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둠의 왼손 어슐러 K. 르 귄 걸작선 1
어슐러 K. 르 귄 지음, 최용준 옮김 / 시공사 / 201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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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대한 작가 어슐러 K. 르 귄의 대표작을 꼽으라면 많은 이들이 판타지에서는 <어스시 연대기> 시리즈를, SF에서는 바로 이 <어둠의 왼손>을 선택하리라. SF와 판타지 두 장르에서 모두 거장의 반열에 들었으며, 이 장르에서 노벨문학상을 받을 수 있는 유일한 작가라는 평을 들었던 어슐러 K. 르 귄. 그녀의 소설은 항상 판타지와 SF 장르에 대해 우리가 갖고 있는 선입견과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움직인다. 젠더와 인종에 대한 문제를 작품 곳곳에 넣는 것으로도 유명하다.

이 <어둠의 왼손>도 마찬가지이다. 먼 미래, 화합과 평화를 추구하는 행성 연합체인 에큐멘의 대사인 겐리 아이는 ‘겨울 행성’ 게센에 파견된다. 그의 목적은 게센이 에큐멘 연합에 가입하는 대가로 상대적으로 문명 발달 속도가 늦은 게센이 에큐멘의 지식문물을 전수받게 하려는 것이다. 에큐멘은 에르헨랑 왕국과 전체주의 국가인 오르고레인으로 양분되어 있는 상태. 겐리 아이는 먼저 에르헨랑 왕국에 가서 에큐멘은 순수히 평화로운 교류의 목적으로만 게센에 연합 가입을 권한다는 사실을 왕에게 설득하려 하지만, 왕은 다른 목적이 있을 거라는 의심을 거두지 않는다. 에르헨랑의 수상 에스트라벤은 그를 돕는 건지 아닌지 모호한 태도를 취하지만 왕의 변덕으로 인해 사태는 급변한다.

이 소설에서 특기할만한 설정은 게센인들에게는 성별이 없다는 점이다. 평소에는 성이 나뉘어 있지 않으나, 25~30일 주기로 ‘케메르’라는 성행위가 가능한 상태가 되면 그는 여성으로 변하고 그 옆에 있는 게센인은 남성이 되어 섹스와 임신을 하게 된다. 그래서 게센인들은 한번은 남자가 되었다가 다음 번에는 여자가 되어 출산을 할 수도 있다. 그것도 같은 파트너와! 게센인들은 겐리 아이를 항상 발정기에 들어 있는 변태라고 본다(게센인들은 성별 구분이 없어서 그런지 성욕이 그다지 강하지 않은 것으로 묘사된다). 사실 생물학적 관점에서 완전히 틀린 말은 아닌데, 1년 내내 섹스가 가능한 우리 호모 사피엔스 종은 다른 동물들에겐 충분히 이렇게 보일 수 있을 듯 하다.

성이 이분화되어 있지 않은 까닭에 게센인들에게는 이분법적인 관념의 정도가 대단히 낮다. 예를 들어, 지배적/순종적, 주인/노예, 능동적/수동적 따위의 구분이 없다. 즉 사회적 긴장이 그리 높지 않은 행성인 것이다(그래서 아직 게센에는 ‘전쟁’이라는 개념이 등장하지 않았다고 나온다). 또한 모든 사람이 출산을 할 수 있기 때문에 성이 나뉘어 있는 세계와 달리 여성들이 생리적・육체적으로 완전히 출산과 육아에 묶일 일이 없다. 성에 따른 부담과 특권을 똑같이 나누어 가진다는 이 독특한 설정은 페미니스트로서의 르 귄의 사유를 여실히 나타낸다. 그리고 주인공 겐리 아이는 검은 피부를 가진 흑인으로 묘사되는데 본 작품이 1969년에 출판된 것을 감안하면 상당히 파격적이라 할 수 있다. 이 또한 르 귄의 진보주의적 관점을 잘 반영한 설정이라 하겠다.

읽기 쉬운 소설은 아니다. ‘겨울 행성’이라는 명칭에 걸맞게 어둡고 음울한 환경 묘사 - <어스시 연대기> 또한 내내 황량하고 암연한 배경이 주를 이루었던 걸 보면 르 귄의 취향이 그러한 가 보다 - 와 낯설기 그지 없는 설정과 용어들이 수월한 독서를 가로막는다. 하지만 이 책을 단순한 SF 소설로서가 아닌, 르 귄이 꿈꾸는 젠더와 인종, 평화에 대한 사변적 실험이라 보면 여운이 아주 길게 남는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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