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혹하는 글쓰기 - 스티븐 킹의 창작론
스티븐 킹 지음, 김진준 옮김 / 김영사 / 2002년 2월
평점 :
구판절판


책을 좋아하는 아이들이 으레 그렇듯, 나 또한 어릴 적에다른 아이들보다 책 읽는 속도가 무척 빨랐다. 국민학생 때 우리 부모님은 주로 계몽사에서 나온 전집을 사 주셨는데(계몽사 영업사원이랑 친하셨던 게 아닐까 싶다), 없는 살림에 겨우 사 주신 책을 며칠 만에 독파하여 어른들을 놀라게 했다. 돌이켜 보면 아이 특유의 장난기와 허세, 인정 욕구가 합쳐진 결과가 아니었을까. 언젠가는 전집 한 질을 받은 날 저녁에 다 읽어치워서 엄마 아버지를 황당하게 만든 적도 있었으니. 몸이 약하고 마음도 여린데다 집이 잘 살지도 못해 주눅든 유년기를 보낼 때 유일한 자랑거리는 책을 많이 그리고 빨리 읽어 또래보다 아는 게 월등히 많다는 거였다.

그렇게 읽는 데는 누구보다 자신이 있었지만 글쓰기는 영 젬병이었다. 흰 종이와 연필을 받으면 머릿 속이 새하얘져서 어찌할 바를 몰랐다. 국민학교 3학년 때였던가, 반에서 독후감을 쓰는 시간이 있었는데 마침 그 날의 마지막 시간이라 담임선생님이 독후감을 다 쓴 사람은 제출하고 집에 가라고 하셨다. 나는 다른 아이들이 하나 둘씩 나갈 때까지도 한 글자도 쓰지 못하다, 결국 담임선생님과 둘만 남아 억지로 독후감을 써낸 창피한 기억이 있다.

그렇게 글을 잘 못 쓰는 채로 몇 십년을 살다가, 몇 년 전부터 책을 읽고 짧게나마 서평을 남기는 습관을 기르기 시작했다. 서평이라도 쓰지 않으면 책을 읽고 남는 게 별로 없는 것 같아서였다. 처음엔 단 몇 줄 쓰는 것도 힘들었지만, 몇 년 동안 쓰다보니 제법 장문의 글도 쓸 수 있게 되었다. 그렇다고 글을 잘 쓰게 된 건 아니지만 말이다. 아직도 글을 쓰는 건 짙푸른 안개 속에서 손을 뻗어 더듬더듬 어두운 밤길을 걸어가는 것 같다.

사실 지금까지 스티븐 킹의 책은 단 한 권도 읽어본 적이 없다. 장르문학을 무시하거나 싫어해서가 아니라(오히려 좋아하는 편이다) 스티븐 킹이 내가 꺼리는 호러/스릴러 문학의 대가이기 때문이다. 이 책 <유혹하는 글쓰기>도 작법에 대한 책이라 흥미를 갖게 된 것이지, 아니었으면 평생 스티븐 킹의 책은 한 권도 접할 수 없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 <유혹하는 글쓰기>는 다른 글쓰기 요령 책과는 매우 다르다. 문장은 어떻게 쓰고, 주제는 어떻게 정하는지 등의 문학적 방법론이 이 책의 주가 아니다. 스티븐 킹의 인생, 유년기부터 대학을 거쳐 결혼 후 <캐리>로 대성공을 거두고, 알콜 중독을 극복하고 죽음의 문턱까지 다가갔던 교통사고를 이겨낸 그의 삶 전체가 그만의 입담으로 흥미진진하게 펼쳐진다. 이게 너무 재미있다보니 이 책이 스티븐 킹의 창작론 책이란 걸 잊게 될 지경이다.

이렇게 자신의 삶을 펴보이는 건 자신이 특별히 작가로서의 자질을 타고난 것이 아니라, 누구나 노력하면 어느 정도 수준 있는 작가가 될 수 있다는걸 말하고 싶어서다. 그는 작가가 되고 싶으면 최소한 하루에 세 시간 이상 매일매일 글을 써야 한다고 주장한다. 작가에게 뮤즈는 어느 날 갑자기 찾아오는 게 아니라 꾸준한 노력이 쌓이고 쌓였을 때 비로소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한다는 거다. 하지만 이건 좀 걸러 들어야 할 필요가 있는 게, 스티븐 킹은 평소에도 엄청 수다스러운 데다가 아이디어가 떠오르면 직관에 의존하여 정신없이 글을 써내려가는 사람이라 보통의 작가 지망생이 따라하기 쉽지 않은 방법이다. 이렇게 수다스러운 반면, 역설적이게도 스티븐 킹은 문장을 최대한 간명하고 정직하게 쓰기를 주문한다. 부사는 최대한 줄이고, 수동태는 되도록 쓰지 말고, 플롯을 미리 짜서 이야기를 쓰지 말라고. 진실되게 한 단어 한 단어 쓰다보면 마치 화석을 발굴하듯 숨겨진 이야기가 제 모습을 드러낼 거라고 그는 말한다. 또한 그밖의 창작 팁들이 자신의 작품들을 비롯한 생생한 예시와 함께 제공되어 이 책을 풍요롭게 해준다. 그중 제일 인상깊은 것은 초고를 완성한 후 수정할 때 초고의 10% 분량을 줄이면 글이 훨씬 탄탄하고 집중도가 높아진다는 팁이었다. 항상 중언부언하는 경향이 있는 내가 특히 새겨 들어야할 내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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