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책은 싱겁다. 담백하거나 심심한 게 아니라 지나치게 `싱겁다`. 중견 작가의 산문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밀도가 낮다. 길지 않은 글 속에서도 작가는 자주 길을 잃는다. <칼과 황홀> 이라는 제목은 무라카미 류의 <달콤한 악마가 내 안으로 들어왔다> 같은 관능적인 음식 이야기를 기대하게 하나, 아저씨들끼리 몰려다니며 술먹은 이야기를 지리하게 늘어놓는 게 이 책의 전부다. 이 책을 읽고 나니 성석제의 미각적 소양이 대단히 의심스러워 진다.
김연수는 내가 아는 한 가장 노력하는 작가이지만, <나는 유령작가입니다>를 읽고 있노라면 이토록 다양한 역사적 스펙트럼을 아홉 개의 단편으로 옮기려면 대체 얼마나 노력했을지 경탄하지 않을 수 없다. 이 단편들 중 <다시 한 달을 가서 설산을 넘으면>이 가장 높은 평가를 받는다고 하나, 나는 <뿌넝숴(不能說)>가 제일 마음에 든다. 전쟁이란, 삶이란, 운명이란 도대체 무엇이란 말이더냐.
저마다 80년대를 회상할때 느끼는 감정은 다를테지만, 김연수 소설의 80년대는 애잔한 슬픔으로 가득 차 있다. <네가 누구든 얼마나 외롭든>에서도 그러했듯이, 김연수는 어두운 시대가 개인에게 부과하는 슬픔과 고통의 이야기를 풀어내는데 탁월한 재주를 보여준다. 여전히 김연수의 문장은 아름다우나, 특유의 현학적인 문체는 많이 옅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