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지 않는다는 말
김연수 지음 / 마음의숲 / 2012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위에서 밝힌 바와 같이 김연수는 한국의 소설가 중 제가 가장 좋아하는 소설가입니다. <네가 누구든 얼마나 외롭든>, <밤은 노래한다> 같은 그의 작품들은 한국 근현대사의 거대한 소용돌이 속에 휘말린 개인들의 삶이 마치 그리스 비극처럼 자력으로 어찌할 수 없도록 짓뭉개지는 과정을 그려냅니다. 진실과 거짓이 뒤섞이고, 열정과 욕망이 충돌하는 여러 인간 군상을 절묘하게 이어붙이고 오려내어 중국 만화경 마냥 어느 것이 진짜 모습인지 알 수 없게 만드는 그의 글재주는 동세대 젊은 한국 작가들 중 으뜸이라고 감히 말하고 싶습니다.

김연수는 소설 외에도 산문집을 가끔 냈습니다. <청춘의 문장들>, <여행할 권리>가 그것인데요. 소설들만큼은 아니지만 그의 두 산문집도 꽤 읽을만 합니다. 담담하고도 풍요로운 글을 따라가다 보면 느끼게 되는 아릿하고 가슴 먹먹한 감정들. 소설보다 가벼우면서도 위트넘치는 문장들이 읽는 사람을 기쁘게 만들거든요.

이 <지지 않는다는 말>은 올해 새로 나온 김연수의 산문집입니다. <지지 않는다는 말>이라는 제목의 뜻은 애써 이기려 노력하지 않아도 되는 삶을 말합니다. 작가의 아버지와 할아버지 세대는 갑오농민전쟁부터 근 100여년을 전란 속에서 살아왔기 때문에 이기지 못한다는 것은 곧 패배자가 되는 것이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전후 세대인 우리들까지도 매사 전쟁을 치르듯 경쟁하고 적자생존의 논리 속에 살아오고 있습니다. 하지만 작가는 ˝희망으로 가기 위해선 필연적으로 절망을 받아들여야 한다˝고 말합니다. 삶을 살다 보면 절망적인 고난이 닥치기 마련인데, 절망으로부터 도망가는 게 아니라 견디고 버텨내야 희망을 알게 된다는 거지요. 견딘다는 것은 기를 쓰고 남을 이기려고 노력하라는 게 아닙니다. 작가는 마라톤을 그 예로 듭니다. 마라톤을 하다보면 35km 지점에서 한계가 오는데, 그 한계를 견디지 못하고 포기하면 심한 좌절을 겪게 되지만 고통을 묵묵히 견디고 결승점에 들어오면 세상을 다 얻은 듯한 환희를 맛보게 된다는 겁니다. 마라톤의 목표는 자신의 한계를 견디고 완주를 하는 것이지, 다른 사람보다 더 빨리 결승점에 들어오는 게 아니니까요.

인생은 달리기를 하듯 받아들일 수 있을 만큼의 고통을 반복적으로 버티어 이겨내는 것. 한 인간으로서 매 순간 좋아하는 것을 마음껏 좋아하고, 피할 수 없는 것은 할 수 있을 만큼 견디며 극복하고, 하고 싶은 일은 지금 하면서 살아가는 삶의 자세가 인생을 더욱 소중하게 만들고 희망과 맞닿은 삶을 만들어낸다고 작가는 말합니다. 중요한 것은 남이 억지로 시켜서 달리는 게 아니라 스스로의 의지로 달리는 것이라는 거죠.

그런데 사실 전 이 책을 읽으면서 많이 실망했습니다. 일단 그간 김연수가 보여줬던 일련의 작품들에서 느낄 수 있었던 묵직함이랄까, 그런 게 꽤 부족했구요. 인생을 달리기에 비유했다고 하기엔 책 분량에서 작가의 시시콜콜한 달리기 이야기가 차지하는 비중이 너무 큽니다. 대략 3/4 정도? 나중엔 비슷비슷한 이야기에 지루해지더라구요. 그 외의 글들도 그닥 마음에 와닿지 않았구요. 전작 소설 <원더 보이>도 김연수의 이름값에 비해 약간 못 미치는 범작이라는 느낌이 있어서 김연수의 글쓰기가 이제 어느 정도 한계에 봉착하지 않았나 하는 불안감도 듭니다.

하지만 김연수는 요즘 보기 드물게 엄청나게 노력하는 작가이기에 다시 좋은 작품으로 돌아오리라 믿습니다. 또한 이 책을 읽으며 전에 몰랐던 점을 깨달았는데요. 김연수와 하루키가 작품의 성향은 많이 다르지만 작품 외적으로는 꽤나 비슷한 작가라는 것입니다. 둘 다 달리기를 광적으로 좋아하며, 아주 성실한 작가이고, 영미권 작품 번역을 즐겨하며, 둘 다 여행을 좋아하고, 음악(특히 팝송) 애호가라는 점입니다.

여담으로 예전에 예술의 전당에서 내셔널지오그래픽 사진전을 아내랑 보러 간 적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매표소 앞에서 김연수 작가와 마주친 겁니다! 딸 열무하고 사진전을 보러 왔더라구요. 사인을 받을까 말까 고민하다 사인 받을만한 종이가 없어서 결국 못 받고 아쉬워했던 기억이 있네요. 김연수 씨 책이 있었으면 냉큼 받았을텐데 아직도 후회되네요.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