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루 드레스 - 법과 삶의 기묘한 연금술
알비 삭스 지음, 김신 옮김 / 일월서각 / 2012년 10월
평점 :
품절


남아공의 아파르트헤이트는 우리가 알고 있는 것보다 훨씬 더 모질었다. 남아공 정부는 수십년 동안 보안대라는 공권력을 불법적으로 동원해 아파르트헤이트에 반대하는 이들을 가혹하게 탄압하고 갖은 테러를 가했다. 이 책의 제목 <블루 드레스>는 이렇게 체포당해 고문의 일환으로 감옥의 차디찬 콘트리트 바닥에 알몸으로 내던져진 필라 은드완드웨가 최소한의 인간 존엄을 지키기 위해 파란 비닐 봉지로 옷을 만들어 입은 것을 기리기 위해 화가 주디스 메이슨이 만든 비닐 드레스에서 따왔다. 이 작품은 지금 남아공 헌법재판소에 걸려 있다.
저자 알비 삭스는 국내외를 전전하며 인종차별주의에 대항하여 싸운 투사이자 법학자이다. 그 와중에 모잠비크에서 남아공 보안대에게 폭탄 테러를 당해 한쪽 손과 한쪽 눈을 잃은 테러의 희생자이기도 하다. 넬슨 만델라 집권 후 남아공 초대 헌법재판소 재판관을 지낸 그의 삶은 불의에 맞서는 용기와 놀라운 의지로 가득하다. 여기까지만 보면 이 책이 아파르트헤이트에 저항하여 인종차별 철폐를 이끌어낸 투사의 인생역정기가 아닐까 짐작할 수 있겠으나, 사실 이 <블루드레스>는 알비 삭스라는 법학자의 법철학적 사유와 고찰에 대한 이야기가 주를 이룬다. 부제(사실은 원제)가 ‘법과 삶의 기묘한 연금술‘ 인데서도 알 수 있듯, 그는 이 책에서 재판관 개인의 사적 체험과 공적 체험이 판결을 결정하는데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를 말한다. 또한 헌법을 해석함에 있어 냉철한 이성만이 아니라 법관이 갖고 있는 직관과 열정, 감수성이 고려되어야 한다는 파격적인 주장을 알비 삭스 자신이 참여한 남아공 헌법재판소의 여러 판결문을 사례로 들어 설명한다. 패러디와 종교, 동성 결혼, 공공 의료와 생존권에 관한 그의 진보적 판결문들을 읽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벅차오르는 놀라운 경험을 하게 된다.
이 책의 또 한 축을 이루는 것은 알비 삭스 자신이 참여한 ‘진실화해위원회‘의 활동이다. 아파르트헤이트 하에서 자행된 테러의 진실을 밝히고 새로운 체제로 나아가기 위한 화해를 주선하는 역할을 한 이 기관의 가장 놀라운 점은, 테러의 가해자 중에서 공개적으로 피해자에게 진정으로 사과하고 용서를 구한 사람들을 사면하는 파격적인 규정을 만들었다는 것이다. 우리로서는 절대 상상할 수 없는 일이지만(이 책을 다 읽고 난 지금도 감정적으로는 도저히 찬성할 수 없다), 그들은 이것을 아파르트헤이트 하에서 일어난 테러의 진실을 드러내기 위해서는 반드시 필요한 조항이라고 판단했다. 그렇지 않으면 가해자들이 진실을 알려주지 않을테니까(보안대의 활동이 워낙 은밀했던지라 그들의 자백 없이는 진실을 알 도리가 없었다). 대충 사과만 하면 그 모든 죄가 사해진다니 이런 게 세상에 어딨나 생각할수 있겠지만, 그게 그렇게 간단치 않다. 공개적으로 사과하고 사면받은 이들은 그때부터 주위의 차가운 시선에 시달린다. 그 전까지는 친절한 이웃, 자상한 아버지였으나, 사과를 한 후 부터는 부당한 권력에 충성을 바친 개, 잔인한 테러를 자행한 가해자가 되니까. 실제로 사면 받은 이들의 다수가 트라우마에 시달렸다고 한다. 그리고 사면 없이 모두 처벌했다면 진실 규명은 커녕, 아파르트헤이트에 부역한 다수들의 반발로 겨우 이룩한 해방 마저 무너질 가능성이 높았다. 새로운 남아공은 복수가 아닌 상호 이해와 공생, 즉 우분투(줄루족 반투어로 ‘다른 사람을 위한 인간애‘를 뜻한다)의 정신을 기반으로 화해와 재건을 시작한 것이다.
근래 읽은 책 중 이렇게 많이 밑줄을 그어둔 책이 없는 것 같다. 알비 삭스 개인의 험난했지만 고결했던 삶과 법률의 사회적 역할, 정의에 대한 그만의 뜨거운 사유가 이러한 명문장들을 만들어 냈으리라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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