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재의 세 가지 거짓말 (양장)
아고타 크리스토프 지음, 용경식 옮김 / 까치 / 202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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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이 한창이던 시절, 대도시에 살던 꼬마 쌍둥이 형제는 폭격을 피하기 위해 엄마 손에 이끌려 시골 할머니 집에 맡겨진다. 엄마와 절연한 채 혼자 살던 할머니는 외손자인데도 쌍둥이들을 무척이나 모질게 대한다. 하지만 쌍둥이들은 굴하지 않고 나름의 살아남는 방법을 그들 스스로 익혀 나간다. 시골이라고 마냥 전쟁을 피할 순 없는 법. 형제는 온갖 참상을 보고 듣고 겪지만 마치 감정이 없는 무감각한 로봇 마냥 행동한다. 전쟁이 끝나고 해방군인지 점령군인지 모를 외국 군대가 도착하고, 형제를 둘러싼 환경은 급변한다. 쌍둥이들은 기지를 발휘해 다른 나라로 탈출할 방법을 생각해냈지만, 마지막 순간에 그들 중 한 명만 국경을 넘고 한 명은 여기에 남는 선택을 한다.

여기까지가 이 무시무시하고 독특한 연작 소설의 1부 ‘비밀 노트‘ 되겠다. 소설의 무대는 작가 아고타 크리스토프의 고국 헝가리일테고, 시대 배경은 정황상 2차 세계대전일 것이다. 1부는 두 세 페이지짜리 챕터 수십 개로 이루어져 있는데, 강렬한 야만을 너무나도 덤덤하게 그려내서 소름이 끼칠 지경이다. 전쟁은 사람의 육체만 죽이는 게 아니라 정신도 평평하게 다려버린다는 걸 증명하듯, 쌍둥이들은 어떤 모진 일을 겪어도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다. 심지어 1부에선 쌍둥이들의 이름조차 나오지 않는다. 전쟁의 참화가 일상이 되면 개인의 감정이나 아이덴티티 따위는 더 이상 중요하지 않으니까.

2부 ‘타인의 증거‘는 국경을 넘어가지 않고 집에 남은 루카스의 시점에서 이야기가 전개된다. 전쟁이 끝나고 체제가 바뀌었지만, 루카스는 여전히 할머니 집에 살면서 그가 전쟁 동안 배운 대로, 느낀 대로 살아간다. 그리고 나이가 들어간다. 이제 사람들을 억압하는 건 더 이상 전쟁이 아니라 체제다. 불온 서적으로 지정된 책 한 권 갖고 있다고 쥐도새도 모르게 사라질 수 있는 체제. 새로운 인물들이 등장하고 무대도 바뀌면서 루카스는 조금씩 세상에 감정을 드러낸다. 하지만 이상하다. 쌍둥이가 그렇게 오래 이 곳에 살았었음에도 루카스의 쌍둥이 형제 클라우스를 언급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궁금증이 더해질 무렵, 2부의 마지막 장은 거대한 반전의 서막을 올린다.

3부 ‘50년 간의 고독‘에서 독자들의 혼란은 극에 달한다. 대체 누구 말이 진실인가? 내가 지금까지 읽은 것은 그저 한 사람의 망상인가? 루카스와 클라우스. 그들은 대체 실재했던(물론 이 소설 속에서) 인물들이 맞기는 하나? 의심과 모순이 겹겹이 더해진 이야기의 미로를 따라가다 보면 그 끝에는 슬프고 처참한 사건이 기다리고 있다. 늙어버린 쌍둥이들은 한 사람은 아이덴티티를 찾기 위해, 한 사람은 진실을 숨기기 위해 서로를 마주한다. 전쟁은 끝나고 공산주의 체제도 무너졌으나, 전쟁과 체제가 망쳐버린 그들의 삶은 돌아오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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