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붉은 인간의 최후 - 세컨드핸드 타임, 돈이 세계를 지배했을 때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 지음, 김하은 옮김 / 이야기장수 / 2024년 5월
평점 :
소련의 제6대 서기장 미하일 고르바초프는 전임자들과 결이 많이 다른 인물이었다. 비밀경찰을 동원하여 정적들을 제거하려 들지 않았고, 인민들을 고압적으로 다루지도 않았다. 종종 영부인 라이사 여사와 손을 잡고 거니는 다정한 모습도 소련 인민들에게는 익숙치 않은 광경이었다. 그는 심지어 러시아인인데도 술을 가까이 하지 않았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전임자들과 달랐던 그의 행보는 글라스노스트와 페레스트로이카를 통해 공산주의 국가 소련에 자본주의를 도입한 것이었다. 고르바초프는 점진적인 개혁개방을 통해 소련의 체질을 개선하고자 했지만, 역사의 수레바퀴는 그의 의도대로 천천히 굴러가지 않았다. 그 이후는 우리가 익히 아는 바와 같다.
<붉은 인간의 최후>는 노벨문학상 수상자인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가 소련 붕괴 이후 오랜 세월에 걸쳐 구소련 민중들을 만나 인터뷰한 그들의 삶이 담겨 있다. 그들의 의사와 무관하게 도입된 자본주의는 수많은 사람들의 삶을 파괴했다. 국영 기관에서 과학자로 근무하던 사람이 한순간에 직장을 잃고 청소부로 일해야 했던 정도의 사례는 셀 수 없이 많다. 소련 시절엔 모두가 가난했기에 오히려 결핍을 몰랐던 사람들이, 자유와 함께 물밀듯이 쏟아져 들어온 자본이라는 이름의 쓰나미에 휩쓸려 버렸다. 기회를 잡은 소수의 사람들은 큰 돈을 벌었지만 무법천지가 된 러시아에서 범죄의 타겟이 되어 하루아침에 목숨을 잃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1991년, 소련 공산당의 보수파들과 군이 뭉쳐 만든 국가비상사태위원회가 실행했던 8월 쿠데타는 거리로 쏟아져 나온 수십 수백만의 민중들에 의해 저지되었다. 작년 윤석열의 친위쿠데타를 우리 국민들이 막아낸 빛의 혁명과 흡사하게, 러시아 민중들은 죽을 각오를 하면서도 한데 모여 평화를 노래하며 끝없이 행진했다. 그렇게 쿠데타를 막아낸 그들은 이제 곧 좋은 세상이 올거라고 낙관했다. 하지만 그들 앞에 등장한 것은 소비에트 연방의 해체와 인민의 몰락이었다. 소련의 이름 아래 모여 있던 공화국들이 독립하고, 잠재되어 있던 민족 갈등이 폭발하여 끔찍한 살육이 반복된다. 인민들의 생활 수준이 소련 시절과는 비할 수 없이 나빠져서, 하루하루를 살아내기 위해 무슨 짓이든 하는 지옥 같은 광경이 펼쳐진다. 자본주의 아래에서 사람은 먼지이고 티끌이었다.
그래서 이 책에 등장하는 수많은 인터뷰이들의 성향도 그들의 수 만큼이나 다양하다. 역시 러시아는 스탈린 같은 독재자가 통치해야 한다는 사람들, 철지난 레닌주의는 청산해 마땅하다는 사람들, 인간이 인간다울 수 있는 나라에 살고 싶다는 사람들, 수용소와 대숙청의 시대가 당연하다는 사람들, 초강대국이었던 소련을 그리워하는 사람들…
작가의 전작 <전쟁은 여자의 얼굴을 하지 않았다>보다 훨씬 충격적이고 절망적인 책이다. 이 책을 읽다 보면 외부에서 보는 시선과 달리 푸틴의 장기 집권이 단지 그의 폭압적 독재 때문만은 아니라는 걸 알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