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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자 스파이 - 나치의 원자폭탄 개발을 필사적으로 막은 과학자와 스파이들
샘 킨 지음, 이충호 옮김 / 해나무 / 2023년 7월
평점 :
* 모 버그: 괴팍하고 다재다능했던 메이저리그 포수. 야구 실력보다 지적 능력으로 유명했던(프린스턴대를 졸업하고 6개 국어를 할 수 있었다) 그는 메이저리그 오프시즌에 소르본대와 컬럼비아대 법학대학원을 다니는 사람이었다. 마침내 뉴욕주 변호사 시험에 합격했지만 그는 변호사 일보다 야구를 사랑했다. 큰 부상을 당해 더 이상 예전처럼 활약할 순 없었지만, ‘버그 교수‘만큼 메이저리그에서 화제를 몰고 다닌 선수는 없었다. 상형문자를 해독하고, 에드거 앨런 포의 시를 모두 암송하고, 아인슈타인과 비유클리드 시공간에 대해 토론하는 그의 전설적인 이야기를 언론은 무척이나 좋아했다.
* 새뮤얼 가우드스밋: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자란 가우드스밋은 가업을 포기하고 진학한 대학에서 물리학을 전공했다. 그는 물리학에 관심을 갖자마자 ‘양자 스핀‘이라는 세기의 발견을 해낸다. 이 발견으로 인해 그는 당시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양자물리학자였던 하이젠베르크와 친교를 맺게 된다. 하지만 그는 불운하게도 노벨상을 타지도, 네덜란드에서 교수 자리를 얻지도 못했다. 미국으로 이주하여 미시건 대학교에서 교수로 재임하게 된 그였지만, 젊었을 적 반짝반짝 빛나던 재능은 금세 시들었고 결국 한물간 물리학자가 되어 버렸다.
* 보리스 패시: 러시아 혁명 후의 적백 내전 시기에 백군에 가담하여 싸우다 극적으로 크림반도를 탈출, 캘리포니아로 건너가 고등학교 체육 교사가 된 인물. 하지만 보리스 패시는 고등학교 야구 코치 생활에 만족하지 못하고 미 육군 정보부에서 소령으로 일하게 된다. 그는 여기서 비밀 정보를 다루고 요원들을 관리하는 첩보 활동에 큰 매력을 느낀다.
* 조 케네디 주니어: 막대한 부와 권력을 가진 아버지의 후광을 등에 업은 잘 나가는 하버드 대학생이었던 조 케네디 주니어. 젊었고 세상 무서울 게 없었던 그는 정신나간 모험을 즐겼다. 대단히 위험한 봅슬레이 코스에서 세계신기록을 세울 뻔하기도 하고, 가파른 산에서 스키를 타다 팔이 부러지기도 했다. 한 자리에 가만히 있지 못하는 성격이었던 그는 스페인 내전에 참가(당연하게도 우파 쪽이었다)했다 즉결 처형 당할 위기를 넘기고 하버드로 돌아온다. 하지만 조에게 법학 공부는 무척이나 따분했고 그는 군 입대를 고민하게 된다.
* 프레데리크 졸리오-퀴리: 마리 퀴리의 딸 이렌 퀴리와 결혼한 프레데리크 졸리오. 둘은 성격이 매우 달랐지만 학문에 있어서는 죽이 아주 잘 맞았다. 화학자인 이렌 퀴리와 물리학자인 프레데리크 졸리오는 마리 퀴리와 피에르 퀴리의 조합처럼 원자의 구조를 연구하는데 최적의 콤비였다. 몇 번의 크나큰 좌절과 시련을 겪은 둘은 인공 방사능에 대한 연구 업적으로 노벨 화학상을 받기에 이른다.
아무런 접점이 없어 보이는 이 사람들의 공통점은 무엇일까. 바로 2차대전 중 나치의 원자폭탄 개발에 맞서 싸운 사람들이라는 점이다. 영화 <오펜하이머>에서 묘사된 바 있지만, 당시 미국과 유럽이 나치의 핵개발 속도에 느낀 공포는 상상을 초월했다. 연일 영국으로 V-1, V-2 로켓이 수없이 날아오던 시기였기에, V-3 로켓이 완성되어 원자폭탄을 싣고 뉴욕으로 날아온다는 건 미국이 상상할 수 있는 최악의 시나리오였다. 게다가 나치 원자폭탄의 개발을 이끄는 하이젠베르크는 당대 최고의 천재 물리학자였다. 그래서 맨하탄 프로젝트를 진행하던 오펜하이머를 위시한 물리학자들은 나치보다 1~2년 뒤쳐졌다는 공포감에 끊임없이 시달렸다.
그래서 미국은 나치의 핵개발을 방해하기 위해 여러 방법을 강구한다. CIA의 전신인 OSS를 창설하고 모험심 넘치는 전직 메이저리거 모 버그를 고용하여 유럽 각국에 흩어져 있는 저명한 물리학자들의 행방을 쫓고 정보를 수집한다. 보리스 패시와 가우드스밋, 정보장교와 핵물리학자라는 어울리지 않는 조합으로 알소스 부대를 창설하여 핵개발에 핵심적인 중수 생산기지를 파괴하고 하이젠베르크 납치 작전을 꾸민다. 조 케네디 주니어는 동생 JFK가 태평양 전역에서 올린 영웅적인 성과를 시기하다, 나치 핵로켓 발사장소로 의심되는 기지를 폭격하는 가미가제에 맞먹는 위험한 작전에 자원한다. 프레데리크 졸리오와 이렌 퀴리는 나치에 점령당한 프랑스에서 과학자의 옷을 벗어던지고 레지스탕스 활동에 몰두한다.
영화 <오펜하이머>가 달의 앞면이라면 이 책은 달의 뒷면 같다. 세상에 널리 알려진 맨하탄 프로젝트는 크리스토퍼 놀란의 영화 마냥 장엄하고 치열했다. 하지만 이 책에 등장한 사람들의 투쟁은 쿠엔틴 타란티노의 <바스터즈: 거친 녀석들>만큼이나 숨막히고, 로베르토 베니니의 <인생은 아름다워>처럼 코믹하면서 처연하다. 샘 킨은 단편적인 에피소드들을 소개하며 독자들에게 과학을 이야기하던 그의 전작들과 달리, 몇 년에 걸친 이 복잡다단하고 흥미진진한 이야기를 여러 인물들을 주인공으로 삼아 한 편의 소설처럼 엮어냈다. 세상엔 수많은 과학 전문 작가가 있지만 샘 킨의 <원자 스파이>만큼 스릴 넘치는 과학사 서적이 또 있을까 싶다. 이 책 그대로 영화로 만들어도 전혀 위화감이 없을 정도니까 말이다. 만약 영화화한다면 감독으로는 리들리 스콧이 좋겠다(마틴 스콜세지는 이 책의 위트를 살리기엔 너무 무겁고, 쿠엔틴 타란티노에겐 너무 장대한 이야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