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틀러 시대의 여행자들
줄리아 보이드 지음, 이종인 옮김 / 페이퍼로드 / 202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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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 흥미로운 제목이다. ‘히틀러 시대의 여행자들‘이라니. 후행의 역사를 사는 우리에겐 1930년대 나치가 집권한 시대의 독일이 야만의 정서로 점철되었을 것만 같다. 이때 나치의 만행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것은 사실이나, 그럼에도 이 시기에 많은 외국인들이 독일 전역을 여행했다. 특히 1차 대전 당시 독일의 적국이었던 영국과 미국에서 엄청난 수의 관광객이 독일을 방문했다. 1937년에만 50만 명의 미국인들이 제3제국을 찾았다니 말이다. 대체 왜 그리 많은 사람들이 독일을 찾았을까? 그들은 당시의 나치 독일을 어떻게 느꼈을까?

저자는 당대에 독일 여행이 유행한 이유로 몇 가지를 꼽는다. 저렴한 여행 경비, 아름다운 자연 경관과 도시들, 관광객들에게 친절하고 우호적인 독일인들의 품성, 독일 특유의 비범한 예술과 문학, 철학 등등. 여행객들은 곳곳에서 눈쌀을 찌푸리게 하는 유대인 혐오와 탄압을 목격했지만, 그들은 즐거운 휴가를 유대인에게 신경을 쏟으며 허비하고 싶지 않았다. 큰 돈 들이지 않고 이토록 맛있는 식사와 훌륭한 체험을 할 수 있는데 그깟 유대인이 무슨 문제라고. 대다수의 여행객들은 그렇게 나치의 만행을 외면했다.

독일을 여행한 건 평범한 관광객들만이 아니었다. 영국과 미국의 정치가, 기업가, 군 장성, 왕족, 심지어는 전 영국 국왕까지 독일에 매료되었다. 독일의 자연과 문화 만이 아니라 히틀러의 주장에도 말이다. 그들은 나치즘을 일종의 모더니티, 낡은 유럽과 대비되는 신세계로의 관문으로 인식했다. 항상 청결한 거리, 자부심 넘치고 근면성실한 국민들, 믿기지 않는 속도로 발전하는 사회 인프라. 독일에 매료된 영국과 미국의 상류층들은 이 모든 것들을 히틀러와 나치가 일구어낸 성취로 보았다. 이들은 직전의 바이마르 공화국의 혼란상과 대비되는 독일의 변모를 보며 나치즘의 열렬한 신봉자가 되어 갔다.

사실 이러한 현상의 이면엔 나치의 교묘한 프로파간다가 있었다. 나치는 순수 아리안계 혈통만 인정하기 때문에 국제주의를 증오했지만, 관광이 나치의 부정적 이미지를 불식시킬 수 있는 수단이라는 걸 잘 알고 있었다. 외국인들이 제3제국에서 인상 깊은 체험을 하여 귀국 후에 독일을 자연스럽게 칭송하게 만드는 것이 중요하다는 걸 말이다. 그래서 나치는 영미의 지도계급을 적극적으로 초청하여 나치 독일의 근대화된 모습을 시찰하게 했다. 그것으로도 모자라 베를린 올림픽을 개최하여 철저한 통제 하에 나치 독일에 평화의 이미지를 덧칠했다. 독일은 ˝평화를 사랑하고 믿을 만하며 진보를 지향하는 나라˝라고. 당시 막 등장한 동방의 공포 - 볼셰비즘 - 로부터 유럽을 지키는 방파제라고.

그리고 그 중심에는 히틀러가 있었다. 히틀러를 만나본 사람들은 그를 정중하고, 조용하고, 인내심이 많으며 ˝술 담배를 하지 않고 여자들이 겸손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포르노그래피를 적극 반대˝하는 좋은 지도자라 평했다. 그리고 여행을 통해 호감을 갖게 된 독일 국민들이 히틀러를 그토록 숭배하는 것을 보며 히틀러가 니체 철학의 초인, 진정한 위버멘쉬라고 우러르기까지 했다.

2차 대전이 발발하기까지 몇 년 동안 전개된 유럽 역사를 읽을 때마다 항상 궁금했었다. 히틀러가 전쟁을 일으켜 유럽을 참화에 몰아넣을 게 뻔히 보였는데 유럽과 미국의 최고위층은 왜 히틀러를 억제하는데 미적거렸을까? 이 책을 읽고 나니 의문이 조금 풀린 기분이다. 유럽과 미국의 수많은 시민들, 그리고 지도자들은 독일을 여행하며 나치의 눈속임에 철저히 당했고, 나치의 국가사회주의가 소련의 공산주의의 대항마로 기능할 수 있을 것이라 믿었다. 이 광범위한 수년 간의 공작이 정치인들의 판단력을 흐리게 했음을 이제 알겠다.

기시감이 든다. 지금 일본은 전후 어느 때보다 급격히 우경화되고 있으며 군사대국으로의 길을 걷고 있다. 하지만 코로나 시대가 끝나가면서 내 주변에서도 일본 여행을 가는 사람들이 크게 늘었다. 들어 보면 이들이 일본을 가는 건 히틀러 시대 독일을 여행한 이유와도 비슷하다. 상대적으로 저렴한 비용, 맛있는 음식, 친절한 국민들, 깨끗한 도시. 개인의 사적인 선택은 존중받아야 마땅하지만, 역사의 교훈까지 무시해서는 절대 안 된다. 특히나 무능하고 어리석은 지도자가 있을 때는 더더욱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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