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토록 평범한 미래
김연수 지음 / 문학동네 / 202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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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김연수의 소설을 읽었다. 그의 단편소설집 <이토록 평범한 미래>에는 시간을 씨실로, 기억을 날실로 삼아 엮어 낸 여덟 편의 단편이 담겨 있다. 동일한 소재와 비슷한 문체로 쓴 소설을 연달아 읽게 되니, 머릿 속에서 단편들의 내용이 뒤죽박죽 섞이는 게 그리 즐거운 독서경험은 아니었다. 하지만 역시 김연수라는 생각이 들만큼 빼어난 단편 몇몇이 있어 행복했다.

표제작 <이토록 평범한 미래>엔 주인공의 여자친구인 지민의 엄마가 젊었을 적에 쓴 『재와 먼지』라는 소설이 등장한다. 한 연인이 동반자살했다가 마치 영화처럼 미래에서 과거로 거꾸로 거스르는 인생을 한번 더 살게 된다. 역행하는 시간 속에서 자신들이 처음 만나는 순간이 언젠가는 오리라는 걸 알고 있는 그들은, 그 만남의 순간이 얼마나 환희에 찬 순간이었는지를 똑똑히 알고 있다. 만남으로 인해 일어났던 일들을 다시금 경험해 나가던 두 사람은 마침내 처음 만나는 순간에 도달하고 그 순간의 설렘 그리고 기쁨과 조우한다. 그리고 다시. 시간은 원래대로 흐르기 시작한다. 그들의 세번째 삶이 시작되는 것이다.

내 미래를 알고 있는 사람의 삶은 어떨까? 내가 알고 있는 미래가 현재에도 영향을 미치게 될까? 우리는 과거의 행동들이 쌓여 현재를 만든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이 경우엔 미래가 현재의 원인이 된다. 지민의 엄마가 쓴 『재와 먼지』는 군부독재 시절 어처구니 없는 이유로 판금을 당했고, 그로 인해 지민의 엄마는 자살하고 만다. 하지만 지민의 엄마가 대학생이 된 딸의 미래를 알 수 있다면 다른 선택을 했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김연수는 말한다. 미래를 기억해야 한다고.

미래를 기억해야 한다니 이게 무슨 말인가. 이 책 <이토록 평범한 미래>엔 이렇게 엉뚱해 보이는 묘사가 자주 등장한다. <다시, 2100년의 바르바라에게>에서 주인공의 할아버지는 연대상 절대 만날 수 없는 - 이 소설의 배경은 2020년이다 - 다산 정약용의 조카에게 직접 이야기를 들었다고 말한다. 이 수수께끼 같은 말의 의미는 이렇다. 인간이 팔십 년을 산다고 치면, 선대의 팔십 년의 이야기를 내가 들어서 또 나의 후대에게 전하면 나는 이백사십 년의 세월을 경험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내가 어머니에게 들은 한국전쟁 시절 이야기를 내 아이들에게 전하면 우리 아이들이 인식하는 세계는 현재에 머물지 않고 그만큼 넓어질 수 있다는 뜻이다. 이렇듯 이 책에서 김연수가 다루는 시간의 개념과 인식은 남다르다.

<사랑의 단상 2014>에서는 일상의 소품 같은 과거의 연애담들이 진열된다. 지훈과 리나는 네스프레소 한정판 캡슐을 선물하고, 이백(李白)의 이름을 딴 사케를 마시고, 태국의 리조트에서 영원한 여름을 보냈다. 하지만 영원한 것은 없는 법. 연애는 끝나고 무수히 많은 감정, 차마 하지 못한 말들, 끝내 부치지 못한 편지들만 남는다. 그리고 돌연 소설은 세월호 희생자들에게 그들의 엄마, 아빠, 그리고 친구들이 마지막으로 남긴 문자들로 끝맺는다. 흔한 두 사람의 연애 같았던 이야기는 사실 세월호에 탔던 소년소녀들이 아무 일 없이 맞이한 미래일 수 있었다는 뜻이리라. 그래서 김연수는 말한다. ‘한번 시작한 사랑은 영원히 끝나지 않는다고, 그러니 어떤 사람도 빈 나무일 수는 없다고. 다만 사람은 잊어버린다고, 다만 잊어버릴 뿐이니 기억해야만 한다고, 거기에 사랑이 있었다는 사실을 기억할 때 영원히 사랑할 수 있다고.‘ 나에겐 세상 그 어떤 신파보다 감정을 일렁이게 만드는 대목이었다. 그렇다. 우리에게 세월호는 아직 끝나지 않은, 기억해야만 하는 미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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