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입니다, 고객님 - 콜센터의 인류학
김관욱 지음 / 창비 / 202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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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사 초년생 때 콜센터가 모여 있는 건물 근처에 외근을 간 적이 있었다. 볼일을 마치고 나오는데, 콜센터 상담원 수십 명이 건물 밖 흡연 공간에 삼삼오오 모여 담배를 피우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당시만 해도 - 지금도 크게 다르지 않지만 - 공공장소에서 여성이 흡연하는 게 흔치 않던 때라 꽤 충격적인 광경으로 뇌리에 새겨져 있었다. 이 책 <사람입니다, 고객님>을 읽으며 그때의 기억이 다시 떠올랐다.

저자 김관욱은 콜센터를 연구하는 인류학자이지만 본래는 의사로 출발했다. 그러나 ‘의사로서 흡연이 여성들 사이에서 확산하는 이유‘를 밝혀내기 위해 30대 중반의 나이에 인류학자로 인생의 방향을 틀었다. 그러면서 자연히 상담사 중에 흡연자가 많은 이유를 찾고자 콜센터 연구를 시작하게 된다.

그는 콜센터 현장 조사를 위해 맨 먼저 구로디지털산업단지를 찾아간다. 과거 군부독재 시절, 구로공단의 여공들은 ‘타이밍‘이라는 각성제를 먹어가며 밤새워 일을 했다면, 구로디지털산업단지에 밀집한 콜센터 상담원들은 담배를 피우며 스트레스를 견딘다. 드럭 푸드(Drug Food)가 타이밍에서 담배로 바뀌었고, ‘공순이‘가 ‘콜순이‘로 - 그네들의 자조적인 표현에 따르면 - 바뀐 것일 뿐, 그들에 대한 사회적 지위와 인식은 50년 전과 크게 다르지 않다.

콜센터는 철저한 감시와 통제 하에서 운영된다. 센터장 아래 실장, 실장 아래 파트장, 파트장 아래 선임, 그 아래 일반 상담사가 위계 질서에 따라 감시하고 통제받기 편하게 자리 배치가 되어 있다. 상담사들에게 쏟아지는 콜 수가 실시간으로 전광판에 표시되고, 상담사들이 받은 콜 수는 물론 휴식 횟수와 시간까지 초 단위로 관리된다. 무한 경쟁 시스템 아래서 상담원들은 고객 접점 뿐만 아니라 자신을 감시하고 억압하는 파놉티콘으로부터도 극심한 스트레스를 강요받는다. ‘콜 수가 곧 인격‘인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단지 이들을 ‘감정노동자‘라는 이름붙이기를 통해 연민의 시선으로만 바라보게 된다. 저자가 보기에 언론은 상담원들의 감정노동에만 초점을 맞춰 상담원과 진상 고객 간의 대립 구도로만 문제를 좁히고, 마치 고객이 상담원들을 인격적으로 대우해주는 것만으로 모든 문제가 해결될 것처럼 말한다. 그러나 콜센터 문제의 핵심은 이들을 저임금으로 착취하는 비인간적 원청-하청 구조다. 대형 콜센터 업체들이 공공기관이나 금융회사 등의 콜센터 업무를 수주하여 다른 중소규모 업체들에 하청을 내리는 구조는 이 사회의 비정규직 문제와도 맞닿아 있다. 그래서 저자는 이 책의 상당 부분을 콜센터 상담원들이 어떻게 노동조합을 조직하여 억압의 구조에 저항하고 스스로 연대하는지를 보여주는데 할애한다.

문제는 또 있다. 거의 대부분이 여성인 우리나라 콜센터 상담원들은 나긋나긋한 목소리로 고객에게 친절하게 상담하도록 교육받는다. 바로 이 사회의 ‘이상적인 여성상‘에 대한 고정관념을 재생산하는 것이다. 고객의 불만에 공감하고 순종적으로 응대하고, 수화기 너머 상대방이 불친절하거나 화를 내도, 심지어 성희롱을 해도 절대 저항하지 않는 여성상. 콜센터는 현대판 ‘디지털 현모양처‘를 만들어내는 공간이기도 하다.

저자가 결국 의료인류학자로서 하고 싶었던 것은 ‘무엇이 상담사들을 아프게 만드는가‘를 밝히는 것이었다. 흡연, 음주, 폭식, 감정 스트레스, 만성 피로 등의 의학적 요인도 중요하지만, 그것보다 억압하는 상황에 저항하고 새로운 관계를 형성할 능력이 소실되는 것이 아픔의 근원이라고 말한다. ‘얼굴과 가슴 없는 사람들‘로 순응해야만 하는 현실이 말이다. 이처럼 저자는 콜센터를 통해 ˝우리가 왜 인간적으로 서로를 보살피며 살아야 하는지 그 소중한 이유를 제시해주지 못하는 체제˝로서의 한국 사회를 조명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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