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스크바의 신사
에이모 토울스 지음, 서창렬 옮김 / 현대문학 / 201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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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의 자유를 위해 소련에서 망명한 미하일 바리시니코프가 문득 떠올랐던 

소설 모스크바의 신사


처음 책을 보았을 때 700페이지 가량의 두께에 압도당하고, 소설에서 등장하는 핵심적인 것들을 상징하는 시그니처가 가득한 번쩍번쩍한 표지에 매료되었다. 
과연 나는 이 책을 얼마 만에 읽을 것인가, 살짝 고민되었지만. 
일단 그런 걱정은 살짝 접어두시기 바란다. 
타고난 이야기꾼인 에이모 토울스의 이 작품은 잘만 집중하면 단 하루 만에 읽어내려갈 수 있는 페이지 터너이기 때문이다.

케네스 브래너가 TV 드라마로 제작하고 주연한다는 작품이라니 어떤 작품인지 도통 감이 잡히지 않았다. 더군다나 문학에 재능이 있지만, 금융권에서 일하다가 다시 소설을 쓰기 시작했다는 작가라니. 
더군다나 처음 보는 작품이었지만, 살짝 읽은 스토리에서 느껴지는 현실감과 스토리텔링에 점차 빠져들게 되었다. 
이 작품을 접하면서 가장 먼저 떠오른 건 러시아의 작가와 지식인들이었는데, 노벨문학상을 보리스 파스테르나크와 그의 작품 닥터 지바고였다. 
격동과 혼란의 시기를 다뤘다는 점에서 영국 드라마 다운튼애비도 연상되었다.
타이타닉 침몰부터 시작되는 스토리는 2차 세계대전 이후까지 다루고 있기 때문에, 격변하는 시대 속에서 적응하지 못한 귀족들의 몰락 및 계층의 붕괴, 새로운 시대에 재빠르게 적응하거나 변화에 새로운 시도를 하는 하인들의 모습을 다루고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 메트로폴 호텔이라는 한 공간 속에서 일어나는 시대상을 다루고 있기에, 영화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이 강하게 떠오르기도 했다. 


수염이 잘 어울리는 신사인 케네스 브래너가 주연이라니, 

금융맨 에이모 토올스의 두 번째 장편 소설 모스크바의 신사


격동의 시대를 살았던 러시아 지식인들이 생각나는 작품들. 

보리스 파스테르나크와 그의 작품 닥터 지바고, 솔제니친도 연상되기도 한다. 

극중 실제 격동기의 러시아의 상황과 실제 인물들이 나오기에 허구임에도 

굉장히 사실적으로 느껴진다.

격동의 시대상, 특히 계층의 붕괴를 다룬 영국 드라마 다운튼 애비와 

영화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이 떠오른다.


소설은 1922년 러시아를 배경으로 주인공인 알렉산드로 일리치 로스토프 백작이 인민위원회에서 모스크바 메트로폴 호텔에 종신 연금형을 선고받는 것으로 시작된다. 2번의 혁명과 전쟁, 피비린내 나는 숙청의 상황을 겪은 조국의 상황은 예전 같지 않다. 
메트로폴 호텔에서 늘 기거했던 스위트룸이 아닌 창고로 쓰이는 작은방에서 살게 된 로스토프 백작.
모든 소유물들은 인민의 자산으로 돌아가고, 새로운 시대에 구시대의 유물이 되어 버린 처지에 좌절할 만도 한데, 그는 당테스처럼 복수자로 살기 보다, 로빈슨 크루소처럼 생존하기를 선택했다.


새로운 시대에 구시대의 악습을 대표하는 인물이 하루아침에 되어 버린 

로스토프 백작. 그가 선택한 삶의 방식.


그는 자신에게 벌어진 상황에 비관하기보다, 상황을 이용해서 살아남기로 한다. 
처음엔 자신을 중요 인물로 대해주고 친절했던 사람들 사이에서 점차 잊혀 가면서, 좌절하기도 하고. 호텔 안의 투명인간이 돼가는 걸 경험하면서 자살을 꿈꾸기도 한다. 
하지만, 누구보다 메트로폴의 호텔에 대해서 잘 알고, 중요 만찬을 여러 번 치러본 사교술이 있는 로스토프 백작은 자신의 재능과 매력을 십분 발휘해서 호텔 레스토랑의 웨이터로 활약하게 된다.
그 과정에서 그는 새로운 세대를 살아가는 꼬마 숙녀 니나와 만나 호텔의 구석구석을 함께 모험하기도 하고, 유명 여배우인 안 나와 하룻밤 연인이 되기도 한다.


호텔에 있던 꼬마 숙녀 니나는 로스토프 백작과 친구가 되어 우정을 나눈다.


가택연금으로 급변하는 시대에도 호텔 밖으로 한 발자국도 나갈 수 없던 그의 운명은 저주일까, 차라리 축복받은 삶이었을까. 소설을 읽다 보면, 이 문제에 대해서 생각하게 된다.
격변과 혼돈의 시기에 좌절하며 살아야 할 것인지, 자신에게 유리한 상황이 되도록 적응하면서 살아야 할 것인지 말이다. 대다수는 살아남기 위해 후자를 선택하게 될 것이다. 
공산당 간부에게서 프랑스어와 영어, 서구문화에 대한 가정교사를 하기 전에, 간부와 로스토프 백작이 한 말이 기억에 남는다.

역사 학도로서,
그리고 현재를 충실하게 살고자 하는 사람으로서,
저는 상황이 달랐다면 어땠을까 하는 상상을 하며
많은 시간을 보내진 않습니다.
어떤 상황에 내몰리는 것과 상황을 잘 감수해내는 것 사이에는
차이가 있다고 생각하려 합니다.

급변하는 시기에 살아가는 백작의 머릿속.


생계를 유지하는 삶이 과연 인생의 본질일까? 

책을 읽다 보면 그 문제에 대해서도 진지하게 이야기하고 있다.


4차 산업 혁명 앞의 격변기에 살아가고 있는 우리들만큼이나 파란만장한 삶을 살아가는 알렉산드르 로스토프 백작의 삶은 충분히 매력적이다. 실제 사건과 배경 사이에서 잘 짜인 허구는 차라리 현실처럼 다가온다. 
격변기에 좌절해서 자신을 내던지기보다, 상황을 자신에게 유리하도록 지배하면서 빠르게 적응해나가면서도 기본적인 삶의 태도나 품격은 결코 버리지 않는다. 
신사와 귀족이 품격이 요즘 같은 시대에는 굉장히 매력적으로 다가온다.


니나의 딸 소피아와 함께 하면서, 로스토프 백작은 다시 새로운 삶을 살게 된다.


그래서인지, 소설 후반부에 마치 쇼생크 탈출을 방불케 하는 로스토프 백작의 활약상이 더욱 재미있다.
궁금하신 분들은 소설을 읽어보시라, 결코 후회하지 않을 것이다.
가택연금과 세월의 흐름으로 의기소침해졌을 만도 한데, 30여 년이란 긴긴 세월 동안 그는 호텔을 드나드는 사람들과 함께 유기적 관계를 맺으면서 살아 숨 쉬었다. 700페이지 때론 느긋하게, 때론 숨 가쁘게 진행되는 스토리는 도저히 2번째 장편소설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만큼 노련하고 세련된 느낌이다. 
작가의 우아하고 품격 있는 스토리텔링을 마치 앤티크 의자에 앉아서 듣는 듯한 편안함을 느낄 수 있다.
긴 호흡이지만, 점차 빠져드는 에이모 토올스의 문체에 푹 빠져들 것이다.

몰락한 귀족의 이야기를 잘 다루기도 했던 루키노 비스콘티 감독의 작품들과 비슷한 느낌일까 생각했다가, 완전히 다른 느낌에 감동받았다. 
시대에서 잊힌 유물이 되기보다, 현재 살아있는 사람이 되고 싶었던 귀족 신사의 삶의 방식.
케네스 브래너의 TV 드라마도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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