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등학교에 올라가면서 내가 어디쯤 서 있는 사람인지 헷갈리기 시작했던 시기가 있었다.
<유자는 없어>는 바로 그런 시기를 통과 중인 아이들의 이야기다.
거제도에서 자란 지안과 수영이,
그리고 이곳이 처음인 전학생 해민이.
세 사람은 같은 공간에 있지만 이곳을 바라보는 감각은 조금씩 다르다.
학교와 집을 오가는 일상 속에서 이들은 우연처럼 영화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하고, 각자의 자리에서는 쉽게 꺼내지 못했던 말들이
영화라는 매개를 통해 조금씩 오간다.
지안은 공부를 잘하는 아이였다.
중학교에선 전교 1등을 할 정도로 잘했던 지안은 그 말이 곧 자신을 설명해주는 말처럼 따라다녔다.
하지만 고등학교에 올라가 더 많은 아이들, 더 비슷한 능력의 아이들 사이에 놓이면서
그 자리는 조금씩 흐려진다.
그 과정이 낯설지 않았다.
나 역시 초등학교, 중학교 때는 공부를 잘한다는 말을 듣던 편이었고 고등학교에 올라가 경쟁이 달라졌을 때
비슷한 감정을 겪었던 기억이 있다.
성적이 떨어진다는 사실보다 그동안 나를 설명해주던 말이 더 이상 나를 대신해주지 못한다는 점이
더 힘들게 다가왔다.
지안이 흔들리는 지점들이 내가 한때 고민했던 질문들과 겹쳐 보였다.
거제도라는 배경도 인상적이었다.
지안과 친구들에게 이곳은 벗어나고 싶은 곳이자 너무 익숙해서 특별할 것 없는 장소다.
그런데 전학생 해민이가 등장하면서 같은 공간이 전혀 다른 얼굴로 보이기 시작한다.
해민이에게 거제도는 낯설고, 새롭고, 잠시 머무는 여행지 같은 곳이다.
그 시선을 통해 지안과 수영은 처음으로 자신들이 자란 공간을 조금 떨어져서 바라보게 된다.
늘 있었기에 생각해보지 않았던 장소, 당연해서 의미를 붙이지 않았던 일상에 미묘한 거리감이 생긴다.
그 차이가 흥미롭게 다가왔다.
이야기에 또 다른 축의 인물은 혜현 언니다.
서울에서 작가로 살아가고 있지만 그가 쓰는 이야기는 결국
자신이 자란 곳과 그 시절의 사람들에서 출발한다.
그리고 그는 다시 거제도로 돌아온다.
지금 이곳을 떠나고 싶어 하는 지안과 친구들, 떠났다가 돌아온 혜현 언니의 위치는 정반대에 가깝다.
그래서 더 흥미로웠다.
어디에 머무는지가 아니라 어떤 시선으로 그 시간을 지나고 있는지가 중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책을 읽는 동안 무언가가 크게 바뀌었다기보다
내가 지나온 어떤 시기를 다시 천천히 들여다보는 느낌이 들었다.
책을 다 읽고 나서 제목이 다시 눈에 들어왔다.
제목이 왜 '유자는 없어' 일지 읽기전부터 생각했는데, 읽고나니 어렴풋이 알 것 같다.
'유자는 없어'가 ‘유지안은 없어’처럼 들렸다.
그 말은 지안을 지우는 단언이라기보다, 예전의 자신을 그대로 유지한 채 다음 단계로 갈 수는 없다는 일종의 자기선언이 아닐까 싶었다.
한때 자신을 설명해주던 이름과 자리에서 조금 벗어나야 하는 시기.
이 제목은 지안이 어른이 되어가는 길목을 뜻하는 의미가 아닐까 생각해보기도 했다.
그래서 나는 이 책을 지금 자신의 위치를 고민하는 중·고등학생들에게도,
이미 그 시절을 지나왔지만 한때의 자신을 다시 떠올려보고 싶은 어른들에게도 추천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