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불안 - 개정판
알랭 드 보통 지음, 정영목 옮김 / 은행나무 / 2011년 12월
평점 :
저는 베스트셀러를 잘 읽지 않습니다. `다른 사람들이 많이 읽는데 굳이 나까지 사서 볼 필요가 있나` 하는 심리가 있어서 그런 듯 합니다. 한국에서 알랭 드 보통이 유명해진지 꽤 오래 되었지만, 한 권도 읽어본 적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이 책 <불안>을 읽기 전 까지는 알랭 드 보통이 소설가인줄 알고 있을 정도 였어요.
<불안>은 현대 사회에서 개인이 느끼는 ˝지위˝의 불안을 다루는 책입니다. 지위 불안의 정의, 원인, 해결의 세 꼭지로 이루어져 있지요. 지난 100여년 간, 인류를 둘러싼 부, 과학 기술, 식량, 신체적 안전, 기대 수명, 경제적 기회 등은 그야말로 드라마틱하게 발전했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발전은 또 다른 문제를 낳았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지위 불안, 즉 자신의 재산, 직업, 성취 등에 대해 심각한 불안을 느끼게 된 것이죠.
알랭 드 보통은 말합니다. 산업 혁명 이후 근대 자본주의가 부르주아지 계급을 낳기 전까지,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의 지위에 대해 불안을 느끼지 않았다고 합니다. 얼핏 우리가 생각하기에 철저한 신분제 사회 하에서는 농노가 귀족에 비해 자신의 지위에 대해 불안과 불만을 가질 것 같지만, 실제로는 애초에 농노는 신분을 극복하는게 불가능한 환경 하에서 자기와 동등한 처지의 농노들을 보며 위안을 받기 때문에 불안을 느끼지 않았다고 합니다. 우리가 4차원의 세계를 상상할 수 없듯, 농노가 신분 해방을 상상한다는 자체가 불가능하기 때문에 불안해하지 않는다는 역설이 성립하는 거지요.
게다가 중세를 지배하던 기독교는 부자와 금전을 굉장히 부정적으로 보았습니다. `부자가 천국에 가는 건 낙타가 바늘 구멍에 들어가는 것보다 어렵다`는 구절은 유명하지요. 돈은 타락과 동일시 되었고, 부자는 영혼이 썩은 자로 묘사되었지요. 가난은 고귀한 것이고, 순수한 영혼의 필수요건이었습니다.
하지만 자본주의가 확립되면서 상황이 바뀝니다. 부르주아지들이 신분제에 반기를 들면서 능력있는 사람이 걸맞는 지위를 차지해야 한다는 생각이 확산됩니다. 그렇다면 그 능력은 어떻게 평가할까요? 자본주의 사회에선 그 사람이 쌓은 부(富)가 그 사람의 능력이 되는 거죠. 게다가 표면적으로나마 기회 균등 사회가 되면서 누구나 열심히 노력하면 부자가 될 수 있다는 아메리칸 드림 류의 신화가 사람들의 머릿 속에 각인됩니다.
이를 뒤집어 말하면, 가난한 사람은 능력이 없는 사람이 됩니다. 가난한 것은 단지 불운해서가 아니라 게으르고 무능하기 때문이라는 인식이 생긴 거죠. `부자 아빠`는 좋은 아빠고 `가난한 아빠`는 나쁜 아빠라는 천박한 이분법이 먹히게 됩니다.
하지만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과연 개인의 노력만으로 부자가 될 수 있을까요? 회사를 열심히 다니고 월급을 차곡차곡 모아도 내 집 한 채 마련하기 힘든 시대, 치솟는 물가에 허덕여 한 달을 살아가기 바쁜 시대에 제게는 부자가 된다는 게 불가능해 보입니다. 내 자신의 능력 보다 내 부모의 자산이 중요한 이 시대에 무엇을 기대할 수 있을까요?
바로 이 지점에서 현대인의 지위 불안이 시작됩니다. 잘 나가다가도 한 발만 미끄러지면 경제적 어려움이 닥치고, 무능한 인물로 낙인찍히고, 타인에게 인정받지 못하게 되는 것. 이는 자신의 존재 근원에 대한 불안이기 때문에 현대인들에게 심각한 스트레스가 됩니다. 정리해고당한 가장이 집에서 어떤 취급을 받는지, 쌍용자동차 해고노동자들의 자살율이 왜 그렇게 높은지를 보면 단박에 이해할 수 있는 문제이지요.
알랭 드 보통은 지위 불안의 원인까지는 정말 탁월한 식견을 갖고 분석해내지만, 그에 비해 후반부의 해결책은 평범합니다. 한 줄로 요약하면 `철학, 예술, 정치, 종교, 보헤미안적 삶을 통해 인간 존재의 의미를 찾고 그 효능을 누리면 불안을 치유하거나 억누를 수 있다`는 겁니다. 대단히 기발한 해결책을 기대한 건 아니지만 맥이 좀 풀리더라구요.
그래도 여전히 일독을 권할 만한 책입니다. 하루하루를 살면서 언뜻언뜻 느끼던 까닭모를 불안감의 정체를 알게 되었으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