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면 세계의 질서와 영적 성장
고든 맥도날드 지음, 홍화옥 옮김 / IVP / 2003년 8월
평점 :
구판절판


내면세계의 정리 후에야 가능한 영적성장

 

 

종교인이 저술했거나 종교적인 입장에서 씌워진 책들은 일반인들에게는 쉽게 읽혀지기 어렵다. 반대의 경우로 특정부류나 계층들 내에서 너무 쉽게 두 경우 모두 종교관련 서적으로 분류되어 선입견을 가지게 되거나 그 가치가 부풀려지거나 평가절하되면서 저자의 의도와 달리 해석되고 내용들이 왜곡되어 알려진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 이것은 필자가 많은 독서량에도 불구하고 종교관련 출판물의 선택을 두려워하는 이유이다. 필자는 아직 이들 서적의 가치를 올바르게 알아볼 눈을 가지고 있지 않아 선 듯 서가에서 꺼내는 것이 망설여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필자의 연간 독서 목록을 중에 한 권씩 포함되는 이유는 이 책들이 가진 순기능 때문이다. 종교서적은 저술 목적의 특수성(?) 때문에 정독하는 이로 하여금 도덕적인 각성과 일정 이상의 치유효과를 가져다 준다. 필자가 과중한 업무와 책임감에 힘들어 하던 시기에 마음에 담아둔 무거운 것들을 의식적으로 버리게 도와준 '내려놓음' 같은 책들이 그 예이다.

오늘 이 글에서는 교회나 세속의 삶에서 많은 의무로 마음에 힘들 사람들에게 위안과 도전 그리고 지침이 될 만한 책을 하나 소개하고자 한다. 필자의 의지가 아닌 명령에 순종(?)하는 심정으로 읽었던 책이다. 요즘 업무, 가정생활, 종교생활 그리고 젊은 시절 무척 열심이던 것들에 대해 부담감을 많이 털어내고 살아가는 필자와는 조금 거리가 있는 내용이지만 일단 읽고 나서 얻은 바가 있었다.

 

책의 구성과 몇몇 페이지들을 무작위로 읽고 난 후 첫 인상은 마치 세속적인 자기 계발서처럼 콘텍스트 부분 마지막에 내용의 요약과 스스로 확인하라고 몇 가지 숙제를 내어주는 것이 그 구성에서 다소 세속적인 냄새가 나서 거부감이 들었다 내용에서는 자기의 경험담 위주로 이야기를구성하다보니 주관적인 주장들이 많았다. 하지만 이 책의 내용, 즉 교회의 일을 하는 사람들이 너무나 빠지기 쉬운 문제의 정확한 지적은 이 책을 읽어야 할 당위성을 부여한다. 저자는 그가 한때 스스로 빠졌던 오류와 그 오류로 인해 겪었던 영육간의 고통을 고백하고 그 나락 같은 시기를 잘 빠져 나온 간증을 통해 독자들, 특히 교회의 일을 하면서 더욱 빠지기 쉬운 오류와 고통을 예방하거나 좀 더 쉽게 빠져 나오길 방법을 제시한다. (필자의 생각 : 내 스스로 피해갈 수 있냐고 질문하면 너무나 어려운 도전이 될까?)

 

 

 

마리아와 마르타

 

성경에 등장하는 마리아와 마르다의 에피소드는 저자의 말하고자 하는 바를 가장 나타낸다. 두 자매는 예수님이 무척 사랑하셨다고 전해지며 친히 죽은 자들 가운데 살리신 나사로의 동생들이며 특히 마리아는 전에 향유 옥합을 깼던 바로 그 여자이다. 예수께서 베다니 마을의 이 남매의 집을 방문했을 때 마리아와 마르다는 전혀 다른 모습으로 주님과 함께 한다. 성경의 내용을 요약해 보자면 예수님와 제자들을 대접하고자 몹시 분주했던 마르다가 주님 곁에서 좀체 자리를 뜨지 않고 언니를 전혀 돕지않는 동생에 대해 예수께 하소연을 하자 예수께서는 마리아가 좀 더 좋은 것을 선택했다고 하신다. 그 말씀에서 여수는 자신과 제자의 접대에 정성을 드리는 마르다, 주님 곁에서 말씀을 듣는 마리아의 행동 모두에 대해 상식적인 가치 판단을 하지 않으셨다. 마르다가 하는 일이나 마리아가 했던 행동 모두 중요하고 가치있는 행위지만 분주하여 안절부절 못하는 마르다의 모습을 안스럽게 생각하신다. 마리아의 선택이 좀 더 좋다고 하신 이유는 주님의 말씀에 집중했기 때문도 아니고 그것이 육신에 편한 일이어서도 아니다. 마리아는 자신이 선택한 그 상태에 매우 만족을 하고 있었고 반면 마르다는 그 상태가 불만스러워했기 때문에 그런 그들 각자의 상태에서 평안한 마리아의 상태가 더 좋은 것이 아니냐고 말씀하시는 것이다.

 

오늘날 인류는 성취와 성과를 무척 중시한다. 큰 일에서 작은 일, 공적이거나 사적이거나 그 것이 무엇이든 가치가 있다고 여겨지면 분석과 가치판단을 하며 그 성과에 대해 이야기 한다. 이 것은 영에 속한 교회도 예외는 아니다. 지난 세기 교회는 그 크기는 키우고 신도수를 늘리는 일에 무척이나 열심이었던 것이 사실이다. 미국을 중심으로 한 복음주의자들의 순수한 노력과 그 열성은 무조건 부인하거나 평가 절하할 수는 없지만 그로 인한 부작용이 지금의 교회들에게 적지 않은 상처를 남겼다는 점에서 과도한 열심에 대해 좀 더 신중한 접근이 필요하다.

 

교회도 세속의 기업들처럼 성과를 중시하다 보니 목자나 신자나 할 것 없이 정작 중요한 것인 주님과의 개인적이고 깊은 만남보다는 수치와 외향적인 것에 치중하는 경향을 보였다. 외적성과나 성장을 통해 개인이나 교회에 도움이 되었던 시기가 있었지만 예전이 방법이 영원이 유효하지는 않을 것이다. 밖으로 보여주는 많은 것들에 대해서는 성경은 늘 주의하라고 한다. 밖으로 보여지고 남이 그것을 알아차린다는 것을 알아차리는 순간 내 의지의 개입여지가 많아 진다는 점을 생각하면 좀 더 쉽게 이해될 것이다. 인간이 무엇인가 하기 시작하면 그 분의 영역은 줄어든다. 그러므로 인간이 하는 어느 것 하나도 쉽게 행동할 것이 없다.

 

 

 

기대기에 족한 큰 기둥

 

자기에게 족한 일을 택한 마리아가 정말 좋은 선택을 했다는 근거는 무엇일까? 두 말하면 잔소리이지만 세상의 잣대로 보면 손님을 접대하느라 분주한 언니를 두고 손님 옆에 앉아만 있는 동생 마리아의 행동은 욕을 들은 정도는 아니어도 결코 칭찬받을 만한 것은 아니다. 하지만 마리아의 행동에도 예수의 말씀도 그만한 이유가 있다.


마리아는 이전에 예수님의 영광을 높이는데 일조한 주인공이기도 하다. 예수께서 한 바리세인의 초대를 받아 식사를 하실 때 한 여인이 와서 향유 옥합을 깬 후 그 기름으로 예수님의 말을 씻기고 눈물을 흐르며 머리채로 닦은 일이 있다. 이 때 사람들의 반응을 통해 마리아가 성경에는 기록되지 않았지만 큰 죄를 지었던 것을 알 수 있다. 그것은 그녀의 가족사를 통해서도 짐작할 수 있는데 나사로 남매는 어린 시절부터 고아로 매우 가난한 고을인 베다니 마을에서도 유난히 어려운 가정이었고 나사로가 죽었던 이유도 영양실조가 그 원인이었을 것이라는 가설이 있고 보면 마리아가 먹고 살기 위해 어떤 죄에서 오랫동안 벗어날 수 없었을 것을 추측할 수 있다. 마리아는 그 사건을 통해 죄를 고백하고 향유와 눈물을 통해 자신을 제물로 바친 격이 되었다. 이 사건은 마리아에게는 인생의 큰 전환점이 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성경에는 예수께서 나사로 집에 오셨을 때 곁에서 주님의 말씀을 듣던 마리아가 어떤 상태인지 자세히 기술되어 있지 않지만 예수님의 말씀을 통해 볼 때 당시에 마리아는 평온함과 기쁨으로 충만했을 것으로 추측이 된다. 옥합사건(?)을 통해 마리아는 죄의식, 걱정 등으로 채워진 혼돈스러운 마음이 정리되어 평온해졌고 주님과 그분의 말씀에 온전히 기대어 있었던 것 같다.

 

마리아와 같은 경험이 없었던 것으로 보이는 마르다는 사랑하는 예수님을 시중드는 일에 열심이었지만 그 순간에도 몸과 마음이 분주하여 불안을 겪었던 것 같다. 아마도 우리가 흔히 겪은 일상적인 스트레스 수준 이었을 것으로 보이지만 동생 마리아의 상태와 비교해 보면 그 정도에 상관없이 결코 우리가 선택해서는 안 되는 상태이다.

 

 

후유증

 

저자는 자신의 철저한 무너짐을 통해 내적평형 상태를 포함한 내적성장 없이는 아무리 크고 완벽한 외적성장도 헛된 것이라며 책의 중반부 이후 계속 역설한다. 특히 개신교 목사들은 다른 종교 지도자들과는 구별되는 입장 때문에 외적성장에 대한 욕심과 자기 힘으로 그것을 이루려는 욕망에 노출 될 위험이 더욱 크다.

 

그리고 그 후유증도 무척 위험한데 저자처럼 그 피해가 스스로를 치는 경우는 그나마 다행인 경우로 볼 수 있다. 그 피해가 가족과 공동체에도 전이될 수 있기 때문이다. 저자가 그 날 아침 겪은 상태는 필자의 경험에 비추어 보면 병리학적으로는 신경증의 일종이었을 추측된다. 그 중에 남자들에게 더 많이 발견되는 불안증세였을지도 모른다.

결과적으로 저자에게는 그런 상황이 그날 찾아온 것이 다행이었다. 그런 특별한 일은 매우 적절치 못한 시기에 더욱 적절치 못한 방법으로 찾아올 수도 있기 때문이다.

 

 

 

내적균형과 영적성장

 

외적성장은 그에 상응하는 무게(중압감, 스트레스, 시험)를 동반하는데 이 외적 무게를 지탱하고 중심을 잡아주는 것이 내적인 균형이다 큰 나무는 작은 바람에는 미동도 하지 않지만 엄청난 바람 앞에서는 뿌리 채 뽑힌다. 겉으로 보이는 강건함만 믿고 있다가는 더 큰 바람이 올 때 무방비 상태로 넘어질 수 있다. 강한 도전의 시기나 시련의 시기에 우리는 잡아 줄 내부의 기둥은 늘 만들고 정비해야 하는 것이다. 내적으로 미성숙한 사람들은 마음에 중심 기둥을 세우는 방법을 찾고 그 것을 키우는 대신 쉬운 방법인 세상의 물질적인 것으로 외적 기둥을 세운다. 그것들은 우리가 세속의 유혹이라 부르는 돈, 명예 등을 포함한 일련의 욕망과 욕구들이다. 이것들은 영원하지도 않고 가벼운 돌풍에도 쓰러져 버릴 수 있어서 기대지 않는 것이 낳을 것 같은 것들이다.

 

영원이 쓰러지지 않는 기둥은 크신 그 분과의 만남을 통해서 이루어지고 또 지속적인 교재를 통해 그것을 유지하고 단단하게 만들 수 있다.

 

사족 정리되는 않은 생각의 잔뿌리들

마르다와 마리아의 이야기를 통해 책의 논지를 쉽게 파악할 수 있었다. 저자가 겪은 그날 아침의 일은 필자의 경험과 어느 정도 일치하여 그런 점에서 이 책을 쉽게 놓아버리지 않았던 것 같다. 필자처럼 치열하지 않게 (긍정적이던 부정적이던 간에…) 사는 사람 입장에서는 좀 담담하게 읽어나갈 수 있던 내용들이었지만. 교회 활동에 열심인 분들과 목회와 교회 사무 등으로 무척 바쁜 목회자들에게는 이 내용들이 어떤 의미로 받아들여질 수혼란스러운 부분도 있는 책이다. 하지만 분명 도전이 될 책이다. 당연하게 해야 할 일 못하는 현실과 이상의 괴리에 대한 고민도 해보았다. 결론이 날 것도 아니지만 계속 생각해보고 곧 행동해야 할 것들이라는 생각이다.

내적균형이라는 문제는 종교를 아직 가지지 않는 분들 특히 기독교 신자가 아닌 분들에게도 심각하게 생각해 볼 문제이다. 밖으로 보이는 것들을 추구하고 소비적인 생활은 상당한 에너지를 소모를 가져온다. 사람은 기계가 아니다라는 말은 그냥 하는 말이 아니다. 한의학에서 말하는 기가 쇠하였다는 말은 에너지의 균형에 관한 이야기이다.

말미로 갈수록 점점 자기개발서 같이 되어가는 아쉬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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