 마음에 품고 있는 뜻과 의지를 호로 표현한 것이며, 취금헌 박팽년, 매월당 김시습은 자신의 기호나 취향을 좇아 호를 지은 것이다. 단원 김홍도, 완당 김정희는 존경하거나 본받고자 하는 인물의 이름 혹은 호를 따와서 호로 삼았다. Pg4,5

 

최근 읽은 정향교 작가의 사임당을 그리다』 중에서 사임당 역시 조선시대 여성에겐 특별히 명이 없어, 스스로 호를 사임당이라고 지었는데 이는 중국 주나라 문왕의 어머니 태임이란 여성의 영향을 받아 ()”을 가지고 왔고, ()는 스승이니 본받는 다는 뜻이라고 읽은 적이 있다. 사임당도 자신의 뜻과 의지, 그리고 좇고 싶은 사람의 호를 따서 지었다고 볼 수 있겠다. 이 책을 통해 ()”가 주는 의미에 대해서 더 깊게 생각할 수 있어서 좋았다.

 

저자는 여유당 정약용, 율곡 이이, 단원 김홍도, 혜원 신윤복, 오원 장승업, 남명 조식, 삼봉 정도전, 퇴계 이황, 정암 조광조, 화담 서경덕, 추사 김정희 등 내가 친숙한 인물들의 호가 부여하는 의미를 분석하는가 하면, 사실 내게 친숙하지 않은 인물들인 일두 정여창, 사옹 김굉필, 최재 이언적, 매월당 김시습과 서계 박세당, 백사 이항복과 한음 이덕형, 토정 이지함, 죽도 정여립, 고산 윤선도, 공재 윤두서, 그리고 이 많은 인물들 중 한 명의 임금인 홍재 정조 이산 외에 다양한 인물에 대해 소개한다.

 

실로 엄청난 양의 역사적 배경과 다양한 시조, 그림 등을 바탕으로 역사를 재해석 해주는 것 같아 매우 흥미롭고 재미있었다.

 

역사에 관심이 있는 사람인데 잘 모르는 사람도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저자는 어떠한 역사적 이야기를 흑백논리로 단정하기 보다는 다양한 자료들을 바탕으로 나온 자신만의 결론을 독자와 함께 공유하고 생각해보는 방식으로 이야기를 해주어, 저자와 마치 대화를 나누는 듯 한 기분이 들기도 했다. 뭔가 나도 동의 또는 반박을 해주어야 할 것 같은 느낌을 들게 해 주었다.

 

아는 만큼 보인다고 사실 내가 친숙한 사람들의 이야기가 좀 더 흥미로웠다. 최근 읽은 책들 중에서 등장한 인물들을 다시 접할 때 더 재미있었다고 해야 하나또는 들어본 적이 없는 듯한 인물들에 대해 읽을 때에는 어떻게 이렇게 중요한 사람을 들어본 적이 없지?”하는 생각도 들었다.

 

기억에 남는 인물들의 호를 중심으로 조금 정리를 해보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우선 율곡 이이는 어렸을 때부터 천재로 인정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스스로의 호를 어리석다의 뜻의 우()를 자신의 호로 삼았다고 한다. 율곡은 털끝만큼이라도 성인에 미치지 못하면 나의 일은 끝난 것이 아니다.” 학문이란 닦으면 닦을수록 그 깊고 넓음을 알게 되므로, 역설적이게도 자신의 어리석음을 깨닫게 된다. 자기 수양이란 깊어지면 깊어질수록 그 끝을 헤아리기 어려워, 역설적이게도 자신의 어리석음만 인식하게 된다. 백성을 가르치고 나라를 다스리는 일 또한 현실의 장벽 앞에 부딪히면 자신의 본래 뜻과 의도와는 다른 결과를 낳기 일쑤여서 오히려 자신의 어리석음만 깨우칠 뿐이다. Pg 49

 

실로 훌륭한 인물임에 틀림없다란 생각이 드는 대목이였다. 아홉번이나 장원급제를 하여 구도장원공(九度壯元公)’, “즉 아홉번이나 장원한 분이라고 일컬었는데 그의 겸손과 사상이 너무 훌륭하다.

 

율곡 이이는 자신을 율곡이나 석담이라는 호 보다, “우재(遇齋)”라는 호를 더 사용하였다고 한다. 율곡은 경기도 파주의 율곡과 황해도 해주의 석담인데, 이 곳들은 이이의 얼과 혼이 서려있는 장소라고 한다. 율곡 이이하면 떠오르는 지명이 강릉 오죽헌일 수 있지만, 실제 이이의 삶과 철학의 주요 무대는 그가 호로 정했던 율곡과 석담이라고 하는 점도 매우 흥미로웠다.

 

단원 김홍도와 혜원 신윤복은 자신의 정체성을 화가가 아닌 선비에 두고 있다는 점이 흥미로웠다. 단원은 어렸을 때부터 천재 화가로 인정을 받아 많은 활약을 했는 반면, 혜원 신윤복은 남들이 걷지 않는 길을 걸어 그 시대에는 친송을 받지 못하였지만, 오늘날 혜원 신윤복을 모르는 이가 없다. 그 시절 만약 신윤복이 김홍도를 따라 그리거나 새로운 시도를 하지 않았다면 그를 기억하는 기는 아마 없지 않을까. 독창성과 창의성, 그리고 가지고 있는 신념을 지킨 것이 후대에 조선을 대표하는 화가 중 한 명으로 기억되는 것이 아닌가 싶다.

단원이나 혜원처럼 ()’이라는 한자를 취해 호를 지은 또 다른 이가 있는데 그의 이야기가 너무 웃기다. 오원 장승업이라는 인물인데 그는 그의 천재성 하나로 이름이 떨쳐진 인물이다. 술을 너무 좋아하고 억매이는 것이 싫어서 왕의 명령에도 술 마시고 싶다고 도주를 하는 등의 행동을 보아 정말 자유로운 영혼이였던 사람같았다. 그래서 그의 그림이 엄청 많은데도 불구하고 실제로 그가 그렸는지 그의 제자가 그렸는지 확실치 않다고 한다. 술을 마시고 도장을 자주 잃어버리기도 했고, 술에 쩔어서 그림을 완성 하지 못해 제자가 마져 그린 것도 있다고 하니 말이다.

 

퇴계 이황의 호 역시 매우 인상적이였다. 평생 물러날 퇴(退)’한 글자를 마음에 품고 산 인물이다. 정치에 나가는 것을 꺼리고 학문에 열중하고 제자를 양성하는 일이 더 천직인 사람이였던 것 같다.

 

골짜기 바위 사이로 옮겨 모옥을 짓고 지붕을 이으니

때마침 바위에 핀 꽃 흐드러지게 붉네

옛적부터 지금까지 때 이미 늦었으나

아침에 밭 갈고 밤에 독서하니 즐거움은 끝이 없네

-퇴계집, 초옥을 퇴계 서쪽으로 옮기고 한서암이라 이름 짓다

 

이황이 자신의 묘비에 일체의 관작을 기록하지 말고 오로지 퇴도만은이라고만 적으라고 하였다고 한다. 이황은 벼슬에 나아간 것을 자신의 본래 뜻과 어긋난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자신의 묘비를 관작으로 화려하게 장식하는 것을 큰 자랑으로 여겼던 당시 사대부들과는 다르게 그냥 도산에 물러나 만년을 숨어 지내다라는 뜻의 퇴도만은(退陶晩隱)’이라고 적으라고 했다.  Pg162

 

이 밖에도 너무 재미있게 풀어놓은 인물들의 호 이야기가 이 책에 담겨 있다. 한 개의 호만을 고집한 사람이 있는 가 하면, 100개도 넘는 호를 사용한 추사 김정희도 있다. 최근 재밌게 봤던 "육룡의 나르샤"의 삼봉 정도전 이야기도 재미있었다.

이 책을 통해 그들이 자신을 일컬어 사용했던 호도 알고, 그들의 사상, 신념, 의지 그리고 삶의 스타일도 들여다 볼 수 있는 재미있는 책이다. 다만 두께가 다소 위협적이지만 생각보다 쉽게 읽혀서 오히려 좀 놀랐다.

 

호 중심으로 풀어가는 역사 이야기 책인 , 조선 선비의 자존심을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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