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은 여자의 얼굴을 하지 않았다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 지음, 박은정 옮김 / 문학동네 / 201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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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녀병사‘. 소년병과는 다른 느낌의 슬픈 단어. 독소 전쟁 초기에 동부전선의 소련군은 독일군의 전격전에 휘말려 연전연패, 궤멸 직전의 상황까지 몰린다. 모스크바가 함락될 위기에 몰린 이 때, 애국심에 불타는 수없이 많은 소련 여성들이 너도나도 자원하여 지옥 같은 전쟁터로 떠난다. 열 다섯 소녀부터 아기 엄마까지. 저격수로, 보병으로, 간호병으로, 공병으로, 취사병으로.
그러나 아수라 지옥도에서 살아남아 전쟁을 끝낸 그녀들에게 돌아온 것은 환대가 아니었다. 그녀들이 전쟁터에서 뭘 했을지 의혹에 찬 시선을 보내는 이웃들, 전쟁의 참상에 침묵할 것을 강요하는 남성 중심의 사회. 최전방에서 보초를 서다 새벽녘에 들리는 맑은 새소리에 눈물짓고, 군율이 엄격한 영내에서도 남는 군복으로 몰래 원피스를 만들어 입으며, 잔인한 적인 독일군 부상병도 가엾게 여겨 정성껏 돌봐주던 그네들의 감수성을 이해받기에 전쟁은 너무 잔인했다.
위화의 소설 제목처럼 ‘사람의 목소리는 빛보다 멀리 간다‘. 저자의 인터뷰 요청에 응한 200여명의 참전 여성들의 목소리는 전쟁에 관한 어떤 기록보다도 고통스럽다. 저자가 찾아오기 전까지 몇 십년을 숨겨온 기억을 어렵게 토해내는 그녀들의 눈물이야말로 지금을 사는 우리가 깊이 새겨야할 절박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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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르헤스의 말 - 언어의 미로 속에서, 여든의 인터뷰 마음산책의 '말' 시리즈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 윌리스 반스톤 지음, 서창렬 옮김 / 마음산책 / 201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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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그의 말이 글보다는 쉬울 줄 알았다. 보르헤스의 책이라고는 20여년 전 <픽션들> 한 권 읽어본 게 전부였지만, 내 독서 인생에서 제일 어려운 책이었으니. 대체로 인터뷰집은 가벼운 마음으로 슬렁슬렁 읽을 수 있는 게 미덕 아닌가.
착각이었다. 해체주의, 기호학, 후기 구조주의에 막대한 영항을 끼친 20세기의 가장 중요한 작가이자, 5개 국어에 통달한, 도서관이라 할만한 전설적인 기억력을 가진 대가가 하는 말이 쉬울 리가 있나. 보르헤스는 인터뷰어가 질문 중에 어느 작가를 언급하면 즉시 그 작가의 작품을 각종 언어로 암송한다. <픽션들>의 단편 <기억의 천재 푸네스>의 주인공(머리를 다친 후 자기가 본 것을 절대 잊지 않는 기억력을 소유하게 된다. 나뭇잎 하나, 개미 한 마리까지도)의 모델이 보르헤스 자신이라니 뭐. 이런 천재의 머릿 속을 들여다보는 게 어렵지 않다면 그게 더 이상하지 않을까.
포스트모더니즘의 창시자이지만 역설적으로 보르헤스는 자신을 19세기의 고전적인 작가에 가깝다고 말한다. 실제 그가 좋아하는 작가들은 월트 휘트먼, 프로스트, 에드거 앨런 포, 에밀리 디킨슨, 단테 같은 사람들이었으며, 그 자신 고대 영시와 노르드어 문학을 깊이 연구했다. 인터뷰 내내 이러한 작품들이 인용되고 논평된다.
악몽, 미로, 죽음, 시간, 기억. 보르헤스 작품의 핵심 키워드들과 카발라, 영지주의, 범신론 같은 개념이 계속 등장하니 인터뷰 한 줄도 쉬이 넘길 수 없다. 그래서인지 이 책을 읽고 있노라면 마치 꿈 속에서 난해한 책들로 꽉 찬 도서관의 미로를 헤매고 있는 듯한 기분이 든다.

난 의무적인 독서는 잘못된 거라고 생각해요. 의무적인 독서보다는 차라리 의무적인 사랑이나 의무적인 행복에 대해 얘기하는 게 나을 거예요. 우리는 즐거움을 위해 책을 읽어야 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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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수수빵파랑 - My Favorite Things
이우일 글.그림 / 마음산책 / 200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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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사운드 오브 뮤직>엔 어느 날 밤 천둥 소리에 놀라 하나 둘 찾아오는 아이들에게 줄리 앤드루스가 노래를 불러주는 대목이 있다. 노래의 제목은 <My Fovorite Things>. 슬프거나 무서운 일이 있어도 내가 좋아하는 것들만 생각한다면 행복해질 수 있다는 내용의 노래.
저자 이우일이 DVD로 이 장면을 보다가 떠올린 아이디어에서 시작한 이 책은 책 제목인 옥수수빵파랑(Dodgerblue라는 파란색이란다)부터 <사운드 오브 뮤직>까지 저자가 좋아하는 것들 55가지를 소개한다. 그 사람의 친구를 보면 그가 어떤 사람인지 대충 알 수 있듯, 그가 좋아하는 물건의 목록은 그의 내면이 장난기와 자유로움으로 가득 차 있음을 고스란히 드러낸다. 글만 놓고 보면 그의 만화(도날드닭!) 만큼이나 썰렁하지만, 글에서 드러나는 삶의 여유로움은 샘날 정도로 부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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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노센트
이언 매큐언 지음, 김선형 옮김 / 문학동네 / 201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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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5년, 미국과 영국은 동베를린에 위치한 소련군 사령부 지하로 터널을 파고 들어가 통신선을 따서 도청한다는 담대한 계획을 실행에 옮긴다. 작전명 골드. 이 작전에 참여하게 된 스물 다섯 살의 영국 체신국 직원 레너드 마넘이 주인공인 소설 <이노센트>는 존 르 카레를 연상케 하는 냉전 시대 첩보물이면서 한 남자와 한 여자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유약한 영국 청년 레너드는 동료들과 같이 간 무도장에서 독일 여자 마리아를 만나고, 그 순간부터 그들의 삶은 다시 되돌릴 수 없는 지점으로 나아간다. 첫 사랑의 열정과 번뇌, 다툼, 비밀, 갈등. 이를 묘사하는 지극히 아름다운 글귀들, 그리고 그보다 더 빛나는 스토리텔링. 주인공들의 앞엔 어떤 결말이 기다리고 있을까? 이 책의 제목 <이노센트>는 어떤 의미일까? 이 걸작의 마지막 장을 덮자마자 이언 매큐언의 작품을 더, 더 많이 읽고 싶다는 욕구가 샘솟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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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가 잃어버린 것을 기억하라 - 시칠리아에서 온 편지
김영하 글 사진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0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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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하의 여행기는 <김영하의 여행자> 시리즈 이후 참 오랜만이다. 콘탁스 G1, 그리고 롤라이35라는 필름 카메라의 강한 개성과 하이델베르크, 도쿄라는 대도시의 특징을 절묘하게 엮어낸 김영하의 재능에 적잖이 감탄했었다. 내가 필름 카메라로 열심히 사진을 찍어대던 때라 더욱 그랬을지도 모른다.
<네가 잃어버린 것을 기억하라>는 김영하가 두 달간 시칠리아를 여행하고 쓴 글이다. 내가 무뎌진 걸까, 아니면 이 여행기에선 김영하의 문재가 발휘되지 않은 걸까. 성공한, 하지만 반복되는 지루한 일상에 대한 중년의 환멸이 모티브가 된 여행은 좀 많이 식상하다. 김영하의 소설이나 산문 중엔 의아할 정도로 레벨이 떨어지는 게 가끔 보이는데, 이 책도 그 중 하나이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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