흐르는 편지
김숨 지음 / 현대문학 / 201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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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위안부 소설 그 두 번째 작품 "흐르는 편지", 

작가의 전작 "한 명"이 살아돌아온 할머니의 이야기였다면, 

이번엔 15살 소녀가 위안부로 하루하루 생존하는 이야기다.


 얼마 전 본 맘마미아 2에서 딸이 어머니를 가장 가깝게 느끼는 순간이 새 생명을 잉태했을 때라는데, 영화의 모든 스토리 중 가장 공감 가는 이야기였다. 
다른 스토리가 아무리 막장이어도 그 스토리만큼은 감동적이었는데, 오늘 소개할 책은 새 생명을 잉태했지만 너무나 불안하고 슬픈 15세 소녀의 이야기이다. 아기를 가졌지만, 그 아기는 소녀를 강제로 범한 수많은 일본군 중 하나. 소녀는 강가에서 싯쿠(콘돔)와 몸을 씻으면서, 엄마에게 전해지지 않을 편지를 강가에 쓰면서 흘려보낸다.

 최근 몇 년 사이 일본 위안부 관련 영화와 책들이 등장하고 있다.
알고 있지만, 자세히는 모르는 이 문제에 대해서 다루는 책과 영화가 많아진다는 건 너무나 좋은 현상이다. 실제로도 아래에 소개하는 영화들을 극장에서 어린 학생들이 많이 보고 있어서 엄청나게 뿌듯했다.
위안부 할머니가 실은 나와 가까운 이웃의 문제일 수도 있고, 더 이상 침묵해야 할 문제가 아니라고 대중적으로 이야기한 영화 "아이 캔 스피크". 
학창시절쯤 TV로 나왔었던 관부 재판의 실화를 다룬 "허스토리".
그리고 어쩌면 흐르는 편지와 가장 비슷한 입장에 있는 영화 "귀향" 시리즈.
실은 귀향의 경우에는 보고 난 뒤의 후폭풍이 두려워서 극장에서 차마 보지 못했다.
영화가 실제 상황과 비교했을 때 매우 순화된 상황이라는 걸 알고 있음에도 너무나 많은 걸 함축하는 장면들이 모든 걸 설명해주는 영화였다.


 일본군 위안부 관련 영화들. 대중성을 살려 만든 작품, 실화 사건을 토대로 한 작품, 

소녀들의 상황을 그린 작품 다양하다.


귀향을 보면서 그대로 전달되었던 소녀들의 불안한 마음이 텍스트로 옮겨온 느낌이다.
돈 벌면서 공부가 하고 싶어서, 혹은 어려운 집안 형편상 팔리듯이, 노래를 할 수 있다길래, 길 가다가 그냥 잡혀온 소녀들의 나이는 적게는 13살에서 많게는 20살 남짓 되었다.
엄마가 지어준 이름이 아닌, 이미 죽은 소녀의 이름으로 불리거나, 이미 죽은 소녀의 방과 옷을 입고 죽지 못해 사는 소녀 금자가 바라보는 위안소에서의 일상은 정말인지 처참하다.
한참 꽃피울 나이에 그녀들은 어쩌다 이런 곳에서 보내게 되었을까.


아기가 생겼지만, 아기가 죽어버렸으면 하는 소녀의 불안. 

엄마가 그립지만, 오카상과 오지상에게 감시당하는 15세 금자


아기를 가질 수 없을 거라 생각했는데, 생긴 아기의 존재가 신기하기도 하지만. 자신을 처참히 범하는 짐승 같은 일본군 중 한 사람의 아이라고 생각하니 끔찍하기만 하다.
주변에 이미 아기를 낳은 상황들을 보면서, 혹여라도 장애가 있는 아기를 낳거나, 사산하면 어떡하나 불안해한다. 아기가 그냥 죽었으면 하지만, 다른 한편에서는 나날이 커가는 아기의 생명을 느끼기도 한다.
임신한 상태를 들키면 아기집 드러낼까 봐, 조심스럽게 숨기기도 하는 소녀의 불안함이 고스란히 전달되는 소설이다.


아기가 죽기를 바라면서도 또 무사하길 바라는 소녀의 불안한 심정을 절절히 그려냈다.


아기를 가졌지만, 여전히 짐승 같은 일본군은 금자를 범한다.


 고향집에 되돌아가고 싶어도 버릴 대로 버린 몸이라 되돌아가지 못한다고 생각하고, 엄마가 너무 그립고 보고 싶지만, 영원히 전달되지 않을 편지를 강가에서 쓰면서 흘려보내며 하루를 견딘다.
소녀들의 상황이 너무나 처참하게 묘사되어 있어서, 시적으로 쓰인 금자의 편지와 속마음이 너무나 아프다.


 작가 김숨의 일본군 위안부 소설 전작인 "한 명"은 살아남은 할머니들의 이야기이다. 이번 소설은 15세 소녀의 시점으로 위안부 생활을 그렸다.


 작가의 전작은 위안소에서 살아남은 할머니의 이야기를 그린 "한 명"이라는 소설이라는데, 아직 읽어보진 않았다. 하지만 이 소설이 아마도 할머니나 함께했던 분들의 기억이 아닐까 싶다. 
할머니나 고모님들 시대에 흔했다던 조혼 풍습(19세에 시집가셨다고 한다. 나이 많은 상대나, 재혼, 나이 어린 상대에게)이 나오기도 한다. 할머니의 이름이 항상 남자 이름 같다는 생각이 들었었는데, 엄마에게 들어보니 당시 창시 개명을 해야 해서 ~자 돌림의 이름이 너무 싫어서 그렇게 지으셨다고 한다.
아마 그 시대를 살았던 분들은 기억하시리라. 그때, 그 시절을.
그리고 우리는 영원히 잊지 말아야 하며, 널리 알려야 할 것이다.
전쟁이라는 상황에서 꽃다운 소녀들에게 벌어졌던 만행과 슬픈 기억을.
소녀가 느꼈을 한없는 불안을.


동네 공원에 있는 평화의 소녀상. 늘 갈 때마다 소녀들을 위해 기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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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살 뻔한 세상
엘란 마스타이 지음, 심연희 옮김 / 북폴리오 / 201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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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캐나다의 재능 있는 각본가 엘란 마스타이의 SF 소설


살아가다 보면, 우리의 미래는 자꾸만 디스토피아가 아닐까 상상을 하게 된다. 
수많은 SF 소설을 보아도 늘 유토피아적인 미래보다는 디스토피아적인 내용들로 가득하다. 
소설만 그러한가. 영화를 봐도 미래는 잿빛이 지배적이다.
현재 일어나는 기후적 징후나, 사건들을 보면 후자로 가는 것이 설득력 있게 느껴지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현재의 위기가 오히려 평화로운 세상으로 갈 수 있는 열쇠가 될지도 모른다.


미래는 빌어먹을 악몽 같다. 암울한 미래를 그린 영화와 드라마들. 

블레이드 러너, 칠드런 오브 맨, 시녀 이야기


미래는 어디로 흘러갈지 모른다는 생각에서 출발한 SF 소설인 우리가 살 뻔한 세상.
일단 이 작품의 작가 엘란 마스타이는 영화화된 왓 이프로 이미 할리우드 블랙리스트 시나리오로 주목받은 바가 있다. 원작의 재기 발랄함과 달리 살짝 정신없었던 영화지만, 꽤 흥미로운 연애 이야기였다.
연애라기보다는 썸에 가까웠지만.
(당시 그 트렌드가 유행이었는지, 남녀 간의 썸 타는 내용의 영화가 많이 나왔다.) 
호감 있는 두 남녀가 친구 사이에서, 친구 이상으로, 또 연인으로 발전하면 어떨까라는 전제하에 진행되는 스토리로 다니엘 래드클리프와 조 카잔이 나름 상큼한 매력을 선보였던 작품이다.


왓 이프로 이미 할리우드 블랙리스트로 주목받은 바 있는 재능 있는 각본가 엘란 마스타이의 SF 소설이라니 흥미롭지 아니한가.


소설은 주인공 톰의 회상으로 시작된다. 
인류는 현재와 다른 2016년의 유토피아에 살고 있다. 
1965년 위대한 과학자 라이오넬 구트라이더가 발명한 무한 에너지 덕분에 인류는 즐거움을 추구하며 풍요로운 세상 속에서 살고 있었다. 
유능하지만, 이기적인 아버지 밑에서 낙오자로 살아가던 주인공 톰 배런은 아버지의 회사에 낙하산으로 입사하게 된다. 
그 후 아버지가 야심 차게 준비한 시간 여행 프로젝트를 진행하면서 만나게 된 페넬로페 베슐러와 사랑에 빠지게 된다. 하지만, 그 결과로 프로젝트에 지대한 오점을 남기게 되고 사랑하는 여인의 죽음을 망연자실 바라보게 된 톰은 홧김에 시간 여행 장치를 타고 1965년 구트라이더 엔진 초연의 현장으로 가게 된다. 본격적인 이야기는 이때부터 시작되고, 톰이 과거의 순간으로 간 그때부터 걷잡을 수 없는 상황으로 흘러만 간다. 

지구의 궤도는 바뀌지도 않고 바꿀 수도 없으며, 영원히 똑같을 것이다.


어머니가 사고로 돌아가시고 유능하지만 이기적인 아버지 밑에서 자란 주인공 톰. 

유토피아에서 살아가고 있지만, 그 세계가 과연 유토피아인 것인가 의심케 하는 구석이 있다.


달라진 과거 뒤에 돌아온 2016년은 톰이 살던 그 유토피아와는 너무나 다른 세상이었다.
현재 2016년과 별로 다를 것이 없는 디스토피아에 가까운 그 시대에 톰은 존 배런이라는 이름의 유명한 건축가로 살고 있었고. 문학적으로 성공한 어머니가 살아계셨고, 학문적으로나 소설가로나 아내보다 뒤처지는 삶을 살고 있는 아버지가 있었다. 또한, 존재하지 않던 여동생까지.
사랑했던 여인과 닮은 여자와는 금세 사랑에 빠지는 행운을 얻기까지 한다.
달라진 현재지만, 그 상황이 오히려 톰에게는 더 유리한 상황이 된다.
과연 톰은 어떻게 해야 할까.


톰이 살던 2016년 유토피아의 환경에서 봤던 건물을 그대로 그려내서 유명한 천재 건축가로 알려진 존.


톰이 살았던 2016년과 존이 사는 2016년의 비교.


당연하게도 이야기는 그렇게 호락호락 전개되지 않아서, 존의 세계에서 살아갈수록 톰 안의 존이 점차 눈을 뜨게 된다. 백 투 더 퓨터의 마티가 과거나 미래로 돌아가서 자꾸만 뭔가를 변경하면서 일이 더 복잡해지듯이, 나비효과에서 더 좋은 과거를 위한 변화를 줬지만 훗날 걷잡을 수 없는 영향을 줬듯이.
시간여행을 하고 과거를 바꾸면서 생긴 평행 세계들 속에 있을수록 점차 크고 작은 문제들이 생기게 된다.


과거를 바꿀수록 뭔가 다른 문제가 생기고, 시간 여행과 평형 세계의 이야기들이 가득했던 영화들. 

하지만 궁극적으로 이 책이 말하고자 했던 스토리는 미드나잇 인 파리의 결말과 같지 않을까? 

사람들은 지금 살고 있는 시대가 가장 좋은 시대임을 깨닫지 못한다는 점 말이다.


톰은 점차 존으로 변화되고 가고 있고, 그에게 잠식 당해 가고 있었다.


자신이 살고 있던 세계를 망친 죄책감에 시달리는 톰.


읽으면 읽을수록 점점 더 흥미진진해지는 스토리에 자꾸만 빨려 들어간다.
읽다 보면 예상치 못했던 반전들이 등장하면서 소설의 결말을 더 알 수 없게 되어 버린다.
과연 톰의 꼬여버린 시간여행의 끝은 어디를 향할 것인가.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잘 와닿는 이야기 같다.


소설은 마치 웹 소설처럼 2~3페이지 분량의 짧은 챕터들로 구성되어 있는데, 산만한 독자를 위해 매우 축약적이면서도 다음 사건이 궁금하도록 스토리가 매우 촘촘하게 잘 짜여있다.
그리고 유토피아에서의 2016년을 축약해놓은 줄거리 축약판도 있다. 스토리를 읽다가 잊어버리거나, 더 빠르게 진행하고 싶은 독자는 이 부분만 읽고 다음 챕터로 넘어가도 될 정도로 편한 부분이다.
드라마로 치자면, 과거 줄거리 회상 장면 같은 느낌이랄까.
타고난 스토리텔러의 꼬이고 꼬인 한 남자의 시간여행 및 평행세계에 대한 SF 소설.
읽다 보면 어렸을 때 본 환상특급처럼 간담이 서늘해지기도, 작가 자체의 긍정적인 에너지가 느껴지는 소설이다.
결국 우리에게 중요한 건 오늘을 살아가는 자신이며, 어떤 방향으로 살 것인가에 미래가 변하는 것이다.


무더운 여름 별마당 도서관 드림 트리와 너무나 잘 어울리는 SF 소설이었다.


주인공 톰 배런이 평행 세계의 존 배런이 되어 했던 즉흥적인 연설은 마치, 이제는 세상에 없는 스티브 잡스의 연설 같다. 
그의 인상 깊었던 연설을 마지막으로 읽어보자.
소설 속 주제는 결국 여기에 함축되어 있었다.


우리 모두는 기대에 못 미치는 자들입니다.
우리는 스스로의 기대에도 미치지 못하고,
이 세상의 기대에도 미치지 못합니다.
건축이란 우리 삶이 담긴 예술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기적 속에서 살 수 있습니다.
이 세계가 우리의 상상력을 풀어내는 데 필요한 재료를 주지 않는다면,
우리가 그것을 달라고 요구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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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재기록을 읽으니 부끄러워지는군요. 더 많이 읽지 못해서 안타깝습니다. 열대야라 무더운 날씨인데, 잠 못 이루는 밤에 열심히 책읽어야 겠어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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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북이는 언제나 거기에 있어
존 그린 지음, 노진선 옮김 / 북폴리오 / 201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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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그린의 신작 소설 거북이는 언제나 거기에 있어는 마리 로랑생의 키스를 떠올리게 한다.


존 그린의 소설 원작은 읽어보지 못했지만, 너무나 유명한 영화 "안녕, 헤이즐 (원제 잘못은 우리 별에 있어). 실은 신파 멜로물은 좋아하지 않아서 나중에서야 영화를 보게 되었지만, 그냥 그런 하이틴 로맨스물이라고 생각했던 영화는 생각보다 깊이 있으면서, 반전 있는 영화여서 놀랐었던 기억이 있다. 
오, 좀 신선한데? 그 이후로 존 그린이라는 작가를 주목하게 되었다.
잘못은 우리 별에 있어가 얼마나 유명한지, 최근 본 앤트맨 앤 와스프에서도 주인공이 그 책을 읽는 장면이 있을 정도니까.


유명한 vlogger이기도 한 작가 존 그린의 전작 잘못은 우리 별에 있어는 

영화로도 개봉되어 큰 화제를 모은 베스트셀러이다.


그 이후로 처음 접하게 된 작가의 후속작이자 20세기 폭스사에서 영화화가 확정된 작품인 거북이는 언제나 거기에 있어. "잘못은 우리 별에 있어"라는 제목이 셰익스피어의 작품에서 나오는 한 문구를 따서 만들었다면, 이번엔 스티븐 호킹이 한 말이라고 하는 저 문장을 제목으로 한 작품인데, 그림을 보면 뭔가 좀 심오하게 빨려 들어간다.


존 그린의 소설의 제목은 로맨스 소설 제목이라기엔 뭔가 평범하지 않다. 

문학 작품의 문장 중 하나이거나, 철학적인 문장 중 하나이거나.


이번 작품에서는 불안장애(?명확한 명칭을 잘 모르겠다.)와 강박 증상에 시달리는 16살의 고등학생 에이자가 주인공이다. 현대인의 가장 대표적이면서 커다란 질병을 앓고 있는 주인공을 주제로 했다는 점에서 일단 이 소설은 손뼉 쳐 줄만하다. 비슷한 증상을 가지고 힘겹게 일상생활을 하시는 분들이 공감하실 정도로 굉장히 상세하게 묘사해놓았다. 어떻게 그 상황과 생각에만 빠져들어서 다른 것을 할 수 없는지.
왜 불안해하는지에 대해서 이렇게 상세히 적어놓은 소설은 지금까지 본 적이 없다.

이 소설을 읽으면서, 아주 예전에 신입생 시절 날 아끼던 선배가 해줬던 한마디가 떠올랐다.


고민은 하되, 고민 속에 빠지지 말렴.

하루하루가 걱정의 연속이고, 뭘 하던 고민의 연속인 소심하고 내성적인 성격에, 뭐가 진실인지 가치관의 혼란이 한꺼번에 왔던 대학시절은 그야말로 카오스의 연속이었는데, 매번 머리를 부여잡고 고민하는 날 보며 선배가 했던 말이다. 생전 처음 겪어보는 너무나 다른 환경에 다른 사람들 사이에서 어떻게 행동할 것인지, 누구의 장단에 맞춰야 할지가 늘 고민이었던 시절이 갑자기 떠올랐다.

주인공 에이자는 때로는 감당하지 못할 불안과 강박 장애에 시달려서, 살아가는 게 버거운 소녀다.
반창고를 붙인 자리를 통해서 바이러스가 감염돼서 죽을 거라는 생각에서 벗어날 수 없는 그 상황이 정말 생생하게 느껴진다. 때론 거울 속에 무한대로 보이는 내 모습을 보듯 보이는 상황들은 마치 책표지의 나선 모양처럼 계속 그 소용돌이 속으로 빠져드는데, 그 생각에서 도무지 벗어날 수가 없다.
이런 그녀지만, 매사 조금은 쿨한 단짝 친구 데이지와 우연히 어린 시절 잠시 알고 지냈던 데이비스의 아빠가 어마어마한 현상금이 걸린 채 쫓기는 사실을 알게 된다.


주인공 에이자의 불안과 강박 증상을 잘 보여주는 대목. 

근데, 실제로 저런 생각 한 번쯤 머릿속으로 한 적 있지 않나요?


그리고 데이지는 엉뚱하게도 데이비스를 만나서 단서를 찾아, 현상금을 타자고 한다. 그럴 의도로 데이지와 에이자는 데이비스에게 접근하게 되고, 이미 그런 상황을 너무나 많이 겪어서 인간 불신의 상황에 와있음에도 불구하고 데이비스는 에이자를 관심 있게 쳐다본다. 
그 누구도 믿고 의지할 수 없고, 처음 사람을 만날 때 상대방이 자신을 보는 건지, 그 뒤의 배경을 보는 건지 모르겠는 생각에서 벗어날 수 없는 데이비스와 침투적 생각을 하게 되면 그 생각에서 벗어날 수 없는 에이자는 서로 공통점이 있다. 둘 다 부모 중 한쪽이 없다는 사실.
그런 공통점이 있어서 그런 것인지, 어릴 적 만났던 사람이라는 점이 주는 안도감(?이라기엔 이미 데이비스가 에이자와 데이지가 가진 의도를 파악하고 있다.) 때문인지 몰라도 둘은 계속해서 끌리게 된다.
둘이 주고받는 메시지, 그리고 데이비스가 sns에 올린 글들을 보면 나이보다 너무 성숙한 느낌이 들기도 한다. 나이 또래의 대화라기엔 너무 철학적인 대화가 오고 간달까.


명언들을 포스팅해놓으면서 sns에 적는대서 

뭔가 남들과 다른 애어른의 감성이 느껴진다.


서로 끌리지만, 좋은 분위기가 되어 서로 함께 있을 때 에이자가 느끼는 불편함과 헤어 나올 수 없는 불안증은 스멀스멀 기어 나오기 시작한다. 키스를 하건, 몸에 터치가 있을 때마다 머릿속에 저런 생각들로 지배당한다니. 처음엔 책을 읽다가 맥이 확 빠지기도 했지만, 언젠가 이 정도는 아니지만, 첫 키스를 하면서 들었던 오만가지 생각이 떠오르기도 해서 공감이 갔다. 
너무 가까워지기보다, 오히려 떨어져서 문자나 화상 통화를 통해서 메시지를 주고받을 때 더 가깝게 느끼는 상황이라니. 하지만, 현대인들은 대다수가 그러하지 아니한가. 마주 보고 이야기 나누는 것보다, 메시지나 sns 댓글로 소통하는 게 더 편하고, 핸드폰 안에 모든 인간관계와 즐길 거리가 있는 사람들.


이런 달콤한 분위기와 대화로 좋게 흘러가는 것 같다가도, 

상황은 금세 변하기도 한다.


가까워지고 싶어도 그러지 못하는 두 사람 사이.


이 소설을 읽다 보면 언젠가 개봉했던 원더라는 영화가 떠오른다. 선천적 장애가 있는 주인공과 함께 하는 가족과 친구들 간의 이야기를 다뤘던 그 이야기와 살짝 비슷한 느낌이 들었다.
여주인공 에이자가 데이비스를 만나 겪었던 일련의 사건들은 결국 두 사람이 심적으로 성장할 수 있는 발판이 되었다. 
물론 성장에는 늘 그렇듯이 이별과 아픔이 있다. 
만남이 있으면, 이별이 있고. 그 후 또 새로운 만남이 기다리고 있다.
당장은 슬픔에 잠식되어 버릴 것 같지만, 시간이 지나면 서서히 아픔과 함께하는 법을 익히게 된다.


자신을 더 잘 이해해주던 아빠가 죽고 난 뒤, 

엄마와의 관계가 쉽지 않은 주인공 에이자.


영어덜트 소설임에도 이 작품이 유치하게 느껴지지 않는 건, 애어른 같은 대사들 외에도 각종 문학작품과 명언에서 옮겨온 고급진 문장들 때문일 것이다.
유난히 공감 가는 문장이 많았던 이 책에서, 가장 핵심적인 문장은 다음과 같다.
오늘 하루를 살얼음판처럼 걷는 현대인들에게 이만큼이나 위안을 주는 문장들이 있을까? 


나는 불인 동시에 불을 끄는 물이었다.

화자인 동시에 주인공, 조연이었다. 

작가인 동시에 이야기 자체였다. 

누군가의 무엇이었지만 또한 나의 나였다.

나는 왜 데이비스가 천문학에 심취하게 되었는지 
손톱만큼 이해하게 되었다. 
자신이 얼마나 작은 존재인지 적나라하게 밝혀지는 순간에 
일종의 안도감이 느껴지기 때문이다. 
또한 나선은 안쪽으로 따라가면 한없이 작아지지만, 
바깥쪽으로 따라가면 한없이 커진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아마 데이비스는 진작 알았으리라.


달달한 연애소설이라기보다는 인생의 씁쓸함을 미리 느낀 소년과 소녀의 만남과 정신적인 성장을 다룬 소설이라 더 와닿았었던 책이었다. 
하지만 걱정 마시라, 당연히 손발이 오그라드는 대사들도 가득하다.
첫 연애의 불안불안했던 심정을 떠올리며 읽었던 소설. 
추억은 언제나 가슴속에 묻은 채로 우리는 하루하루 살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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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스크바의 신사
에이모 토울스 지음, 서창렬 옮김 / 현대문학 / 201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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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의 자유를 위해 소련에서 망명한 미하일 바리시니코프가 문득 떠올랐던 

소설 모스크바의 신사


처음 책을 보았을 때 700페이지 가량의 두께에 압도당하고, 소설에서 등장하는 핵심적인 것들을 상징하는 시그니처가 가득한 번쩍번쩍한 표지에 매료되었다. 
과연 나는 이 책을 얼마 만에 읽을 것인가, 살짝 고민되었지만. 
일단 그런 걱정은 살짝 접어두시기 바란다. 
타고난 이야기꾼인 에이모 토울스의 이 작품은 잘만 집중하면 단 하루 만에 읽어내려갈 수 있는 페이지 터너이기 때문이다.

케네스 브래너가 TV 드라마로 제작하고 주연한다는 작품이라니 어떤 작품인지 도통 감이 잡히지 않았다. 더군다나 문학에 재능이 있지만, 금융권에서 일하다가 다시 소설을 쓰기 시작했다는 작가라니. 
더군다나 처음 보는 작품이었지만, 살짝 읽은 스토리에서 느껴지는 현실감과 스토리텔링에 점차 빠져들게 되었다. 
이 작품을 접하면서 가장 먼저 떠오른 건 러시아의 작가와 지식인들이었는데, 노벨문학상을 보리스 파스테르나크와 그의 작품 닥터 지바고였다. 
격동과 혼란의 시기를 다뤘다는 점에서 영국 드라마 다운튼애비도 연상되었다.
타이타닉 침몰부터 시작되는 스토리는 2차 세계대전 이후까지 다루고 있기 때문에, 격변하는 시대 속에서 적응하지 못한 귀족들의 몰락 및 계층의 붕괴, 새로운 시대에 재빠르게 적응하거나 변화에 새로운 시도를 하는 하인들의 모습을 다루고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 메트로폴 호텔이라는 한 공간 속에서 일어나는 시대상을 다루고 있기에, 영화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이 강하게 떠오르기도 했다. 


수염이 잘 어울리는 신사인 케네스 브래너가 주연이라니, 

금융맨 에이모 토올스의 두 번째 장편 소설 모스크바의 신사


격동의 시대를 살았던 러시아 지식인들이 생각나는 작품들. 

보리스 파스테르나크와 그의 작품 닥터 지바고, 솔제니친도 연상되기도 한다. 

극중 실제 격동기의 러시아의 상황과 실제 인물들이 나오기에 허구임에도 

굉장히 사실적으로 느껴진다.

격동의 시대상, 특히 계층의 붕괴를 다룬 영국 드라마 다운튼 애비와 

영화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이 떠오른다.


소설은 1922년 러시아를 배경으로 주인공인 알렉산드로 일리치 로스토프 백작이 인민위원회에서 모스크바 메트로폴 호텔에 종신 연금형을 선고받는 것으로 시작된다. 2번의 혁명과 전쟁, 피비린내 나는 숙청의 상황을 겪은 조국의 상황은 예전 같지 않다. 
메트로폴 호텔에서 늘 기거했던 스위트룸이 아닌 창고로 쓰이는 작은방에서 살게 된 로스토프 백작.
모든 소유물들은 인민의 자산으로 돌아가고, 새로운 시대에 구시대의 유물이 되어 버린 처지에 좌절할 만도 한데, 그는 당테스처럼 복수자로 살기 보다, 로빈슨 크루소처럼 생존하기를 선택했다.


새로운 시대에 구시대의 악습을 대표하는 인물이 하루아침에 되어 버린 

로스토프 백작. 그가 선택한 삶의 방식.


그는 자신에게 벌어진 상황에 비관하기보다, 상황을 이용해서 살아남기로 한다. 
처음엔 자신을 중요 인물로 대해주고 친절했던 사람들 사이에서 점차 잊혀 가면서, 좌절하기도 하고. 호텔 안의 투명인간이 돼가는 걸 경험하면서 자살을 꿈꾸기도 한다. 
하지만, 누구보다 메트로폴의 호텔에 대해서 잘 알고, 중요 만찬을 여러 번 치러본 사교술이 있는 로스토프 백작은 자신의 재능과 매력을 십분 발휘해서 호텔 레스토랑의 웨이터로 활약하게 된다.
그 과정에서 그는 새로운 세대를 살아가는 꼬마 숙녀 니나와 만나 호텔의 구석구석을 함께 모험하기도 하고, 유명 여배우인 안 나와 하룻밤 연인이 되기도 한다.


호텔에 있던 꼬마 숙녀 니나는 로스토프 백작과 친구가 되어 우정을 나눈다.


가택연금으로 급변하는 시대에도 호텔 밖으로 한 발자국도 나갈 수 없던 그의 운명은 저주일까, 차라리 축복받은 삶이었을까. 소설을 읽다 보면, 이 문제에 대해서 생각하게 된다.
격변과 혼돈의 시기에 좌절하며 살아야 할 것인지, 자신에게 유리한 상황이 되도록 적응하면서 살아야 할 것인지 말이다. 대다수는 살아남기 위해 후자를 선택하게 될 것이다. 
공산당 간부에게서 프랑스어와 영어, 서구문화에 대한 가정교사를 하기 전에, 간부와 로스토프 백작이 한 말이 기억에 남는다.

역사 학도로서,
그리고 현재를 충실하게 살고자 하는 사람으로서,
저는 상황이 달랐다면 어땠을까 하는 상상을 하며
많은 시간을 보내진 않습니다.
어떤 상황에 내몰리는 것과 상황을 잘 감수해내는 것 사이에는
차이가 있다고 생각하려 합니다.

급변하는 시기에 살아가는 백작의 머릿속.


생계를 유지하는 삶이 과연 인생의 본질일까? 

책을 읽다 보면 그 문제에 대해서도 진지하게 이야기하고 있다.


4차 산업 혁명 앞의 격변기에 살아가고 있는 우리들만큼이나 파란만장한 삶을 살아가는 알렉산드르 로스토프 백작의 삶은 충분히 매력적이다. 실제 사건과 배경 사이에서 잘 짜인 허구는 차라리 현실처럼 다가온다. 
격변기에 좌절해서 자신을 내던지기보다, 상황을 자신에게 유리하도록 지배하면서 빠르게 적응해나가면서도 기본적인 삶의 태도나 품격은 결코 버리지 않는다. 
신사와 귀족이 품격이 요즘 같은 시대에는 굉장히 매력적으로 다가온다.


니나의 딸 소피아와 함께 하면서, 로스토프 백작은 다시 새로운 삶을 살게 된다.


그래서인지, 소설 후반부에 마치 쇼생크 탈출을 방불케 하는 로스토프 백작의 활약상이 더욱 재미있다.
궁금하신 분들은 소설을 읽어보시라, 결코 후회하지 않을 것이다.
가택연금과 세월의 흐름으로 의기소침해졌을 만도 한데, 30여 년이란 긴긴 세월 동안 그는 호텔을 드나드는 사람들과 함께 유기적 관계를 맺으면서 살아 숨 쉬었다. 700페이지 때론 느긋하게, 때론 숨 가쁘게 진행되는 스토리는 도저히 2번째 장편소설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만큼 노련하고 세련된 느낌이다. 
작가의 우아하고 품격 있는 스토리텔링을 마치 앤티크 의자에 앉아서 듣는 듯한 편안함을 느낄 수 있다.
긴 호흡이지만, 점차 빠져드는 에이모 토올스의 문체에 푹 빠져들 것이다.

몰락한 귀족의 이야기를 잘 다루기도 했던 루키노 비스콘티 감독의 작품들과 비슷한 느낌일까 생각했다가, 완전히 다른 느낌에 감동받았다. 
시대에서 잊힌 유물이 되기보다, 현재 살아있는 사람이 되고 싶었던 귀족 신사의 삶의 방식.
케네스 브래너의 TV 드라마도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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