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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리언 그레이의 초상 ㅣ 비주얼 클래식 Visual Classic
오스카 와일드 지음, 박희정 그림, 서민아 옮김 / 위즈덤하우스 / 2018년 5월
평점 :
오스카 와일드 작가에 대해 잘못된 정보, 오해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이 책을 만나고 알게 되었다. 어렸을 때 엄마가 이 작가의 책을 읽는 모습을 본 기억이 난다. 나중에 커서 나도 엄마처럼 오스카 와일드의 책을 읽어봐야지.. 했었는데 어느덧 나 역시 엄마의 나이가 되어 그의 작품을 드디어 만나보게 되었다. 오스카 와일드는 유명한 동화인 <행복한 왕자>의 저자였다는 걸 이번에 알게되었다. 그리고 그의 재능만으로 상류 사회에서 유명인사가 되었지만 동성애 사건으로 인해 비극적 최후를 맞았고, 그의 유일한 장편소설은 <도리언 그레이의 초상>이다. 그의 삶이 순탄치 않았다는 점에 책을 읽는 내내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다. 그러고 보니 책내용의 느낌도 살짝 동성애의 기운이 맴돈다.
이번에 꼭 이 책을 갖고 싶었던 이유는 책표지 디자인이 너무 예뻐서이다. 많은 이들이 '박희정 작가'에 대해 알고 있길래, 유명한 사람이 가 보다...라고만 생각했는데, 책날개에 박희정 작가 소개를 보고 깜짝 놀랐다. 순정만화 잡지 <윙크>에 만화를 연재했던 만화가였다. <윙크>는 나 역시 초등학생 때 종종 보던 만화책이었다. 엄마가 사주지 않아서 친구들에게 빌려봤던 기억이 어렴풋이 난다. <윙크>에 수록된 만화 제목이나 만화가의 이름은 하나도 기억나지 않지만, 나에게 <윙크>는 유년시절의 소소한 반항, 친구들과 함께 읽으며 느끼던 공감, 재미있는 추억을 대변한다. 그리고 나의 '첫' 만화책이기에 더 소중하다. 그런 추억을 가지고 있는데, 책표지를 그린 사람이 박희정 작가라고 해서 책 내용을 떠나 책 자체가 더 특별하게 다가왔다.
예술의 모티브인 도리언 그레이를 그린 예술가 바질 홀워드가 헨리 경에게 도리언 그레이에 대해 묘사하는 부분에서부터 숨이 턱 막혔다. 이유는 두 가지, 하나는 역시 고전의 느낌이 물씬 풍겨 마치 셰익스피어의 작품들을 읽는 듯한 기분을 들게 했고(그냥 어렵다), 문장 호흡이 길고 사건이 매우 느리게 진행되어, 최근 빠른 템포의 책들을 읽어서 그런지 독서력이 많이 떨어졌음을 느끼게 되었다. 하지만 역시 고전이 주는 감동은 있다. 깊이가 다르다. 꼭 한번 읽어보시라 권하고 싶다. 꼭 인내를 가지고 읽어야한다.
아름답고 순수함의 결정체라 묘사되던 도리언 그레이가 헨리 경을 만나며 영향을 받는 과정을 지켜보며, 인간 내면의 본성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도리언 그레이가 욕망과 쾌락을 즐기며 타락하고, 초상화 속의 도리언이 변화하는 과정도 흥미롭지만, 헨리 경의 철학적 언어유희에 더 빠져들었던 것 같다. 나쁜 남자에게 더 끌리나. 그의 말들에 거칠게 반발을 하고 싶고 얼굴에 주먹질을 하고 싶을 정도로 열을 바짝바짝 오르기도 했다. 하지만 도리언 그레이, 바질 홀워드, 헨리 경 중 누구와 대화를 나누고 싶냐고 묻는다면 난 헨리 경과 얘기를 하고 싶을 것 같다. 그래서인지 그의 말들에 자꾸 밑줄을 긋게 되는 나를 발견한다.
상류사회에 대해 풍자하고 외모지향적인 사회에서 아름다움만 추구하며 타락하는 인간의 모습을 고스란히 보여주는 <도리언 그레이의 초상>. 영원히 시들지 않는 아름다움을 간직한 모든 것에 질투하는 것만큼 어리석은 것이 없고, 외적인 아름다움만 추구하는 것처럼 미련한 것도 없다는 걸 일깨워주는 책이기도 하다.
자연스럽게 보이는 것이야말로 진짜 겉으로만 그런 척하는 것이지. 세상에 그것처럼 짜증나는 가식도 없을걸. pg 16
난 영원히 시들지 않는 아름다움을 간직한 모든 것을 질투해요. 당신이 그린 내 초상화에도 질투를 느껴요. 나는 잃어버릴 수밖에 없는 걸 어떻게 이 초상화는 영원히 간직할 수 있는 거지죠? 순간순간 시간이 흐를 때마다 내게서는 무언가가 사라지고, 이 그림에는 무언가가 더해지겠지요. 오, 정반대가 될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그림은 시들어가고, 나는 언제까지나 지금 모습 이대로 살아갈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왜 초상화를 그리셨나요? 언젠가 이 초상화가 나를 비웃을 거예요... 끔찍하게 나를 비웃을 거란 말이에요! pg 60
그에게는 우아한 매력이 있었고, 소년기 특유의 순백의 순수와 고대 그리스의 대리석 조각과 같은 아름다움이 우리 모두를 위해 간직되어 있었다. 누구든 그와 함께라면 못할 것이 없었다. 그는 타이탄이 될 수도 있고, 하찮은 장신구가 될 수도 있다. 아, 그토록 아름다운 미모도 언젠가는 사라져야 하다니, 이 얼마나 안타까운 노릇인가! pg 78
전 잔인한 폭력은 참을 수 있어도 맹목적인 이성은 도저히 견딜 수 없거든요. 그처럼 맹목적으로 이성만 추구하다니, 그건 좀 편파적이지 않나요. 그러니 지적 능력이 떨어지는 사람들이 사는게 괴로운 거라고요. pg 84
인간은 자기 자신에 대해 너무 진지하게 생각해요. 그것이 바로 세상이 지은 원죄지요. 원시 인류가 웃는 법을 알았더라면 역사는 지금 같지 않았을 텐데 말이에요. pg 88
재능이 남다른 여자는 없어. 여자들은 그저 장식에 불과한 성이지. 여자들은 제대로 된 이야깃거리라고는 하나도 없으면서, 아무 이야기나 아주 재미있게 말한다네. 남자들이 도덕을 뛰어넘은 지성의 승리를 대표한다면, 여자들은 지성을 뛰어넘는 물질의 승리를 대표하지. pg 100
살면서 오직 한 번만 사랑하는 사람들이야말로 진짜 얄팍한 거야. 그 사람들은 그걸 정절이니 헌신이니 하고 말하지만, 난 습관적인 무기력이나 상상력 부족이라고 말하지. 감정적인 인생에서 한 사람에게만 충실하다는 건 지성을 추구하는 인생에서 한 가지 사실만 고집한다는 것과 같은 이치라네. 한마디로 실패자라는 걸 고백하는 것과 다를 바 없단 말이지. 정절 좋아하시네! 내 언젠가 반드시 이것에 대해 분석해볼 거라네. 정절이라는 개념 안에는 소유에 대한 애착이 있어. 다른 사람이 주워갈까 두려워하지만 않는다면 우리가 내다버릴 것들이 얼마나 많은데. pg 105
영혼과 육신, 육신과 영혼 - 아, 이 둘은 수수께끼처럼 얼마나 신비한가! 영혼 속에도 동물적인 성격이 있으며, 육신 안에도 영적인 숭고함이 깃드는 순간이 있다. 감각이 정제될 수도 있으며, 지성이 타락할 수도 있다. 육체의 충동이 어디에서 끝이 나는지, 영혼의 충동이 어디에서 시작되는지 그 누가 말할 수 있단 말이가? 평범한 심리학자의 자의적인 정의는 얼마나 피상적인가! 그렇지만 다양한 학파의 주장들 사이에서 한 가지를 결정하기란 또 얼마나 어려운가! 영혼은 죄악의 집에 자리 잡은 그림자인가? 혹은 조르다노 브루노가 생각했듯이 정말로 영혼 안에 육신이 깃들어 있는가? 물질에서 정신이 분리되는 것이 신비이듯 정신과 물질이 조화를 일는 것 또한 신비이니. pg 122
선하다는 건 자신의 자아와 조화를 이루는 것이지. 다른 사람들과 조화를 이루어야 하는 것이야말로 부조화 아니겠나. 자기만의 인생 - 이건이 정말 중요하네. 주변 사람들의 인생도 중요하지 않는냐고 묻는다면, 글쎄, 누군가 도덕가인 체하고 싶다거나 청교도인이 되고 싶다면, 주변 사람들에게 자신의 도덕적인 견해를 과시하려 들 수는 있겠지. 하지만 그렇지 않다면 주변 사람들을 안중에 두지 않을 거야. 게다가 개인주의에는 사실상 더욱 숭고한 목적이 있지. 현대의 도덕은 각 세대의 기준을 받아들이고 있네. 하지만 난 교양 있는 누군가가 자기 세대의 기준을 받아들이는 것이야말로 가장 추잡한 부도덕의 한 형태라고 생각해. pg 160
자책 속에는 일종의 자기만족이 있는 법. 우리는 스스로를 비난하면서도, 나 아닌 그 누구도 자신을 비난할 자격이 없다고 생각한다. 우리를 죄에서 사해주는 것은 고백이지 신부가 아닌 것이다. 편지를 완성했을 때, 도리언은 자신이 이미 용서를 받았다고 느꼈다. pg 19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