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인자의 기억법
김영하 지음 / 문학동네 / 2013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주인공 김병수. 나이 일흔에 접어든 초로의 노인. 시를 쓰고 니체를 읽는 이 노인은 연쇄살인범이다. 딸 은희와 단둘이 살고 있는 그는 최근에 알츠하이머, 즉 치매에 걸렸다. 최근의 기억부터 서서히, 손가락 사이의 고운 모래처럼 흩어져버리는 몹쓸 병. 그와 은희 앞에 박주태라는 눈빛이 서늘한 남자가 나타난다. 김병수는 그도 자신과 같은 부류인 연쇄살인마임을 직감한다. 은희가 박주태에게 희생당하기 전에 먼저 박주태를 처리하리라 마음먹지만, 문제는 그의 기억이 날로 희미해져간다는 것이다.

김영하가 예능 출연으로 갑작스레 유명세를 타면서 대형서점에 김영하 코너가 만들어지고, 이 소설 또한 영화화되면서 다시 베스트셀러에 올랐다. 베스트셀러에 묘한 반감이 있는 터라 읽고 싶었지만 읽지 못하던 책인데, 이젠 유명세가 좀 사그라들지 않았나 싶어 읽어 보았다.

소설은 김병수의 일인칭 시점에서 거진 그의 독백으로만 진행된다. 사실 독백이 아니라 치매를 앓는 그가 기억을 잃지 않기 위해 기록한 메모들이지만. 그는 자신의 행동과 대화, 과거 행적들을 꼼꼼하게 기록하면서 박주태를 죽일 기회를 노린다. 그가 집 마당이나 뒤꼍 대숲에 파묻은 수많은 희생자들처럼. 그런데 뭔가 이상하다. 김병수는 자신의 기록과 기억이 조금씩 어긋나고 있음을 눈치챈다. 그는 박주태만이 아니라 희미해져가는 자기 기억과도 싸워야 한다.

이 소설을 읽고 다들 느끼는 게 다르겠지만, 나는 김영하가 ‘대체 인간은 무엇인가?‘ 라는 질문을 던지는 것만 같았다. ‘나‘를 구성하는 것은 다름 아닌 나의 기억이다. 기억 속에는 나의 삶 전체가 들어 있고, 내 기억 속에 들어 있지 않은 것은 나에겐 존재하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다. 색즉시공 공즉시색. 내 삶은 내가 아직 기억하고 있는 내 최초의 모습(내 경우는 5살 때 집 앞에서 친구들과 놀던 광경이다)에서 시작된 것이다. 그런데 만약, 내가 철썩같이 믿고 있는 기억이 틀렸다면? 나이가 들수록 그런 경험을 종종 하게 되는데, 몇 십년 간 틀림없이 알고 있다고 믿었던 게 사실은 잘못됐다는 걸 깨우치고 깜짝 놀라는 일 같은 것. 내가 곧 내 기억인데, 내 기억이 잘못됐다면, 그렇다면 나는 뭐지? 내 삶의 실체는 뭐지? 나의 자아가 무너져 내리는, 내 삶의 굳건한 기반이 발밑에서 해체되는 경험은 데카르트를 들먹이지 않더라도 누구에게나 닥칠 수 있는 위험이다. 굳이 치매가 아니어도 사람의 기억은 시간이 지나면 무뎌진다. 그래서 작중에서 김병수도 ˝무서운 건 악이 아니오. 시간이지. 아무도 그걸 이길 수 없거든.˝ 이라고 말하지 않나. 색즉시공 공즉시색. 불교에서는 허상에 집착하지 말고 세상 만물이 비어 있음을 깨달으라 말하지만, 아무리 허상이라고 해도 내 기억이 비어 있다면 나는, 나는 도대체 누구란 말인가.

짧지만 강렬한 소설. 머릿 속에서 폭죽이 터지듯 수많은 감정과 생각이 타오르는 소설. 이런 멋진 소설을 만날 때마다 행복을 느낀다. 이것이 내가 소설을 읽는 이유이다.

술도 안 마시고 담배도 안 피우고 욕도 안 하니 자꾸 예수 믿느냐고 묻는다. 인간을 몇 개로 재단하면서 평생을 사는 바보들이 있다. 편리하기는 하겠지만 좀 위험하다. 자신들의 그 앙상한 틀에 들어가지 않는 나 같은 인간은 가늠조차 못 할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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