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 - 상실, 사랑 그리고 숨어 있는 삶의 질서에 관한 이야기
룰루 밀러 지음, 정지인 옮김 / 곰출판 / 202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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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이비드 스타 조던이라는 인물이 있었다. 19세기와 20세기에 걸쳐 전 세계를 돌며 어류를 연구하고 분류한, 미국이 자랑하는 이름난 생물학자. 당시 인류에게 알려진 어류의 5분의 1을 그와 그의 동료 연구자들이 발견했을 정도로 조던은 뛰어난 업적을 남겼다. 그의 보금자리인 스탠퍼드 대학 연구실엔 세계 각지에서 수집한 수천 종의 어류 표본이 몇 층 건물 높이로 보관되고 있었다.

1906년의 어느 날, ˝지구가 어깨를 들썩였다˝. 샌프란시스코 대지진이었다. 진도 7.9의 지진은 대지를 쪼개고, 수많은 건물을 주저앉히고, 그보다 많은 사람의 목숨을 앗아갔다. 조던의 어류 표본들도 예외는 아니었다. 에탄올로 가득 찬 유리병들이 산산이 조각나, 몇 천 마리의 물고기들이 바닥을 뒹굴고 있는 모습을 본 조던의 심경이 어떠했을까. 30년 동안의 컬렉션이, 평생의 업적이 한순간에 무너져 내린 그 순간이.

하지만 조던은 바로 그 순간, 바늘을 구해와 가장 가까운 물고기를 집어들더니 그 물고기의 이름이 적힌 이름표를 표본에 직접 꿰매어 붙이기 시작한다. 자신이 평생 탐구하고 명명한 물고기들의 학명을 다시는 잃어버리지 않겠다는 다짐인 양, 그는 그렇게 몇날 며칠에 걸쳐 - 물고기들이 말라서 부패하지 않도록 끊임없이 물을 뿌려 가며 - 자신의 컬렉션을 복원한다.

저자 룰루 밀러의 아버지는 이온을 연구하는 생화학자였다. 룰루 밀러가 일곱 살 때, 아버지에게 물었다. ˝인생의 의미가 뭐예요?˝ 아버지는 씩 웃으며 말했다. ˝의미는 없어!˝ 인생에는 의미도 없고, 신도 없고, 내세도, 운명도, 아무런 계획도 없다고 그녀의 아버지는 말했다. 이 광대한 우주를 지배하는 것은 오직 혼돈 뿐, 나머지 것들은 아무 의미도 없다고. ˝넌 중요하지 않아. 그러니 너 좋은 대로 살아.˝ 과학자 다운, 그러나 보통의 아버지 답지 않은 참으로 비범한 대답이었다. ‘너의 무의미함을 직시하고, 그런 무의미함 때문에 오히려 행복을 향해 뒤뚱뒤뚱 나아가‘라는 충고.

이 충고가 역효과를 발휘했는지, 룰루 밀러의 자아는 점점 약해졌다. 특히 학창 시절을 겪으면서 자존감이 작은 아이가 되어 갔다. 미성년들의 악의는 그녀에게 문을 열어주지 않았고, 밀러는 죽음까지 생각할 지경이 되었다. 그때 나타난 곱슬머리 남자. 그는 밀러를 구원해 주었고 7년을 함께 했지만, 밀러의 실수로 모든 것이 망가졌다. 남자는 밀러를 떠났고 밀러는 그가 다시 돌아올 것을 기대했지만 그는 끝끝내 나타나지 않았다. 혼돈이 다시 그녀를 덮쳤다.

룰루 밀러가 19세기의 생물학자인 데이비드 스타 조던에게 관심을 갖게 된 건 위의 에피소드 때문이다. 조던은 어떻게 그런 초인적인 의지를 갖게 되었을까? 조던의 생애를 좇아가면 내 인생도 혼돈에서 벗어날 수 있지 않을까? 어렸을 때 아버지가 말했던 것과는 다르게 인생의 의미를 찾을 수 있지 않을까? 그렇게 룰루 밀러는 이 책을 시작하게 된다.

조던은 그의 스승 루이 아가시의 가르침 대로 ‘자연 속에 신의 계획이 숨겨져 있다고, 신의 피조물들을 모아 위계에 따라 잘 배열하면 거기서 도덕적 가르침이 나오리라고 믿었‘던 사람이었다. 자연의 사다리 맨 꼭대기엔 인간이 있고, 그 아래를 순서대로 고등한 생물부터 열등한 생물까지 나열할 수 있다고. 그리고 그 순서는 그 생물 종의 도덕성에 기반하고 있으며, 나쁜 습관은 생물 종의 쇠퇴를 불러오며 그게 곧 ‘퇴화‘라고 주장했다. 그게 바로 조던이 평생을 물고기의 분류에 몸바치게 했던 이유였다. 분류를 통해 신이 세계에 부여한 질서를 깨닫는 것이 목표였다는 말이다.

과학과는 전혀 부합하지 않는 이런 광신적 목표는 조던을 사이코패스로 만들었다. 조던을 스탠퍼드 대학 초대 학장으로 만들어 준 릴런드 스탠퍼드의 부인, 제인 스탠퍼드를 독살했다는 의혹을 짙게 받았지만 이건 약과였다. 그는 자신의 이론을 더더욱 확장시켜 결함있는 인간들을 모두 없애야 인류가 열등한 종으로 떨어지지 않을 것이라 믿게 된다. 당대에 움트기 시작한 우생학의 열렬한 신봉자가 된 것이다. 스타 생물학자였던 조던의 전방위적인 노력으로 인해 ‘부적합한 자‘들에 대한 강제 불임 시술이 미국 연방법으로 제정되기에 이른다. 그렇다면 누가 ‘부적합한 자‘인가? 조던에 따르면 ‘성적으로 문란하다고 판단된 젊은 여자들, 멕시코와 이탈리아, 일본 이민자의 아들과 딸들... 그리고 성적인 전형에서 벗어난 남녀들‘이었다. 이들을 ‘집에서 끌어내 배를 칼로 긋고 혈통을 끊어버릴 권리를‘ 정부에 부여하도록 만든 게 바로 데이비드 스타 조던이었다.

조던이 ˝자연의 사다리˝에 그토록 매달린 건 아마 혼돈이 두려웠기 때문이리라. ‘이 세상에 너의 의미 따위는 없어, 너는 중요하지 않아‘라는 진실을 마주하기 두려웠던 그는 자연에 부여된 질서를 통해 자기의 위치를, 높은 성의 주인인 자신을 찾고 싶었던 게 아닐까. 조던을 따라가는 여정의 끝에서 룰루 밀러는 마침내 깨달음을 얻는다. 자연의 관점에서, 우주를 지배하는 혼돈 속에서 한 사람의 생명은 중요하지 않을 수 있다. 하지만 그 한 사람은 실질적이고 구체적인 방식으로 이 지구에게, 이 사회에게, 서로에게 중요하다. 민들레가 어떤 사람에겐 잡초일 수 있으나, 다른 사람에겐 약재이고 염료이며 소원을 빌게 해주는 존재일 수 있는 것처럼.

하지만 책은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마지막 장에서 우리는 거대한 반전, 마치 혹성탈출의 마지막 장면처럼 심장을 덜컹 내려 앉게 만드는 결말을 보게 된다. 샌프란시스코 대지진보다 확실하게 데이비드 스타 조던의 세계를 짓밟아 버린 그것을 확인하고 싶다면 이 책을 꼭 읽어보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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