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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 브라이슨 언어의 탄생 - 영어의 역사, 그리고 세상 모든 언어에 관하여
빌 브라이슨 지음, 박중서 옮김 / 유영 / 2021년 6월
평점 :
내가 사랑하는 작가 빌 브라이슨의 책을 또 한 권 읽었다. 제목으로는 세상 모든 언어의 연원을 다루는 책이 아닐까 짐작할 수 있지만, 사실은 영어에 대한 책이다. 원제부터가 <Mother Tongue>이니 미국에서 태어나 영국에서 사는 빌 브라이슨의 언어는 당연히 영어가 되겠다. 빌 브라이슨은 과학과 미시사, 여행기로 유명한 작가이지만, 언어 또한 그가 다루는 주요한 꼭지 중 하나이다. 영어로 된 가장 유머러스한 글을 쓰는 작가라는 평을 받는 그이기에 당연히 언어, 그리고 영어에 대한 애정이 지극히 깊을 수 밖에 없다.
대략 10여년 전에 그가 쓴 <빌 브라이슨 발칙한 영어 산책>이라는 책을 읽은 적이 있다. 이 책은 102명의 청교도들이 메이플라워 호를 타고 미 대륙에 도착했을 때부터 시작된 미국의 역사를 통해 미국 영어가 어떻게 지금의 모습을 갖게 되었는지를 알아보려는 ‘발칙한‘ 시도였다. 빌 브라이슨의 책들이 탁월하게 재미나지만 읽다보면 뚜렷한 심이 없어서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 알 수 없는 경우가 종종 있는데, 그래도 <발칙한 영어산책>은 미국 역사를 등줄기 삼아 영어의 변천을 추적하기 때문에 그럴 염려가 적었다.
하지만 <언어의 탄생>은 위의 빌 브라이슨의 단점을 그대로 드러낸다. 열 여섯 개 챕터들을 관통하는 주제랄 게 딱히 없으니 아무 챕터나 골라 읽어도 상관없다. 물론 재미있지만 머릿 속에 남는 건 적다. 좀 심하게 말하면 영어에 대한 거대한 트리비아 모음집 같은 느낌이 든다. 이 책에서 다른 언어들이 언급되기는 하지만 단지 영어와의 차이를 드러내기 위한 보조장치에 불과하다. 그렇다고 해서 빌 브라이슨은 영어가 제일 우수한 언어라고 주장하지 않는다. 영어가 지금의 만국공통어에 가까운 지위를 획득한 게 정당하다고 주장하지도 않는다. 그는 그저 영어를 사랑할 뿐, 영어를 숭배하지 않는다.
우리나라엔 <발칙한 영어산책>이 <언어의 탄생>보다 훨씬 먼저 출간되었지만, 원래 쓰여진 순서로는 <언어의 탄생>이 앞선다. <언어의 탄생>에서 보이는 미숙함은 바로 여기서 기인한 게 아닐까? <언어의 탄생>에서 서술했던 다양한 내용을, 범위를 좁히고 밀도를 높여서 <발칙한 영어산책>을 완성한 게 아닐까 상상한다. 책의 어설픔과는 별개로 <언어의 탄생>에서 빌 브라이슨이 주장하는 내용들에 대해 독자들이 인터넷에 올린 비판을 소개하고 바로잡는 역자의 노력은 어떤 번역서에서도 본 적 없는 수준이다. 지금은 절판되어 살 수 없는, 이 역자가 번역한 마크 쿨란스키의 <대구>를 구해서 읽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