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양 노트 - 유쾌한 지식여행자의 80가지 생각 코드 지식여행자 11
요네하라 마리 지음, 김석중 옮김 / 마음산책 / 201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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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요네하라 마리는 일본의 동시통역가이자 저명한 에세이스트입니다. 9살부터 14살까지 부모를 따라 체코에 거류하면서 프라하 소비에트 학교에 다닌 독특한 이력을 갖고 있습니다. 저자가 1950년 생이니 냉전이 한창인 시대에 공산주의 문화를 체험한 것이죠. 그녀는 수많은 에세이를 남겼지만, 그 에세이 전부에 이 5년 간의 경험이 꼭 들어갑니다. 요네하라 마리의 정신세계의 뼈대를 이루는 체험이라 할 수 있겠네요.


이 책 <교양 노트>는 저자가 요미우리 신문에 연재한 칼럼을 묶은 것입니다. 짤막한 칼럼이다보니 긴 호흡으로 사유를 정리할 만한 글들은 아니지만, 요네하라 마리 특유의 간결하고 재치넘치는 문장이 읽는 맛을 살려 줍니다. 대화 중에 반드시 조크를 끼워넣는다는 러시아인들의 영향을 받아서인지, 요네하라 마리가 타고난 재담꾼이어서 그런지 모르겠지만 그녀의 글은 꽤 재미있습니다. 간혹 일본인 특유의 싱거운 이야기가 보이기도 하지만요.


그녀가 들려주는 많은 이야기 중 기억에 남는 걸 하나 소개해드리겠습니다. 여러분이 익히 아시는 이솝우화 <북풍과 태양>이 있습니다. 나그네의 옷을 벗기는 내기를 하는데 북풍은 바람을 실컷 불었지만 실패했고, 태양은 뜨거운 햇볕으로 성공했다는 이야기죠. 이 이야기의 교훈은 `외부의 강요보다 스스로의 의지에 따르게 하는 게 중요하다` 정도가 되겠는데요. 저자는 이에 반론을 제기합니다.

북풍의 의지에 반하는 것으로 여행자는 자신의 의지를 명확하게 자각했다. 하지만 태양의 경우, 여행자는 태양의 의지를 마치 자기 자신의 의지라고 착각해 외투와 모자를 벗었기 때문이다. (…) 사람들은 마치 자신의 자유로운 의지를 바탕으로 한 듯 별로 필요하지도 않은 상품을 끊임없이 사고, 자신의 의견인 양 방송 진행자나 신문의 논조를 반복한다. (…) 정신의 자유를 위해서는 허울뿐인 자유보다는 자각하고 있는 속박이 더 나을지도 모른다.

- 89~90쪽, 「북풍형, 태양형」에서


이를테면 이런 거죠. 80년대에는 적이 명확했기에 싸워야할 대상도 명확했습니다. 그렇기에 대중의 의식도 명확했지요. 하지만 지금은 수많은 언론 조작과 인터넷을 통한 정보의 과다 때문에 마치 그러한 정보들이 자신의 생각인양 말하는 경우가 많다는 거죠. 사실은 내 생각이 아닌 걸 갖고 `나는 자유롭게 사고한다`고 착각하는 것입니다. 매스미디어가 제시하는 프레임에 갖혀 앵무새처럼 반복하고 확대 재생산하면서 말이죠.


요네하라 마리는 이처럼 틀 안에 갖힌 상식과 편견을 깨트리길 즐겨합니다. 그녀의 의견에 동의하든 동의하지 않든 일단 재미있는 글을 읽는 건 즐거운 일입니다. 이런 글도 있습니다. 소련의 지도자 브레즈네프가 사망했을 때, 일본의 한 러시아정치 학자가 TV에 나와 자기 나름의 `반들반들 덥수룩 이론`을 소개합니다. 소련의 지도자는 대대로 대머리 다음에 덥수룩한 머리가 등장했다는 거죠. 대머리 레닌 다음에 덥수룩한 스탈린, 그 다음 대머리 흐루시쵸프, 덥수룩한 브레즈네프라는 식이죠. 같이 TV에 나왔던 학자들은 말도 안되는 소리라는 반응이었지만, 결국 그 다음 지도자는 대머리 고르바초프가 됩니다. 소련이 무너진 후의 TV 대담에서 그 학자가 다시 등장해 ˝이번엔 덥수룩한 머리 차례니 옐친이 될겁니다˝라고 예언하고 또 맞추죠. 그 다음은 대머리 차례인데 푸틴의 머리가 점점 벗겨지는게 참 신통방통 하네요.


예전에 읽었던 요네하라 마리의 <미식 견문록>도 꽤 재미있습니다. 단순한 음식 소개가 아니라 음식과 문화에 얽힌 배경과 지식을 잘 버무려 맛깔나게 펼쳐주거든요. 북페어에서 요네하라 마리의 책을 몇 권 샀는데, 당분간 그 책들을 읽게 될 것 같습니다. 아쉬운 건 요네하라 마리가 2006년 난소암으로 별세하여 더 이상 그녀의 신작을 볼 수 없다는 점입니다. 고종석이 스스로 `요네하라 마리의 충성스러운 독자이자 숭배자`라고 고백한 그녀의 책을 말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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