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렇게 왔다가 이렇게 갈 수는 없다
아지즈 네신 지음, 이난아 옮김 / 푸른숲 / 200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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터키(이젠 튀르키예라고 불러야 하나?) 풍자 문학의 거장 아지즈 네신이 터키 북서부의 도시 부르사에 유배당했던 체험을 바탕으로 한 자전적 수필. 그가 유배된 까닭은 잡지를 창간하여 반정부적인 날카로운 비평을 실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제대로 된 증거나 증인도 없이 서슬퍼런 군부의 폭압적인 재판을 거쳐 징역을 살고, 출소 후엔 연고지도 아닌 부르사로 유배되어 버린다. 유배라고 하면 살 집과 최소한의 음식, 생활비 정도는 지급되지 않을까 생각하겠지만 터키는 달랐다. 부르사에 도착한 아지즈 네신은 매일 방값을 내는 호텔을 잡아야 했고, 돈도 알아서 구해야 했다.

부르사에 도착한 그는 우연히 마주친 옛 친구들에게서 깊은 상처를 받는다. 어릴 적 같이 뛰놀던 친구는 그를 길에서 만나자마자 쏜살같이 도망쳐 버리고, 같은 학교를 나온 헌병대 사령관은 그에게 편의를 봐줄 법도 하건만 아예 모르는 사람인 듯 무시해 버린다. 네신은 그 후로도 친구들을 가끔 마주치지만, 처음엔 다정하다가도 그가 부르사에 유배왔다는 사실을 알고 나면 낯빛이 변하며 내빼듯 자리를 뜬다. 반정부주의자로 낙인 찍힌 그와 말이라도 섞었다간 자신의 안위를 보장할 수 없기 때문이었다.

그 외에도 그는 부르사에서 다양한 인간 군상을 마주친다. 그처럼 유배 온 처지이면서도 극도로 이기적인 행태를 보이는 선생, 네신이 돈을 벌 수 없는 처지 - 반정부주의자에게 감히 누가 일자리를 주겠는가! - 인 걸 알면서도 그의 몇 푼 안 되는 돈을 꿀꺽하는 사기꾼 화가, 네신이 반정부조직의 수장이라 굳게 믿고 자기도 조직의 일원이 되고 싶다고 매일같이 조르는 얼간이 등등. 네신은 이런 사람들과의 자칫 심각할 수 있는 경험을 우스꽝스럽고 유쾌하게 묘사한다.

네신의 대단한 점은 타인만 그렇게 희화화하는 게 아니라 자기 자신의 빈곤한 처지도 마찬가지로 해학의 대상으로 삼았다는 것이다. 오랜만에 간 목욕탕에서 내내 빨래만 하다가 목욕은 제대로 못하고 나온 경험, 수중에 돈이 없어 전 재산이나 다름 없는 해진 담요를 벼룩시장에 팔려다 차마 그러지 못한 경험, 너무 배가 고파 사람들과 많이 먹기 내기를 하다가 져서 몰매를 맞은 경험... 자신의 비참함 마저 웃음으로 소화할 수 있었던 건 그의 내면이 그토록 단단했기 때문이리라.

네신은 결국 유배에서 돌아와 100편이 넘는 풍자소설을 집필하여 터키 문학계에 큰 족적을 남긴다. 터키인들이 가장 사랑하는 작가로 남은 아지즈 네신의 가장 큰 문학적 자산은 굴곡진 삶에서 분노보다 웃음을 택한, 그럼으로서 인간의 존엄함을 증명한 그의 굳은 성정이 아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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